구조요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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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혹시나 하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여 동안 지아가 A파트에 붙인 멜로디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지난 번에 썼던 거랑 비슷한 거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꾸짖는 게 아냐. 이런 경우 종종 있으니까.”
몇 개월간 타이틀 곡 하나 잘 뽑아내겠다고 들러붙었으나 번번이 반려되었던 곡이 십여 곡에 달하고, 중도에 포기한 곡이나 버린 곡까지 합치면 손, 발 다 합쳐도 세기 힘들다. A&R에서 요구한 사항에 맞추다보니 비슷한 템포, 비슷한 리듬을 자기도 모르게 자기 복제하는 경우가 생기고 그 와중에 멜로디까지 비슷해지는 건 고의 없는 부작용이다.
“안 되겠다. 일단 좀 쉬자.”
결국 창모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건반을 두드리며 멜로디라인을 만들어보려 했던 지아도 손을 내렸다. 창모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리는 지아를 보며 아예 컴퓨터를 꺼버렸다.
“스트레스 많이 받지?”
“조금요. 저보다 선배님이 더 많이 받지 않으세요?”
“익숙해지질 않아. 그래도 나중에 내 노래로 무대에 오른 가수를 보면 조금 나아지긴 하는데, 가끔 이렇게 죽어라 안 나올 때는 그냥 관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창모는 일어나 겉옷을 챙겨 들었다.
“나가시게요?”
“잠깐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 같이 갈래?”
“저도요?”
“귀찮으면 그냥 있고.”
“아뇨, 귀찮은 건 아니고요. 저도 같이 가도 되나 해서. 괜히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방해는 무슨. 준비해.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리프레쉬하자.”
창모의 가벼운 손짓에 지아는 문득 마카롱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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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사무실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4분기를 마치고 3/4분기에 접어든 이 시점에서 지난 반기 연결 재무상태표 및 포괄손익계산서 등을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유가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고 재무팀 직원들이 만드는 거지만 이를 감독하고 점검하는 역할은 단유가 해야 했다.
그리고 명시된 의무는 아니지만 재무 이사로서 해야 할 또 다른 업무가 있었는데, 바로 재무팀 직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충원될 겁니다.”
격무에 시달리는 직원들을 위해 재무팀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의 이면이라고 해야 할까? 경리와 회계를 ‘재무팀’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다루다 보니 직원들이 점점 늘어나는 업무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스타들과 스태프들이 늘어날수록 업무량은 급격히 증가하는데, 특히 가을철은 각종 행사와 축제, 이벤트들이 많아 각종 계약 건부터 해서 영수증 처리까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이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반기 평가서까지 작성해야 하는 직원들의 노고가 말이 아닐 지경.
단유가 나름 돕는다고 해도 직원들의 업무량이 늘어나는 속도는 따라가지 못하는 추세라 결국 충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차피 하반기 공채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그때 재무팀도 필요한 인원을 충원해야 하는 시점에서 경영·인사팀으로부터 충원조정건이 들어왔다.
“2명이요? 그럼 6명밖에 되질 않잖아요?”
“6명도 솔직히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6명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사님. 다른 회사에서는 솔직히 4명도 많다고 할 겁니다. 저희 회사 규모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일이 많다고 하는 건 직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절대 재무팀 사람들이 일을 안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단지 다른 일반적인 경우를 말한 겁니다.”
“다른 일반적인 경우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 팀 직원들, 업무량 포화상태입니다. 인원이 더 충원되지 않으면 만에 하나 팀 전체가 마비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려에도 인사팀에서는 6명으로 컨펌 되었으니 더 이상의 충원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야 합리적이고 타당한 근거가 있겠지만―예를 들면 전체 티오 중 다수를 매니지먼트 사업부에서 가져갔다던가―단유와 재무팀 직원들에게는 조금 불만이 생길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단유는 자기 팀의 직원들이 겪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주고자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한편,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사실 찾는다고 했지만, 단유가 당장에 선택 가능한 방법은 프로그램을 통한 도움뿐이었다. 택윤이 현대 기술 발전의 어두운 일면을 상기하며 슬퍼했던 것은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설자리가 점점 줄어든다는 이유였는데, 지금의 경우는 일할 사람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기술이 포지션을 보충해야 했다.
때문에 집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시간이 남는 틈을 이용하여 프로그래밍을 했고 간단한 테스트 후 재무팀에 프로그램을 배포했다.
팀원들은 단유가 배포한 프로그램을 받은 날, 단유가 어디선가 구매한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놀랍도록 업무에 딱 맞춤인 데다, 다소 투박하긴 하지만 편의성과 직관성이 너무나도 훌륭한 제품이라 단유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회계 관리는 물론이고 경리 업무도 기존 업무 대비 50% 이상 효율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간단한 숫자 입력만으로 자동으로 서식을 완성시키고 그 내용을 자동으로 업데이트 하여 각종 양식의 보고서까지 완성 시켜주는 터라 편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더구나 보고서도 사내에서 사용하는 양식을 따르면서 보기에도 좋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는 게 대부분 반응이었다.
“이사님, 대박입니다.”
“사용하기 편한가요?”
“편하다마다요.”
사람이 직접 입력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지만 그래도 편하고 빠른 일 처리를 돕는다는 장점이 직원들을 조금이나마 홀가분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사람은 필요했다. 공장도 아닌 사무실에서 완전 자동화란 시스템 전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니까.
“디자인은 조금 별로지만, 빠르고 편하니까 사용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효율성이 높으니 디자인 정도야 아무렴 어떨까 싶지만, 그래도 기껏 만든 제품에 흠이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마치 피스 하나 빠진 모자이크 액자 같은 느낌. 문제는 단유에게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
“혹시 디자인이 어땠으면 좋을지 말씀해주실래요?”
