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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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온 친구가 너구나?”
레슨을 하러 들어온 강사가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물었다. 현진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시선을 묵묵히 견뎠다.
“일단은 여기 애들이랑 같이 수업 받아야 하는데 진도를 따라오기 벅찰지도 몰라. 얘들은 그래도 1년 이상 수업을 받던 친구들이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하자. 알았지? 너희들도 여기 새로 들어온 친구가 잘 모르면 먼저 가르쳐 주도록 하고.”
“네.”
“모처럼 새로 들어온 친구도 있으니까, 예전에 배운 걸 되새긴다는 뜻으로 오랜만에 그거 해볼까? 너희들 안 한지 꽤 됐지?”
먹기 싫은 약을 억지로 먹게 된 아이들마냥 투정 섞인 목소리를 내 보지만 강사는 가볍게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입을 막았다. 통합 클래스 당시 지겹게 쳐야 했던 기초 안무는, 한번 시작하면 1시간이 기본일 정도로 반복해야 한다. 반복을 통해 몸에 리듬감을 익히고 동시에 안무에 힘을 싣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잘 따라 하네. 계속해.”
강사의 격려에도 현진은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힘들어 쉬고 싶었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볼에 붙고 난리가 났다. 처음이니까 봐달라는 말이 혀끝에서 간질거렸지만 끝내 내뱉을 순 없었다. 투정 부리던 선배들이 묵묵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걸 지켜보면서 혼자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던 것이다.
“잘하네요.”
연습실 문 건너로 연습광경을 지켜보던 서대리가 한마디 하자, 곧 단유가 대꾸했다.
“잘하진 못하고 열심히는 하네요.”
“이사님, 너무 엄격하신 거 아닙니까? 이제 막 들어온 앤데.”
“그래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니까.”
단유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래도 꾸준히만 의지를 갖고 한다면 언젠가는 능숙해질 것이라 생각하며 레슨을 바라보다가 서 대리에게 이후를 부탁했다.
“레슨이 끝나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니, 것보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단유는 다시 미뤄둔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가고, 서 대리는 다시 유리문 건너로 연습하는 이들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모처럼 자신이 건진 ‘보석’이니 제대로 세공해서 자랑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려면 스스로도 노력해야 할 것이 많다. 어설픈 세공사는 보석에 흠집만 낼 뿐이니, 서투르지 않으려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필요한 것들을 떠올리며 긴 여정을 준비하는 서 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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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님, 서 대립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먼저 들어온 서 대리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뒤이어 현진이 기운 빠진 얼굴로 들어왔다.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네, 조금.”
역시 가식 없는 대답. 단유는 웃으면서 자리를 권했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괜찮아요.”
다만 전과 다른 점이라면 단유를 조금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인다는 점. 뻣뻣하게 앉은 채로 눈동자를 굴려 사무실 내를 구경하는 현진. 하지만 단유의 성격 상 사무실을 그리 꾸미는 편이 아니어서 별로 볼 것은 없을 테다.
단유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싶어서 그래요.”
“확인이요?”
“본인이 정말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요.”
“···만약에 아니라면 계약은 취소하는 건가요?”
“취소는 아니고, 무효화를 하는 거죠.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왠 오지랖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현진 씨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데 허투루 할 수 없잖아요?”
“혹시 사기예요?”
대뜸 되묻는 현진의 말에 마주 앉은 단유보다 서 대리가 더 놀라, 마치 폼페이의 석고상 같은 포즈로 멈춰버렸다.
“사기?”
단유는 당황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혹시 저한테 사기치려고 하셨나고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혹시 간혹 연습생에게 과도한 연습 비용을 청구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사례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말씀드리죠. 이미 서 대리님께서 설명하셨겠지만, 저희는 연습 기간 중에 소요되는 비용을 연습생에게 청구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럼 회사가 너무 손해 아니냐, 는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윈윈하자는 거죠. 저희는 최고의 강사진을 구성해서 연습생들 개인의 실력 향상과 재능 계발에 최선을 다하고, 연습생들은 이를 통해 연예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데뷔 후 성과에 대한 보상을 함께 나누는 겁니다.”
“만약에 성공을 못 하면요?”
“성공의 기준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할 듯 하지만, 일단은 데뷔 이후의 과실이 적으면 적은 대로 나누는 거죠. 무리하게 한쪽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게 저희의 원칙입니다. 만약 현진 씨가 데뷔 이후 괄목한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건 회사의 책임도 있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크든 작든 책임과 성과를 아티스트와 회사가 함께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정산 비율이나 그런 면에서 아무래도 회사가 유리하게 계약이 되겠지만, 그래도 아티스트가 너무 불리하다 싶을 정도로 착취하는 계약은 아닐 것이라는 단유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럼 회사가 너무 손해 아니에요? 만약에 데뷔 전에 그만두면 그때는 어떡해요? 그때도 청구 안 하나요?”
“회사를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네요. 연습생들에 대한 투자는, 말 그대로 투자이고, 그 투자에 대한 손실은 회사가 책임지는 거니까요.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은 저희 회사만 하는 게 아닙니다.”
“대형기획사에서도 한다는 말이죠? 들은 적이 있어요.”
“기획사를 넘어, 이 나라가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요.”
“나라요?”
