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25화 (925/956)

의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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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요?”

“할머니가 법정대리인으로 허락해줬습니다.”

서 대리는, 처음 현진을 만났을 때 그녀가 ‘부모의 허락으로 학원을 빠지고 나왔다’고 한 말이 실은 그를 경계하느라 둘러댄 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종의 사유로 양친은 돌아가시고, 그녀는 조모의 보살핌 속에 학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는 서대리의 말에 단유는 펜을 놓고 침음을 흘렸다.

할머니랑 단둘이 산다는 15살의 현진에게 진로 선택이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테다. 그녀가 오디션 중에 했던 말도 그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가정 형편은 어떻던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부유한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할머니께서 작은 분식점을 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단유는 턱 아래를 긁적거리며 곰곰이 고민을 하다 다시 물었다.

“학원은 그만두는 건가요, 그럼?”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서 대리는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답했다.

“어,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러지 않을까요?”

어지간하면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는 편이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마냥 존중만 해주기가 어렵다. 단순히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어른이 대신 선택을 해줘야 한다, 는 것이 아니다. 사회 경험이 부족한 데다, 마침 벌어진 상황―캐스팅과 오디션―과 결과가 그녀의 시야를 가려 제대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겠네요.”

서 대리는 앞으로 모아쥔 손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분명히 이쪽이 더 큰 성공일 겁니다. 전 그 아이가 충분히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게 좋겠죠.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어쩌면 평범하게 진학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는 거고.”

“전 그 아이에게 분명 끼와 소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서 대리의 발언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단유도, 서 대리도 알고 있다. 현재의 자신감이 미래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단유는 더 이상의 질문이 의미없다 생각하며 서 대리를 돌려보냈다. 더 깊은 이야기는 본인과 직접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이미 계약도 마친 상황에서 자신이 왈가왈부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겨우 마음을 잡은 소녀를 흔들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우려도 되니 고민이었다.

아직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단유는 머리가 복잡해져 잠시 손을 놓았다. 의자를 밀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건물 아래 좌우로 뻗은 도로 옆으로 심어진 가로수에 가을이 물들고 있었다.

****

서 대리가 건네준 레슨복을 두 손에 들고 복도에 서 있으니, 잠시 후 말간 얼굴에 포니테일을 한 여자애가 다가왔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네.”

“이쪽으로 와요.”

싱긋 웃으며 여자 탈의실로 안내해주는 시화의 뒤를 따라간 현진.

“언니들은 보통 아침에 와서 옷 갈아입고 연습실에 들어가면 이후로는 여길 잘 들어오질 않아요. 거의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살다시피 하니까. 학교 때문에 오후에 오는 사람들도 옷 갈아입으러 온 뒤에는 여길 잘 안 와요. 그래서 공기가 되게 썰렁해요. 일부러 난방을 안 하는건가 싶을 때도 있는데, 뭐 그동안 여름이어서 별로 신경쓰진 않았지만, 이제는 점점 추워지니까 빨리 옷 갈아입고 연습실에 들어가는 게 좋아요. 거기는 따뜻하거든요. 그리고 여기는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거든요? 그래서 핸드폰 있으면 자기 사물함에 넣어두면 돼요. 무음으로 해놓거나 꺼놓거나 하면 되고요.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서 핸드폰만 울리면 무섭잖아요?”

어떤 의식의 흐름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을 비롯한 개인 사물은 사물함에 보관하란 소리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 저는 임시화라고 하고요, 17살이에요.”

“저는 주현진이고요, 내년에 고1이에요.”

“어? 그럼 나보다 어리네? 우와, 이제 나도 막내 끝이네?”

현진도 많이 놀랬다. 솔직히 자신보다 더 어린 줄 알았으니까. 말하는 모양새나, 외모나.

‘키는 나보다 조금 더 크지만.’

시화를 보니, 과연 이런 사람이 연예인이 되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초한 이미지에 밝은 에너지가 시도때도 없이 발휘되는 사람. 가히 아이돌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연습실에 들어선 현진이 자기 소개를 마치고 박수를 받고 있을 때, 서 대리는 팀장 앞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대치 중이었다.