질문을 받은 직원이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지금도 사용하는 데는 크게 상관이 없으니까, 디자인은 뭐···.”
“그래도 혹시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고칠 수 있으면 고쳐볼 테니까요. 불편하거나 고쳐졌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도 말씀해주시고요.”
“그럼 추가비용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추가비용이요? 그런 거 없습니다.”
“왜요?”
“제가 직접 고칠 테니까 말이죠.”
“임의로 프로그램 변경해도 되는 거예요?”
“제가 만든 건데 제 마음대로 하는 거죠.”
“네? 이사님이 만드셨다고요?”
“네.”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리 놀랄 만한 프로그램은 아닌데요.”
“와, 대박. 이사님 완전 능력자시네요? 못 하시는 게 뭐에요?”
놀라는 직원 옆에서 ‘디자인 운운’했던 직원은 전전긍긍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몰라보고 디자인이니 뭐니 흠만 잡았다며 죄송하다는 직원에게 단유는 손을 저었다.
“죄송하긴요. 그냥 필요할 거 같아서 만든 거 뿐인데요. 지금보다 더 괜찮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면 저로서도 만족이니까 하는 겁니다. 재미도 있고요.”
“그럼 혹시 전에 쓰던 이거요, 사내 워크메신저로 사용하는 거, 이것도 이사님이 직접 만드신 건가요?”
“네.”
“대박. 저 지금까지 계속 어떤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만든 제품인 줄 알았는데. 이사님, 혹시 컴공과 나오셨어요?”
“아뇨. 물리학과 나왔어요.”
“물리학과요? 경제학과나 경영학과 아니시고요?”
단유의 전공을 처음 알게 된 직원들이 놀랍다는 표정을 짓기에 단유는 쑥스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이사님.”
사무실을 나갈 때마다 저렇게 알려주는 모습이 다정다감하다며 직원들이 뒤에서 단유를 칭찬할 때, 단유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창모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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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사님.”
단유는 인사를 건네는 창모와 지아에게 마주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디 나가십니까?”
“아,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려고요.”
“일이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조금요.”
창모의 대답을 즉각 이해한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려 이해한다는 뜻을 전했다. 잦은 간부회의에서 A&R 팀장이 종종 핑계처럼 ‘곡이 나오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자주 언급했던 탓이다.
말없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창모가 단유에게 어디 가냐고 묻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으니 달리 말을 걸 화제가 없어 셋은 조용히 지하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각자의 차로 흩어진 후, 단유는 자신의 차에 올라 잠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잠시 후, 창모의 외제 차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간 이후에도 단유는 가만히 운전석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붉은 승용차 한 대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그러고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딸깍, 문이 열리고 나윤이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조금 전에 내려왔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차가 너무 막히더라?”
“안 늦었으니까 괜찮아.”
“오케이. 그럼 고고.”
“안전벨트.”
“아, 그래. ···야, 이럴 때는 남자가 먼저 안전벨트 딱 잡아서 딱 끌어가지고 딱 꽂아주고 해야 멋있는 거야. 몰라?”
“몰라.”
“아, 모르는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해? 나도 손이 있는데, 내 손으로 하면 되지. 그렇지.”
단유는 대꾸 없이 시동을 걸고 드라이브로 기어를 움직였다.
나윤이 굳이 매니저를 두고 단유와 함께 나선 것은 모처럼의 휴일이라 매니저에게도 쉬는 날을 주고 싶다는 이유와 단유가 개인적인 부탁을 해온 탓이었다.
“도와줬으면 좋겠어, 누나가.”
“내가 널 도울 일이 있다고? 그럴 리가.”
“왜?”
“그렇잖아? 내가 너보다 나은 게 단 하나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널 도와? 잘못해서 일이나 그르치면 어떡하려고.”
“그럴 일 없어.”
“무슨 일인데?”
“도움을 요청한 친구가 있는데, 나보다 누나가 이야기를 듣고 조언을 해줬으면 해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음, 잘 모르겠어.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
“···연예인?”
“일단은.”
만나려는 상대에 대한 간략한 프로필을 설명하며 단유가 차를 몰아 향한 곳은 신림역 근처였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도어벨 소리를 들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간 단유가 인사를 건네자 카운터 뒤쪽에서 아르바이트 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예영이 단유를 보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단유야?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여기 언제부터 예약제로 바뀐 거예요? 연락 안 하면 못 오는 곳인가요?”
“너 농담이 많이 늘었다? 회사 들어가서 사회생활 좀 하더니 많이 바뀌었네?”
“그런가요? 근데 이 누나는 저보고 유머가 없다며 매일 구박하던데.”
“누나? 누구? ···어?”
예영은 단유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나윤을 마주하고 깜짝 놀라 그대로 멈춰버렸다.
“예영 언니?”
“나윤이야?”
두 사람은 서로를 확인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가 서로를 안았다.
“어머, 어머. 세상에.”
“언니!”
곧 포옹을 풀고 나윤의 손을 꼭 붙잡은 예영이 나윤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난 너 영영 못 보고 사는 줄 알았다.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저도요, 언니. 그동안 언니 소식 안 들려서 되게 궁금했었는데.”
두 사람의 감격스런 재회를 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괜히 카운터 앞에 멀뚱히 서 있기는 좀 그렇다. 단유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 적당한 빈자리로 향하며 저와 똑같은 표정으로 멀뚱 서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커피 한잔을 부탁했다.
단유가 가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십여 년 만에 만난 회포를 당장 푸는 것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