“초, 중, 고에 대해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단지 법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본래 교육이란 개인의 발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국가의 구성원을 성장시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기에 행해지는 활동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국민들의 교육은 국가 발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아시죠?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한 부차적인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그 본질은 개인의 성장과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 더 많은 국민들이 교육받을수록 국가의 발전 동력은 더 강해질 거란 이야기죠. 때문에 국가는 무상교육이라는 형태로 국가의 인재를 키우려고 하는 것이고 거기에 어마어마한 재화를 쏟아붓는 것이죠. 회사라고 다르겠습니까? 다만 교육의 방향성이 다른 건 지향점이 다를 뿐입니다. 저희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지향하기에 국영수 대신 노래와 춤, 연기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는 것 뿐. 결국은 인재를 양성해서 그 인재를 활용하여 국가를 혹은 회사를 성장시킨다는 큰 틀은 같은 겁니다.”
“되게 어렵네요?”
현진의 짧은 감상에 단유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회사 기준으로 설명드리면, 저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교육이며 동시에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연습생들에 대한 교육과 투자는 저희가 향후 아티스트가 될 여러분들에게 보이는 성의와 후원이며 약속입니다. 데뷔 이후에도 여러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는 약속이고 믿음이며, 만약 현재의 연습생, 현진 씨를 포함한 우리 회사 소속 아티스트들이 그 믿음을 지킨다면 우리는 함께 윈윈하는 신뢰 속에서 성공을 향해 함께 노력하고 도전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말 같네요.”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좋은 취지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해서 저희 회사의 방향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주력하는 곳이기에 저희와 계약하는 여러분들 역시 저희 회사와 같은 목표를 두고 걸어가실 분이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현진 씨의 경우에는 그런 꿈이 없다고 하셨죠? 저희가 비록 현진 씨에게서 재능을 보았고, 포텐셜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계약을 제의했지만, 저 개인으로서는 좀 더 신중한 판단이 앞서야 하지 않았나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
“듣기로 조모님과 함께 사셨다고 하는데, 조모님께서도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고 하죠? 그런 와중에도 조모님께서는 현진씨를 위해 학원도 보내주셨던 듯한데, 그런 현진 씨의 사정을 감안하면 장밋빛 미래만을 약속하며 현진 씨를 이쪽 길로 끌어오기엔 이곳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근데 저 학원은 돈 안내고 다녔어요.”
“그래요? 뭐, 그건 지금 이야기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무튼 조모님께도 제대로 설명을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진 씨의 미래에 대해서 깊은 논의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현진 씨를 이 자리에 부른 겁니다. 그전에 현진 씨 개인의 생각도 들어보고요.”
“만약···.”
단유는 손을 들어 현진의 말을 막았다.
“현진 씨?”
“네?”
“현진 씨가 대체로 솔직하게 가식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성격이란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종종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표현해내야 할 타이밍에 의도적으로 피하는 습관이 있는데, 상대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꺼려져서인지 잘 분간이 되질 않네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화제를 돌리려는 시도는 되도록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
“다른 이야기지만, 가수를 지망하셨죠? 가수는 단순히 근사한 무대에서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대중의 환호를 받는 위치에 서는 게 다가 아닙니다.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게 필요합니다. 안무, 보컬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중 앞에서 서는 스타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대중에게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춤으로든, 안무로든, 연기로든, 대사로든 말이죠. 가식적인 어투와 화법은 대중에게 호의적일 수 없습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언제 배척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연예인입니다. 사실 연예인 뿐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일상에서도 그런 경우는 종종 볼 수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일단 돌아가셔서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정말로 이 길을 걸을 준비가 되었는지, 그리고 할머니와도 이야기를 나누세요. 진심을 담아서.”
단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현진은 일어서지 못했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자니 그제야 현진이 주춤 일어서서 단유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겨우 꺼낸 그녀의 말은,
“이사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였다.
“뭡니까?”
“전에 오디션 때요, 이사님이 그러셨잖아요? 제가 비를 싫어한다고.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싫어하지 않으세요?”
“싫어해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때 스튜디오 들어서기 전부터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코를 씰룩거리는 모습이 마치 불쾌한 냄새를 맡은 것처럼요. 자리에 앉아서도 주위를 돌아보며 냄새를 맡았죠? 후각에 민감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 비가 많이 와서 건물 내에도 평소에는 맡기 어려운 비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죠. 아마 그 냄새를 불쾌해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또 그때 현진 씨 무의식적으로 종아리 부분을 자주 쓸어내리더군요. 맨살에 빗방울이 튀어 묻은 것을 닦아내려는 것처럼요. 반면에 신발은 그렇게 많이 젖지 않아 보였어요. 신발이 젖는 걸 피하려고 되게 조심했던 거겠죠? 들어오실 때의 걸음걸이를 봐선 평소 조심스럽게 걷기보단 보폭을 다소 넓게 벌리며 걷는 쪽이지 싶은데 그런데도 신발에는 흙탕물이 튀거나 한 게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러니 종아리에 물이 심하게 튀겼을 리는 없겠다 싶었죠. 그렇다면 빗물이 떨어지며 묻은 정도가 다일 텐데도 그걸 다소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며 비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추측해 본겁니다.”
“우와! 이사님, 탐정이세요?”
“그게 신경 쓰였습니까?”
“네!”
“그 부분보다 다른 부분에 더 집중해서 대화를 했더라면 그때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러면 오늘의 자리도 불필요했을 텐데.”
“······.”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우리 회사와 함께 하실 생각이시라면 다음에는 좀 더 서로에게 집중하고 대화를 나누도록 하죠.”
거기까지 말하고 단유는 현진과 서 대리를 사무실 바깥까지 나가 배웅했다.
“저분이요, 엄청 똑똑한 분이신죠?”
“나도 거기까진 몰랐다. 그런데 예상을 뛰어넘는 분이신 거 같네.”
두 사람은 그렇게 소회를 나누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