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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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 했다며?”
“응?”
“우리 이사님이 단독 오디션으로 인재 한 명 건졌다고 하던데?”
나윤은 생글생글 웃으며 단유의 팔을 가볍게 툭 때렸다.
“과장된 이야기네. 애초에 캐스팅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신인 개발팀 서 대리님이시고, 난 그냥 매뉴얼에 따라 오디션만 본 거니까.”
“그래? 근데 왜 다들 ‘역시 김 이사님’이란 말을 하고 있을까?”
“누가 그래?”
“다들.”
“···매니저한테 들었어?”
“창욱이가 운전하면서 그렇게 네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서 대리도 살리고, 신인 개발팀 위신도 세워주고, 연습생도 좋은 사람으로 뽑았다고.”
“와전됐네, 이야기가. 난 불합격 줬었는데.”
단유와 나윤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휴게실로 걸어갔다.
“들어보니까 전에도 그렇게 뽑은 사람 있었다며? 다들 별 생각 없었는데 네가 기회를 줘서 뽑았다던데?”
“그때도 별 뜻 없었어. 기회를 준 건 맞지만, 딱히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랬던 건 아니고.”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던데? 유독 예쁜 ‘여자’ 아이들의 재능만 쏙쏙 발견해내는 것도 능력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커피 마실래?”
“아니.”
“오렌지 주스는 좀 질리지 않니? 그렇게 매일 마시면?”
“커피는 안 질려?”
“커피가 그렇게 쉽게 질리는 맛은 아니잖아? 그리고 아침에 적당량의 카페인을 보충해주는 게 좋대.”
“누가 그래?”
“내가. 마실래?”
“그래.”
“내가 타줄게. 거기 앉아 있어.”
그저 버튼 한 번 누르면 알아서 커피가 컵에 채워지는 것일 뿐이지만, 나윤이 저리 생색을 내고 싶어하니 단유는 순순히 따랐다. 아침 출근길에 휴게실에 들르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기다리니 곧 휴게실 내에 커피향이 가득해진다. 잠시 기억을 더듬으니 사내 물품 구매 현황 중 수량으로 1위 품목이 커피였던 것이 떠올랐다. 인스턴트 커피와 원두의 소진률이 전체 1위라는 것은 사내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A4용지와 씨름하는 시간보다 휴게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전자 메일을 많이 활용하다보니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신선한 원두를 조달하기 위해 대량 구매보다 소량으로 자주 구매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대훈의 커피 사랑도 여기에 한몫하는 것 같고. 근래에는 일 없을 때 회사로 찾아와 커피를 마시는 소속 연예인들도 늘고 있었다. 어지간한 카페보다 낫다는 평인데, 아무튼 대훈의 사내 복지 정책 중 하나는 꽤 성공적이라 하겠다.
“자.”
“잘 마실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나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 오고 나니까 온도가 뚝 떨어졌어. 그렇지?”
“여름이 다 갔다는 증거지.”
“시간 정말 빠르다. 이 회사 처음 온 게 겨울이었는데, 벌써 여름이 끝나다니.”
“그동안 많이 바쁘셨으니까.”
“응. 덕분에 이번 겨울엔 굶지 않아도 되겠어.”
“굶은 적 있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사실 몇 해 전에는 정말 돈이 없어서 못 먹은 적이 있긴 했다.”
“정말?”
“수입이 아예 없진 않았는데, 월말에 여기저기 나갈 돈이 많다보니까 쓰기가 어렵더라고. 지방 스케줄이 하나 잡혀 있었는데, 거기 가면 보통 도시락이 제공되니까 그거 생각하면서 한끼 굶은 적은 있었지. 배가 정말 고팠지만 다이어트다 생각하고 참으면서 버티기도 했고.”
“어려웠겠구나.”
“원래 인기가 없으면 다 그래. 나는 그래도 빚은 안 지고 살았잖아? 그리고 진짜 정 급하면 이거 팔 생각도 했으니까.”
나윤이 슬쩍 목걸이를 들어보였다. 단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커피를 마셨다.
“왜 아무 말 안해?”
“무슨 말?”
“이거 팔아도 되는 거야?”
“누나 건데 누나 마음대로 하는 거지 뭐.”
“그런 거였어? 마음대로 팔아도 아무 상관 없는 거였어?”
“팔지 말란 법은 없잖아? 굶다가 죽는 것보다야 낫지.”
나윤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탁자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접근하니 단유는 슬쩍 몸을 뒤로 기울였다. 곁눈질로 살피니 휴게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왜 그래? 갑자기?”