“왜 또 그러는데? 응?”

“······.”

“너 어디 소속이야?”

“신인개발팀입니다.”

“네 상관이 누구야?”

“팀장님이십니다.”

“그 팀장님이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야? 응?”

“아닙니다.”

“근데 왜? 왜 또 이상한 데다 보고를 하고 그래?”

“그게, 지난 번에 오디션을 직접 보신 분이시기도 하니까···.”

“넌 머리 장식으로 달고 사냐? 왁스 바를 곳이 없어서 달고 사는 거야? 안경 거치대가 필요해서 달고 살아?”

“······.”

“아니면 김 이사가 네 친구야?”

“아닙니다.”

“아닌데 왜 그래? 왜 친한 척이야? 내가 무슨, 어? 거,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죄송한 짓을 왜 하냐고 묻잖아!”

“죄송합니다.”

팀장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책상을 탕탕 두드렸다. 어깨를 움츠린 채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던 직원들이 그 소리에 움찔거리며 더욱 몸을 숙였다. 그런 직원들 속에서 한 사람, 진 실장만 마우스 가운데 버튼을 드르륵거리며 열심히 스크롤을 하고 있었다.

‘저 새끼.’

자기는 아닌 척 하며 딴청 피우는 진 실장도 팀장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그냥 어쩌다 몇 번 단유와 함께 움직이나 싶었는데, 요새는 빈번하게 같이 붙어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니, 혹시 단유가 몰래 심어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일이나 똑바로 하면서 하면 몰라, 사고쳐서 시말서 쓴 게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 사단을 내냐고!”

‘사단’이라고까지 할 일이 있나 싶지만, 직속 상관이 홧김에 하는 말을 지적할 순 없는 노릇이라 서 대리는 그저 고개를 깊이 숙일 따름이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사무실 입구에서 들려왔다. 팀장과 직원들의 시선이 쏠린 그곳에 단유가 서 있었다. 팀장이 벌떡 일어서며 인사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거기 서 대리님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요.”

팀장은 쭈뼛거리며 서 있는 서 대리에게 눈을 부라렸다. 서 대리는 얼른 돌아서서 단유에게로 향했다.

“저한테 무슨···.”

“아까 한 가지 물어보지 못했던 게 생각나서요.”

“말씀하세요.”

“그 아이, 어디 소속이 되는 건가요?”

“소속이요? 그야 저희 신인팀···.”

“아니, 그러니까 지망 분야 말입니다. 오디션 때는 그 학생도 달리 지원 분야가 정해진 게 아니어서 물어보지 못했는데, 혹시 따로 지망 분야가 있었는지 해서 말입니다.”

“아, 그게.”

서 대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그 문제로 팀장과 마주섰던 탓이다. 현진의 지망 분야와 그에 대한 담당 문제로 팀장에게 이야기를 건넸다가 팀장의 화를 돋우는 바람에 결론을 제대로 맺지 못했던 상황.

“팀장님?”

서 대리의 시선을 눈치 챈 단유가 팀장에게로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그게, 일단 원칙적으로는 통합 클래스를 구성해서 넣어야 하는데 현재 저희가 프로젝트 문제로 따로 클래스 편성을 못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때문이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클래스를 구성하려면 거기에 맞는 커리큘럼을 짜야하고 커리큘럼을 진행할 강사진에 담당 매니저를 붙여야 한다. 그게 매뉴얼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꼬여 있는 상태다. 1기 연습생을 받아들인 이후, 본래는 타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과 추가로 뽑을 2기 연습생을 묶어 2기 통합 클래스를 구성할 계획이었는데, 위탁 연습생 선발이 무산되며 2기 연습생 모집 오디션도 연기되었다. 이후 적당한 날짜를 잡지 못하고 미루다가 1기 연습생의 데뷔과 프로젝트화되면서 또다시 보류된 2기 오디션으로 인해 통합반 클래스 자체가 사라진 상황이 되버렸다.

