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30화 (930/956)

의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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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벨이 울리자 쿠션을 끌어안고 있던 나윤이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왔다!”

감기몸살이라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의문을 품는 단유를 뒤로하고 현관으로 달려간 나윤은 곧 히죽 웃으며 돌아왔다.

“헤헤, 맛있겠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치킨.

“혼자라서 치킨 먹기 얼마나 힘들었는데.”

바삭바삭한 치킨의 맛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주문한 즉시 먹어야 하는데, 혼자서는 그 양을 다 처리하기 힘들다. 남기면 되지 않느냐는 단유의 반문에 나윤은 고개를 저었다.

“식은 치킨은 처치 곤란일 뿐이야.”

그런 이유로 나윤은 돌아가려는 단유를 붙잡았다.

“병문안 오면서 치킨 한 마리는 기본으로 사올 줄 알았지.”

“그게 언제부터 기본이 된 거야?”

“몰랐으면 지금부터 알면 되지. 자, 먹자.”

소파 앞 테이블에 배달온 치킨을 두고 나윤은 어깨춤을 췄다. 곧 다리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물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나윤. 그 모습에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치킨에는 맥주지?”

함께 배달시킨 생맥주를 컵에 콸콸 부어 단유에게 한잔을 건네고 다른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같다.

감기몸살에 걸려 약 먹고 쉬고 있다는 사람이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하는 단유에게 남은 다리 하나를 쥐어 주는 나윤.

“나 저녁 먹었어.”

“배불러?”

“응.”

“그래도 치킨 하나 들어갈 공간은 있겠지? 없어도 먹어. 너 운동 많이 하잖아? 이 정도로 살 안 찌니까 걱정 말고 먹어.”

살이 문제가 아니라 위가 걱정인 건데, 나윤은 상관없다며 다른 조각 하나를 집어 든다. 볼이 터져나갈 듯 채워 넣는 모양새가 거의 인간 햄스터 수준이다.

치킨 반 마리와 맥주 한 캔을 해치운 나윤은 기분 좋게 소파에 눌러앉아 배를 문질렀다.

“덕분에 잘 먹었어.”

“아픈 사람 맞아?”

“내일이면 감기가 뚝 떨어질 것 같은데? 다 네 덕이야. 잊지 않을게.”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던 나윤은 단유에게 손짓을 했다. 옆으로 오라는 신호에 단유가 왜 그러냐 물어도, 말은 안 하고 손만 까닥거렸다. 못 이기는 척 단유가 옆에 앉으니 나윤은 단유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더니 머리를 살며시 얹었다.

“좋다.”

“배불러서?”

“응.”

아까와 다른 의미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단유야.”

“응?”

“예전에 말이야.”

“응.”

“예전 회사에 있을 때 말이야, 우리 관리하던 팀장이 바뀐 적 있어.”

“가디스R 때?”

“응. 수연 언니 나가고 나서 가디스R을 계속 할 건지 말 건지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때 아마 기존 팀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거 같아. 그리고 새 팀장이 왔어. 새로 온 팀장님은 가디스R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미션을 받았을 거야. 수연 언니의 가창력을 커버하려면 적당한 수준으로는 안 되잖아? 게다가 당시 유행처럼 5인 이상 걸그룹이 쏟아지던 때였으니까, 새 팀장님은 연습생들을 더 많이 뽑아서 아예 새로운 가디스R을 만들자는 생각이셨나봐.”

나윤과 헤어진 이후의 일인 듯했다. 새로운 도약을 기원하며 헤어진 이후 그녀와 그녀 주변의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알지 못했던 이야기이긴 한데, 왜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낸 걸까?

“솔직히 난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도 내가 원년 멤버니까 내가 중심을 잘 잡으면 문제 없을 거야, 라고. 새로 들어오는 연습생들한테는 내가 선배인 거잖아? 선배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하더라.”

데뷔를 하고도 소속사에서는 계속 레슨을 받도록 했다. 최정상급 가수도 가끔은 보컬의 완성도를 위해 보컬 트레이너와 1:1로 레슨을 받기도 한다는데, 하물며 아직 보컬의 완성도 되지 않은 신생 걸그룹의 멤버가 레슨을 마다할 순 없었다. 그게 다 정산시에 까이는 빚이긴 해도 그렇게 실력을 키울 수 있다면 안 받는 게 비정상인 것이니, 나윤은 기꺼이 레슨을 받았다. 당시의 트레이너는 데뷔 전부터 나윤을 가르쳐주던 보컬 트레이너기도 해서 꽤 정도 들었거니와 나윤의 장단점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트레이너여서 레슨을 받기도 편했다.

그런데 새로 온 팀장은 그 트레이너를 단번에 잘랐다.