“뭐가?”
“보는 사람도 많은데 바로 앉지 그래?”
“내가 이렇게 보는 게 부담스러워?”
“조금.”
나윤이 고개를 홱 돌려 자신들을 바라보는 직원들과 눈을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거리는 직원들에게,
“저, 이사님이랑 친해요. 알죠?”
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럼요. 예전에 같이 활동하셨으니까.”
단유가 곧바로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같이 활동한 건 아니에요. 전 그냥 우정 출연같은 거였으니까.”
“아, 네.”
단유는 다시 나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오해 일으킬 이야기 좀 하지 마.”
“오해는 무슨 오해? 딱히 틀린 말도 아닌데.”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단유야.”
“···응?”
나윤은 웃음을 지우고 나직이 말했다.
“적당히 해.”
“뭘?”
“지켜보는 사람, 가슴 떨리니까.”
흔들림없이 단유를 향하는 나윤의 검은 눈동자. 단유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응?”
나윤은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커피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좀 전보다 약해진 하얀 김이 턱 아래에서 흩어져 사라진다.
“무리하지 말라고.”
“무리 안해.”
새초롬한 표정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는 나윤.
“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네가 이 회사에서 하는 행동들은 모두 관찰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오죽하면 회사 밖으로 도는 내가 알 정도니. ···어느 곳에나 마찬가지지만 어느 한 사람이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걸 좋지 않게 보는 사람도 있다고. 네가 이 회사에 어떤 입지인지는 쭉 지켜봐서 대충은 알겠는데, 지금처럼 네가 두드러지는 활약을 하면서 튀어버리면 분명 널 견제하려고 벼르는 사람들이 생겨날거야.”
“누구?”
“너 때문에 불편해질 사람들.”
단유는 가만히 나윤을 지켜보다 나윤이 들고 있는 컵에 자신의 컵을 마주댔다. 마치 건배라도 하자는 것같은 단유의 행동에 나윤이 의아한 듯 바라보는데, 괜히 웃음이 나는 단유였다.
“고마워. 걱정해줘서.”
단유의 옅은 웃음을 찾아낸 나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괜한 걱정이었던거야?”
“아냐. 정말로 고마워. 덕분에 확실히 한 가지는 알 수 있겠네.”
“뭘?”
“누나 말처럼, 밖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알 정도라면 분명히 회사 내부에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거, 확인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맙다고.”
“괜찮은 거야?”
“응.”
“네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오케이, 그럼 여기까지.”
나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한동안 보기 힘들겠네.”
“해외 출장이지?”
“정말 내가 회사 하나는 계약 잘 했다 싶네. 덕분에 대만을 다 가보게 되고.”
나윤은 케이블 채널의 한 예능 프로에 고정을 맡게 되었는데 이번에 대만에서 2박 3일의 촬영이 잡혀 있었다.
“선물 갖고 싶은 거 있어?”
“선물은 무슨. 괜찮아.”
“그럼 내 마음대로 산다?”
“안 사도 돼.”
거절해도 들을 리 만무하다. 나윤은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듯 단유의 어깨를 툭툭 친 후 미련없이 돌아섰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윤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날 때는 바로 저 당당한 뒷모습이 아닐까, 단유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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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 이사네.”
A&R 팀을 이끄는 팀장 박희수는 장갑을 고쳐 끼고 가랑이 사이에 끼워뒀던 골프 클럽을 신중하게 움켜쥐었다.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진짜 실세는 김 이사인 게 분명하단 팀장님의 추측이 옳은 것도 같습니다.”
펑퍼짐한 엉덩이를 소파에 묻고 마주앉은 신인개발팀장을 바라보던 홍보팀장 윤기찬은 넥타이를 슬쩍 느슨하게 풀며 대꾸했다.
“어찌보면이 아니라 명실상부 실세임을 드러낸 거지. 대표 본인이 스스로 말한 거잖아. 김 이사의 말에 감명받았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사실 그의 지시를 듣고 있었노라고 고백한 셈인거야.”
“윤팀장 말이 맞아. 그동안은 그저 대인배인 마냥 김 이사와 친한 척이나 하며 어울렸던 거지만, 어제 무심코 자백한 거지. 자신이 바지라고.”
어드레스를 취한 희수는 부드럽게 스트록을 했다. 클럽 헤드에 부딪힌 골프공이 인조 잔디위를 달리다 홀컵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갔다.
“듣고보니 그렇습니다.”
