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29화 (929/956)

의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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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말씀이 맞다고 쳐요. 그래도 그게 선생님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선생님이 곁에 있다고 해서 제가 더 크지 못할 이유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내 생각은 달라. 물론 네가 나한테 애들처럼 의지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이 너의 생활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예를 들면요?”

“뭐, 굳이 예를 들자면 여자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지도 못할 테고.”

“여자친구 없는데요.”

“여자친구가 없는 것도 나처럼 예쁜 사람이 늘 곁에 있으니 눈에 차는 사람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

“···그리고요?”

“···너 눈이 이상하다? 동의 못 해?”

“계속 말씀해 보세요. 다음에 이어질 말이 뭐냐에 따라 선생님의 진심에 대한 신뢰도가 결정될 것 같으니까.”

“내 입으로 계속 말하기가 부끄러우니까 나머지 이유는 네가 알아서 찾도록 하고. 아무튼, 이제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야.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고 가족도 만들고 그러면서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러면 난 더 이상 너한테 바라는 게 없을 거 같아.”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보다 선생님이 더 급한 거 아닌가요?”

“알면 너도 그만해. 나도 이제 남자도 만나고 그래야 하지 않겠니? 너처럼 재미없고 센스도 없으면서 딱딱하게만 구는 녀석이 곁에 있으면 어떤 남자가 나한테 오겠어?”

“아, 네. 알겠습니다.”

“뭔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거 같은데?”

“아뇨, 진심으로 선생님의 행복을 빌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하은은,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진심으로 네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야. 언제까지 너에게 빚지고 싶지 않고.”

“제가 선생님께 진 빚은 어떻게 하고요?”

“네가 무슨 빚을 져. 설령 빚이 있었다고 해도 예전에 갚고도 남았어, 너. 덕분에 난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먹고도 집에는커녕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만 하는 신세가 됐지만. 어쨌든 네가 나한테 빚을 졌다는 둥 하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이제부터는 너만의 인생을 살길 바랄게. 나나 명수나 힘들게 챙기려고 아등바등거리지 말고.”

“힘든 적 없었거든요?”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려고 그래? 너 여자친구한테도 그래? 그러다 미움받는다?”

“수긍하기 힘든 말씀을 계속 하시니까 그렇죠. 그리고 여자친구 없다니까요?”

“이상하네? 여자친구가 있는 걸로 들었는데? 아직 아닌가?”

“···공 이사님께 들으신 거예요?”

“아니면 어디서 듣겠니? 말 나온 김에 묻자. 어떠니?”

“뭐가 어때요?”

“시치미는. 다른 사람은 모르는지 몰라도 나는 알잖아? 그애가 너의 첫사랑이었다는 거. 아니면 걔 말고 다른 첫 사랑이 있었어?”

“아니거든요.”

“첫사랑 맞잖아? 그래서 어때? 들어보니 회사에서 자주 차도 마시고 그런다며? 데이트는 안 해?”

“워낙 바쁜 사람이라 따로 만날 시간 같은 거 없기도 하고, 그보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그런 사이가 아닌 게 뭔데?”

“연애하고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럼?”

“그냥 친한 친구, 같은 거예요.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거.”

“걔도 그렇게 생각한다든?”

“······.”

“내가 그래서 너랑 같이 못 있겠다는 거야. 이제 나나 명수는 그만 신경쓰고 네 주위로 신경을 좀 돌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새로운 관계도 만들고, 사랑도 하고 그래야 사는 거지.”

“모처럼 만났는데 지금 되게 후회되기 시작하네요. 왜 이렇게 잔소리가 늘었어요?”

“나이 들어봐. 이렇게 돼.”

“나이 탓이군요.”

“씁.”