“이유는 몰라.”

그리고 자신이 데리고 온 보컬 트레이너에게 레슨을 받도록 요구했는데, 그때 새 트레이너가 나윤에게 한 마디 했다.

“네 보컬은 시장에서 통하지 않아.”

트레이너의 말의 요지는 새로 처음부터 배우라는 뜻이었다. 발성부터 테크닉까지, 다른 신입 연습생들과 함께 시작부터 다시 하라는 요구에 나윤은 쉽게 수긍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비록 완성된 보컬리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수연 다음으로 보컬이 뛰어난 가수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새 트레이너가 그런 평가를 싹 무시하고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한다고 하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윤이 팀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소연했다. 팀장은 듣자마자 벌컥 화를 냈다.

“네가 뭔데 잘난 척이야!”

뭐냐니. 그래도 나름 보컬 그룹의 멤버였고 당시 차트 상위권에까지 올랐던 경험이 있는 데뷔 멤버였다.

“그런 정신머리로 무슨 데뷔야? 정말 처음부터 새로 해야겠구나.”

만약 트레이너나 팀장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 어떤 성향이 시장에 적합한 보컬인지 설명해주었다면, 그래도 조금 고민하고 수긍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설명도 없이 단언하듯 넌 안 돼, 라고 말하며 비난하면 듣는 입장으로선 결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나윤은 당시 고작 20살. 데뷔 연차도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였고 상대는 회사 내에서도 파워가 있는 팀장급 인사였다.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고 싶어도 달리 하소연할 데도 없는 상황. 울며 겨자먹기로 레슨에 들어갔지만, 트레이너는 늘 비난과 폭언을 일삼았다. 그것도 데뷔도 못 한 후배들 앞에서.

“정말 힘들었어. 하루하루가.”

“이사님한테 말할 수 없었어?”

당시 가디스R의 데뷔를 추진했던 이사가 있었음을 기억해낸 단유가 묻자 나윤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캔맥주를 집었다.

“말했었지.”

이사는 나윤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내가 지금 당장은 움직이기 힘들지만, 곧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을 거야. 그러니까 나 믿고 조금만 참아라. 기억하지? 내가 처음 연습생 중에 널 뽑아서 데뷔시키겠다고 했을 때 뭐라고 했었는지?”

그는 스타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었다. 빈말이든 아니든 그건 나윤에게 힘이 되었고 용기가 되었다.

나윤은 이사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레슨을 빠지고픈 충동을 느낄 때도 이사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사는 회사를 나갔다.

“쫓겨났다, 고 해야 하려나? 아무튼 공식적으로는 자진해서 나간 거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쫓겨났다는 중론이야.”

“왜?”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사내 정치에서 밀린 거 같애.”

단유는 어렴풋이 나윤이 무엇을 말하고픈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줄곧 단유에게 해왔던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갤럭시즈가 나가고, 가디스R이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하면서 사내 권력지도에 변화가 생긴 거야. 표면적으로 담당 팀장이 잘리는 것으로 일이 끝난 듯 보였지만, 사실 모든 일이 이사님을 쫓아내기 위한 수순으로 진행되었던 거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연습생들만 피를 봤고.”

나윤만 당한 게 아니었다. 팀장을 위시한 트레이너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연습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들들 볶다시피 구박했다. 때문에 기존에 좋은 평가를 받던 연습생들도 월평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혹평과 비난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결국 몇몇은 회사를 떠나기까지 했다.

연습생들부터 시작된 갈등과 붕괴는 결국 이사에게까지 책임이 전가되었고, 이사는 결국 변명도 못하고 회사를 나가야 했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이사님이 나간 후에 팀장이랑 트레이너도 같이 쫓겨난 거야. 회사 전체를 물갈이한다는 명목으로. 웃기지 않아? 근데 말도 안 되는 그런 일들이 우리 회사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란 거야. 다른 회사들에서도 종종 그런 비슷한 일이 벌어졌대. 왜일까?”

이미 답은 단유와 나윤 모두 알고 있었다.

“같잖지도 않은 권력이 뭐라고. 누가 들으면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럴까 싶은데,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다투더라.”

“···그래서 그 후에 누나는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다른 애들 그만둘 때 나도 같이 그만뒀었지. 팀장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였어. 그걸 알고 어찌나 허무하던지.”

그래서였구나. 이후 가디스R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이유가. 가디스R은 이미 예전에 끝이 났던 셈이다.

“난 그래서 정치란 걸 경멸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투고, 그 다툼의 여파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만 피해를 봐야 하니까.”

그저 꿈을 쫓아 땀을 쏟던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러니까, 단유야. 넌 제발 그런데 휘말리지 마. 넌 좋은 사람이잖아? 네가 힘들고 아파하는 모습 보기 싫어.”