“그럼 지금 저희 회사에 있는 연습생이 1기 연습생들 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캐스팅 담당 직원들이 마냥 모니터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2기 오디션이 정해졌을 무렵, 전국 아카데미에 연락을 넣고 때로는 직접 찾아가 괜찮은 인재가 있는지 물색하기도 했었다. 직접 명함을 건네며 오디션 참석을 약속한 이도 있었고, 권유만 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오디션이 보류되면서 이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실 돈이었다. 오디션 한 번을 개최하는 데도 소요되는 경비가 있지만, 오디션 이후 연습생을 뽑아도 문젠 돈이었다. 앞서 설명된 바와 같이 새로운 커리큘럼과 강사진 구성,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데, 현재 신인개발팀에는 돈이 없었다.

‘아니, 회사에 돈이 없는 거지.’

단유의 재산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무한대로 늘어난들 회사에 무작정 투입할 수도 없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지만, 단유의 개인 재산도 한정적인데다가 회사 지분이라는게 있어 투자자라고 마음대로 돈을 쏟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계약서 상에 명기된 문제라 새로 계약서를 고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는 택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택윤 역시 더 이상의 투입은 좋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지금이야 회사가 안정세에 올랐지만, 마냥 퍼주기만 하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는 택윤의 설명에 단유는 수긍해야 했다.

초기 설립 시 필요한 투자금액 정도는 단유가 부담할 수 있었으나, 불과 2년 사이 회사의 덩치는 처음에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회사 자체의 가치가 올랐다는 말이 아니라, 구성원이 늘면서 들어가는 돈의 양이 달라진 것이다. 여기에 맞춰 투자를 하려면 단유도 전 재산을 쏟아붓는 수준이어야 겨우 될까 말까다. 2년간 부분자본잠식 상태에 있다가 겨우 벗어나는 이 와중에 단유가 더 투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택윤의 조언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상황이 좋아지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지만, 여전히 회사는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당장 수입을 늘리기 위해 영입한 스타들을 지원하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이 요구되고 그 인원들을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상황. 돈을 벌면 버는 대로 다시 투자로 돌려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 새 연습생을 뽑아 새 클래스를 돌린다는 게 쉽지 않다, 는 게 바로 팀장의 이야기였다.

사실 다른 회사의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기획사에서 중요한 것은 인재다. 많은 스타를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고, 급이 높은 스타를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자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기 위해서는 연습생들을 스타로 만드는 것이 제일이다. 그래서 어떤 회사들은 정말 저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연습생들을 뽑기도 한다.

그리고 보통 그런 회사들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형기획사를 제외하면, 보통 중견 이하의 기획사들은 자금력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때문에 연습생들에게 소요되는 경비를 차후 그들의 데뷔 이후 정산과정에서 돌려받는 식으로 운영되곤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연습생들이 받는 금전적 피해는 감수되어야 하고.

또한 그런 회사들에서는 D&D엔터에서 하는 방식의 클래스 운영이 없다. 사실 그쪽 회사들에서 볼 때 D&D 엔터의 연습생 교육 시스템은 방만하다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신생 기획사에서 가수와 배우 부문을 나눠 연습생들을 교육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거기다 자체 강사진―그것도 인건비가 평균을 뛰어넘는 수준의 강사진이다―을 두고 운영하기까지 하니 ‘돈을 물퍼듯 쓴다’고 흉볼 지경이다.

하지만 이는 쉬이 바뀌기 힘든 시스템이다. 왜냐하면 대표이사의 고집 때문이다. 없는 재능도 만들 수준의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연습생들을 스타로 만들자, 는게 회사 설립 초기 대표의 이상이었다.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성공만 하면 곧 선순환이 되어 더욱 회사를 크게 키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현재 2기 오디션은 물론 통합 클래스 구성이 어려운 때, 현진이라는 신입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임시로 지망 클래스에 넣고 교육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지망 클래스가 어딥니까?”

팀장은 공손히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답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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