신인개발팀장의 대답에 기찬은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공을 가져다 앞에 두고 다시 자세를 취하려는 희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팀장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클럽으로 빈 허공을 휘두르며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희수는 기찬을 보지도 않은채 되물었다.
“무슨 생각?”
“계획 말입니다.”
“어차피 김 이사는 못 막아. 제 1투자자잖아? 무슨 생각으로 대표 자리 마다하고 재무 이사라는 직함달고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동태로봐선 슬슬 움직일 듯 하니까 계속 동태를 주시하는 정도가 최선이야. 만약 김 이사가 정체를 완전히 공개하고 대표 자리로 오른다해도 그건 우리가 못 막지.”
“그럼 주관사 선정도 저희 손에서 어떻게 못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니지. 주관사 선정을 어디 대표 마음대로 하나?”
손을 살짝 들어 기찬의 입을 막은 희수는 신중하게 클럽을 휘둘렀다. 힘을 받은 공이 데구르르 굴러가더니 이번에도 홀컵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간다. 박수칠 준비를 하던 신인 개발팀장이 슬며시 손을 무릎 사이로 감춘다.
“일단 계획은 그대로 진행해야지. 그러려면 우선 박팀장이 좀 힘을 받아야 할 텐데 말이야.”
지목받은 신인개발팀장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프로젝트를 길게 끄는 동안 박팀장이 제대로 성과를 내야지 않겠어? 지금 이대로면 실망할지도 몰라.”
신인개발팀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대로 해내겠습니다!”
“물론 잘해줘야지. 이렇게 푸시를 해주는데도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질질 끌려만 다닐거면 팀장 자리 내놓아야지. 안 그래?”
“최선을 다하겠습···.”
“박팀장.”
“네? 네!”
“우리 그런 말 싫어하는 거 알잖아? 최선이 아니라 결과를 보이라고.”
그 사이 다시 자세를 취한 희수가 스트록을 하고, 톡 맞은 공이 거침없이 굴러가더니 이번에는 홀컵 안에 쏙 들어갔다. 기찬이 박수를 쳤다.
희수는 골프채를 옆에 세워두고 장갑을 벗자, 기찬이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맥주 하나를 집어 건넸다.
“지금 추세로 보면 내년 혹은 내후년엔 반드시 상장 이야기가 나오게 돼있어. 그때까지도 지금과 같은 자리면 아무것도 얻는 게 없을 거란 소리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나 혼자 잘되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다 같이 잘 되자고 하는 이야기잖아? 회사도 살고, 우리도 살고, 그래야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지. 오케이?”
“그렇습니다.”
희수는 웃으며 맥주캔을 죽 내밀었다. 기찬이 눈치빠르게 맥주를 집어 들어올렸다.
“건배!”
뒤이어 신인개발팀장도 맥주를 집어들었다.
“건배!”
어느 스크린골프장의 한 룸에서 소소하게 벌어지는 출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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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길거리 캐스팅이 되가지고요.”
“캐스팅?”
“네.”
“그게 뭐니?”
현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연예인 기획사 같은 데서 사람을 뽑는 거예요.”
“연예인? 연예인 될라고?”
할머니의 되물음에 현진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일단 합격은 했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기획사에서 저보고 재능이 있으니까 계약을 하자는 거예요. 그렇다고 바로 연예인 되는 건 아니고요, 일단 연습을 해야 돼요. 연습해서 충분히 실력이 되면 그때 데뷔해서 연예인이 되는 거예요.”
“왜? 공부는 안 하려고?”
“공부도 할 거예요. 할 건데, 연예인도 좋은 직업이잖아요?”
“할미는 잘 모르겠네. 그냥 공부해서 대학가는 게 더 좋지 않나?”
“그것도 맞는데요, 할머니. 연예인되면 돈 많이 벌 수 있어요. 어쩌면 대학가는 거 보다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안 힘들겠어? 우리 현진이 힘든 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
현진은 할머니를 꼭 안았다.
“안 힘들거예요, 할머니. 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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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서 대리가 일부러 이사실까지 찾아와 보고했다. 서 대리는 다행히도 잘리진 않았다. 대신 이번 캐스팅 건에 대한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과거 캐스팅 담당들이 캐스팅 건마다 월급을 상회하는 인센티브를 받았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대신 인센티브를 적게 받거나 혹은 아예 받지 않는 추세였다.
D&D 엔터는 인센티브를 적게 주는 쪽이었기에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도 생활에 크게 지장이 가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꽤 마음 상하는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서 대리는 그 점에 대해서는 감수하겠다는 입장이었고 대신 현진에 한해서는 자신이 계속 케어를 해주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