단유는 나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손을 들어 나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뗐다.

“고마워, 걱정해줘서. 그런데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뭔데?”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냐.”

“또 그 소리. 전부터 넌 꼭 그렇게 말하더라. 니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세상 누가 좋은 사람인데?”

“누나.”

“···나도 좋은 사람 아니거든?”

“선생님.”

“하은 언니? 뭐, 하은 언니는,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너도 좋은 사람이라니까?”

“명수.”

“뭐야. 네 주변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라고?”

“나 빼고 다 좋은 사람이야. 괜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그래서야. 내가 지금 나서는 이유는.”

“무슨 말이야?”

“지금 회사에서 가장 앞에 서서 달리는 사람은 대표님이지. 그런데 우리 대표님, 의욕은 앞서는데 주변을 잘 못 봐. 아니, 보긴 보는데 마음이 약해서인지 결단을 못 내리는 거 같애. 적과의 동침, 이라고 해야 하나? 적은 아니지만, 아무튼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음을 알지만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는 거 같아. 그래서 내가 나선거야. 내가 대표님을 대신해서 앞에 서면 대표님을 향하던 총구가 나를 향할 테니까.”

“그러지 말란 소리야. 왜 니가 총알 받이가 되려고 그래?”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고 했지? 난 총알받이가 될 생각이 없어.”

“그럼?”

“총알받이는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게 총알받이지만, 난 꽤 튼튼한 방탄복을 입고 있거든. 총에 맞아도 쓰러지지 않지. 그러니 안심하고 지켜봐도 돼.”

“차라리 그 반대 세력이란 사람들을 잘라. 그러면 되잖아?”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 비유해서 그들이 마치 적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들은 적이 아냐. 오히려 우리와 목표는 똑같으니까.”

“무슨 목표?”

“이 회사를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 그들도 같은 목적이야. 단지 나나 대표님과 방법이 다를 뿐이지, 회사가 잘 되길 원하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깃든 거지. 그걸 가지고 그 사람들을 내칠 순 없어.”

“몰라, 그런 거. 난 그냥,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니까. 몸이든, 마음이든.”

“난 괜찮아.”

“왜?”

“다쳐도 이렇게 위로해줄 사람 있으니까.”

“···너 방금 좀 느끼했다?”

“그랬어?”

“응. 그래도 괜찮아. 내가 너그럽게 봐줄게.”

“고마워.”

“고마우면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만 더 갖다 줄래?”

“그만 마시고 쉬지 그래?”

“이게 내 나름의 쉬는 방식이야.”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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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훈을 지키겠다는 단유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단유가 지키고픈 사람들이 또 있었다. 지킨다기보다는 돕고 싶달까?

잊을만 하면 벌어지는 귀신 소동도 그런 이유지만, 또 그가 돕고 싶은 사람들은 바로 한 건물에서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이었다. 나윤의 표현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일만 할 뿐인 순진한 사람들이 괜한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동시에 그들이 행복한 직장생활을 이어나가며 짓는 밝은 표정들을 계속 보고픈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처럼 크게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통 크게 제안했다.

“보너스? 우리 보너스 지급할 만큼이 됩니까?”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너무 허리띠 졸라매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그 덕분에 직원들에게 크진 않지만 보너스를 지급할 정도는 되었네요.”

“얼마 정도를 예상하는데요?”

굳이 서류를 보지 않고도 충분히 리포팅이 가능한 단유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일일이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년 투자분을 감안하더라도 대충 300% 정도의 보너스는 지급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정도 수익이 났다고요? 우리가?”

놀라는 간부들의 표정을 감상하며 단유는 설명했다.

“웅녀 프로젝트가 장기화되면서 들어가는 비용이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일정량의 지출이 가늠이 되니 무리하게 내년 예산 책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거든요. 쉽게 말하면 사내 유보금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깁니다. 게다가 올 한해 새로 영입된 연예인들의 활동 덕에 수익도 늘었고요. 그 부분을 모두 열심히 일한 직원들에게로 돌리는 겁니다.”

“차라리 내년 프로젝트 완성 직후에 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언제 어떻게 돈이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지난 1년간 재무팀을 운영하며 확인해보니, 경비지출과 수입을 제대로 정산하고 운용하면 회사가 어려울 정도의 위기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물론 비상시를 대비한 유보금은 충분히 확보하고도 말이죠. 지나치게 방만한 운영을 한다거나 불필요한 유보금을 쌓아두는 건 좋지도 않으니, 차라리 그 돈으로 직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입니다.”

단유는 대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는 재무이사로서의 제안일 뿐, 결정은 대훈이 해야 한다.

“추석 보너스로 적당하겠네요.”

대훈은 흔쾌히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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