하은의 도끼눈에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

결국 언제나 그랬듯 농담이 적당히 버무려진 대화로 서로의 돈독함만을 확인한 단유는 하은을 그녀의 일터로 데려다준 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 단유는 여전히 정체가 풀리지 않은 도로 위에서 천천히 차를 몰며 하은이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녀가 단유에게 했던 말들은 사실, 다른 경우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들. 물론 부모가 없는 단유로서는 들어본 적 없지만 다른 친구들에게서, 대중 매체에서 종종 이야기되는 것들을 통해 하은의 말을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옛 격언에도 있지 않은가. ‘입신양명’이라고.

효를 유달리 고귀한 가치로,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로 숭상하는 사회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출세하여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는 사회이다 보니 자식의 출세를 다른 무엇보다 크게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입신양명해야만 효를 다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 는 당연한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독신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인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결혼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 권장되고 그것이 바른길인 것 마냥 인식되는 경향도 있다.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 한 가정을 책임지는 일이 존중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이 반드시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한 의문은 가질 수 있다.

인생은 천태만상, 이라고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는데, 당연히 다양한 삶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 역시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 어디에도 정답, 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게 삶일 것이다. 하물며 하은이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그녀의 기대일 뿐이지, 단유가 반드시 살아야 하는 삶의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녀가 말한 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도 단유의 욕심이다. 기왕이면 그녀가 보기에 자랑스럽고 떳떳한 모습이길 바랐고, 그래서 단유는 그 중간 어디쯤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으려나?’

굳이 그녀의 바람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출세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녀가 바라는 것처럼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굳이 안 하겠다고 떼를 쓸 필요는 없는 일인데, 습관처럼 반대의 경우를 상정하고 비판적으로 따지고 들 문제는 아니지 싶다.

더 솔직히 말하면, 단유 본인도 하은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녀’를 무심코 떠올렸으니까.

‘첫사랑?’

풋, 저도 모르게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

“여보세요?”

―웬일이야?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그냥.”

―그냥?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고?

놀랍다는 듯 반응하는 나윤의 목소리를 듣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즐겁기까지 했다. 이런 기분을 느낄 줄 알았다면 진작에 이렇게 전화 해볼걸, 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뭐 하는데?”

―수상하네. 이런 걸 물어볼 애가 아닌데.

“미안.”

―뭘 또 사과하고 그래? 집이야. 쉬고 있어.

그녀가 며칠 전 해외 촬영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을 떠올리며 단유는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막상 전화는 했는데 이어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면 유리 너머로 어두워진 하늘을 뒤덮은 희끗희끗한 구름들이 마치 단유의 머릿속 가득 채워진 기분이었다.

“오늘 선생님 만났거든.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나 이야기가 나와서, 그래서 전화해봤어.”

―하은 언니? 잘 지내시지?

“응.”

단유는 하은이 한탄하는 어투로 투덜거리며 말하던 일들을 적당히 간추려 말했다.

“바쁘대.”

―그렇구나. 언제 시간 한 번 내서 만나봐야지 했는데 도통 시간이 안 나네. 다음에 만나면 내가 안부를 묻더라고 전해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 아실걸?”

―어떻게?

“···생각보다 선생님이 유능하시더라고. 모르는 게 없어.”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오늘 너 되게 수상하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 평소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수상해.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왜 전화했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고, 하다보니 어느새 이런 가벼운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해외 다녀오느라고 힘들었지?”

―힘들긴 힘들었는데, 지금처럼 힘들 줄은 몰랐네.

“···미안.”

―왜 또 사과하고 그래.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지금 감기 걸려서 그래.

“감기?”

―따뜻한 데 있다가 한국 들어오니까 갑자기 추워져서인지 감기에 걸렸네?

“괜찮아?”

―응. 괜찮아. 들으면 모르겠어? 너랑 이렇게 대화할 정도는 되니까 걱정 말라고.

“스케줄은?”

―이번 주 일요일까지는 스케줄이 비워져 있어서 괜찮아. 그 전까지 약먹고 푹 쉬면 금방 나을 거 같애.

“병원엔 가지 않아도 돼?”

―병원은 무슨. 그냥 감기약 좀 먹고 집에서 푹 자면 되니까 그만 신경써. 아, 우리 김 이사님, 회사 일에 지장 줄까봐 걱정하시는 거였어? 걱정 마요. 나 프로니까. 스케줄 펑크 안 낼테니까 걱정마세요.

“······.”

―왜 말이 없어?

“아니, 그냥.”

―···혹시 걱정 돼?

“걱정 안해. 누나 프로인 거 아는데.”

―말고, 바보야.

“응?”

―내가 걱정 되냐고.

“당연하지.”

―그럼 병문안 올래?

“응?”

―싫어?

“싫기는.”

―감기 옮을까봐 걱정 돼서 못 오는 거 아냐?

“아냐.”

―그럼 병문안 좀 와라.

“병문안 오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처음이라서 신선하지?

“신선해.”

―올 때 맛있는 것 좀 사올래? 집에 먹을 게 없어. 아, 오렌지 주스는 사오지 마. 질렸어.

잠시 후, 단유는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

벨을 누르니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조금 마른 듯한 얼굴의 나윤이 마중을 나왔다.

“어서 와. 뭐 사왔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단유가 손에 든 선물용 과일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정말 병문안 왔네.”

“응?”

“아냐. 들어와.”

나윤이 혼자 사는 집에 처음 발을 들이자니 괜히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우리 집에 들어온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

긴장 때문에 바로 받아치지 못하는 단유의 침묵을 오해했는지 나윤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매니저 빼고.”

“응.”

“소파에 앉아있어. 과일 깎아올게.”

단유는 하얀색 가죽으로 된 소파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나윤이 혼자 사는 집은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이었는데 방 하나에 주방이 붙은 거실하나가 전부인 집이었다. 거실을 둘러싼 전면 창이 전경을 감상하기에 적당하지만 반대로 외부에서 내부를 쉽게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커튼 치면 되거든?”

단유의 우려에 나윤이 샐쭉이며 포크와 접시를 건넸다.

“누나 먹으라고 사온건데 누나 먹어.”

“같이 먹으면 되지, 뭘 니꺼 내꺼 따져?”

소파 앞 테이블에 접시를 올려두고 나란히 붙어 앉으니 이미 소파가 만석이다.

“소파가 좀 작지?”

“혼자 사는 집인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맞아. 내가 누굴 초대하고 그런 성격이 아니어서 별로 큰 소파는 필요없다고 생각했거든.”

소파 뿐 아니라 대체로 집 안에 있는 가구나 모든 물품들이 1인용에 맞춰져 있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거의 미니멀리즘적 인테리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벽에는 그 흔한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고, 전면에 40인치 정도의 TV가 작은 장식장 위에 우뚝 솟아나 있으니 그게 전부였다.

“너무 휑한가? 근데 너무 많으면 나중에 집 옮길 때 불편하더라고.”

일거리가 부족해서 수입이 많지 않았을 시절의 나윤이 겪어야했던 불편들이 현재 이 공간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그래도 혼자 사는데 충분하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줄래?”

“어떻게 쳐다봤는데, 내가?”

“아, 이 여자 이렇게 하고 살았구나, 불쌍하네.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어. 지금.”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됐고, 아무튼 병문안 와줘서 고맙네.”

“응.”

단유의 대답을 끝으로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 단유는 포크로 사과를 찔렀다. 푹, 하고 찔리는 순간의 소리가 거실을 울릴 정도라고 하면 너무 과할까?

“TV 볼래?”

단유는 도리짓을 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누나 괜찮은 거 봤으니까, 됐어. 이만 갈게.”

“그냥 간다고?”

“응.”

“···그래, 알았어.”

단유가 일어서자, 나윤도 덩달아 일어섰다. 현관으로 나서는 단유의 뒤를 졸졸 따르던 나윤이 단유를 불렀다.

“단유야.”

“응?”

반사적으로 돌아본 그의 눈에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윤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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