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22화 (922/956)

진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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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부스 안에 들어간 현진이 신기해하며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 서 대리가 음료수를 들고 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무실에 들릴 일이 있어서···. 그런데 쟤는 왜 저기?”

“노래 한번 불러 보라고 시켰어요.”

“아, 네. 그런데 괜찮습니까?”

“뭐가요?”

“저 애 말입니다. 이사님이 보시기에 괜찮은지 해서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그렇죠, 네.”

단유는 마이크 스위치를 켜고 부스 안으로 말을 걸었다.

“잘 들려요?”

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 아무거나 불러봐요.”

“반주 없어요?”

“없어요. 못 불러요?”

“어, 그냥 아무거나 부르면 되나요?”

“부르고 싶은 거로 불러요.”

잠시 후, 스위치에서 손을 뗀 단유는 팔짱을 끼고 현진을 바라보았다. 테크닉 없는 미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

“수고하셨습니다.”

단유는 현진을 밖으로 불러냈다. 현진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나와 다시 좀 전에 앉았었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목소리는 좋네요.”

“정말요?”

“네.”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친구들이랑 노래방 같은 데 가본 적 없어요?”

“네.”

“한 번도?”

“몇 번 있기는 한데, 노래는 안 불렀어요.”

“왜요?”

“노래를 잘 못 부르니까요.”

“확실히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어요.”

“······.”

단유는 펜으로 서류에 ‘가창력 훈련’이라고 기입했다.

“춤도 춰볼래요?”

“아니요. 춤은 정말로 춰 본적이 없어서.”

“그래요?”

안무란에 ‘X’자를 기입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혹시 연기 할 수 있어요?”

“연기도 해요?”

“할 수 있으면 하고, 하지 못하면 안 해도 돼요.”

“저기 근데요.”

“네.”

“이거 진짜 오디션 맞아요?”

“네.”

현진은 서 대리를 힐끔 보고 다시 단유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이런 식으로 오디션 하는 거예요? 원래?”

단유가 서 대리를 돌아보자, 서 대리도 난감하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서 대리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저희 회사 오디션은 대표님과 그 밑에 개발 팀장님, 트레이너 분들이 동석해서 오디션을 보세요. 그래야 오디션을 보러 오신 분들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마침 오늘은 저희 회사 월말 평가가 있는 날이고, 앞서 말씀하신 분들이 모두 거기에 참석하셔야만 했죠.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진행하자면, 오늘의 오디션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서 대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 추측컨대 오늘 이 오디션이 끝나면, 서 대리님은 그만두셔야 할 거예요. 여기.”

“네?”

현진이 놀란 얼굴로 서 대리를 바라보았다. 서 대리 또한 놀란 낯빛으로 단유를 바라보는데, 단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과연 서 대리님께서 그토록 흥분하시면 장담한 인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호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만약 오늘 이 자리에 오신, 현진 씨가 서 대리가 자신의 자리를 걸고 이 오디션을 강행시켜야 했을 만큼 대단한 인재인지를 확인하는 거죠. 그리고 그 확인이 된다면, 서 대리님은 자리를 떠나는 대신 작지 않은 징계를 먹는 수준에서 일이 마무리될 테고요.”

“저 때문에 이 분이 잘린다고요?”

“제가 자르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렇게 될 공산이 큽니다.”

“그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회사는 누구 혼자의 힘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다양한 매뉴얼에 따라 돌아가는 시스템이에요. 만약 누군가가 그 시스템을 선의로라도 깨뜨리려 한다면 마땅히 그에 대한 처벌이 가해집니다. 왜냐하면 매뉴얼은 일종의 약속이거든요. 우리 모두가 이 매뉴얼을 지키자. 그래야 이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라는 믿음을 매뉴얼로 만든거거든요. 서 대리님은 자신의 실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회사에 현진 씨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을 저희에게 증명하려고 하셨어요. 저희는 그 증명을 돕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설령 선의에 의한 것이더라도 절차와 매뉴얼을 어긴 것이라면 당연히 징계가 따르겠죠?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다만 징계 수위는 현진 씨에 달려 있다는 뜻이죠. 서 대리가 자신의 자리를 각오하고 무리하게 이 자리를 만든 까닭이 과연 합당했다고 판단된다면 그에 대한 징계 수위는 크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을 겁니다.”

“그런 말 안했잖아요?”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설령 한다고 해서 달라지나요? 현진 씨가?”

“···저 갈래요.”

“그러세요.”

“······.”

단유는 담담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현진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요?”

“그럼 애초에 이런 오디션 안 하면 되는 거잖아요? 이게 잘못된 오디션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이 자리는 현진 씨를 위한 자리이면서 동시에 서 대리님을 위한 자리입니다. 서 대리님의 개인적 사정까지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세히 밝히지는 못하지만, 서 대리님도 그 정도 각오는 하고 계실 겁니다. 그만큼 현진 씨를 믿는다는 뜻이겠죠.”

“저 어제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뭘 믿고?”

단유가 서 대리를 바라보며 대신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서 대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처음부터 캐스팅 담당을 목표로 하고 이 엔터계에 발을 들였어요. 제 꿈은 제가 발굴한 인재를 키워 스타로 만드는 것이었고요. 때문에 많은 공부를 했어요. 어떤 사람이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아무나 캐스팅하는 건 아니에요. 저희도 나름 이런 사람이 스타가 될 소지가 있겠구나, 라는 걸 공부하고 분석해요. 어제 현진이, 너랑도 잠깐이지만 이야기하면서 믿을 수 있었어. 넌 분명히 스타가 될 기질이 있다고.”

“근거가 너무 빈약하잖아요?”

“근거는 충분하네요.”

단유가 대신 답했다. 현진이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추측해보면, 일단 비쥬얼적인 면에서 현진 씨의 외모는 꽤 준수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꽤 비율이 좋은 이목구비에다가 요즘 연예계에서 트렌디라고 할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요. 말하는 목소리와 노래하는 목소리는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슷하니까 대충 노래를 부르면 어떤 성향일까를 추측해볼 수 있죠. 그게 아니더라도 현진 씨의 중저음 섞인 미성은 꽤 좋은 점수를 줄 만 했을 겁니다. 지금 확인한 바로는 비록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상태라 그리 썩 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보통 이상의 음역대에서 음정이 불안하다는 느낌이 없으니까 훈련만 제대로 받으면 노래도 곧잘 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단유는 자신이 써놓은 내용을 톡톡 집으며 설명했다.

“가수든 연기자든, 어쨌든 방송에서 말을 하게 될 텐데, 현진 씨의 개성적인 보이스톤과 화법은 꽤 매력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겁니다. 짧은 시간 판단한 제가 보기에도 말이죠. 그러니 이 정도만으로도 서 대리님으로서는 현진 씨를 캐스팅해도 될 것이란 판단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겁니다.”

현진이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덧붙여, 아직 15살인데 지금 신장이 대충 166 정도? 소위 화면발이 잘 받는다고 하죠? 비율이 좋으니까 카메라 감독님들이 좋아하실지도 몰라요. 괜찮은 피사체를 화면에 담아내는 건 기분 좋은 일일 테니까.”

폭풍같은 칭찬세례에 현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근거로 서 대리님은 현진 씨를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거지만, 현진 씨의 가치관까지는 꿰뚫어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처음에 저도 걱정을 했던 게, 보통의 각오로는 연예계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는 거였는데,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네요.”

단유의 말이 끝나자 서 대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더 듣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 없었다. 물론 현진도 그 의미를 곧 알아차렸다.

“저 떨어진 거예요?”

“글쎄요.”

“떨어진 거 아니에요?”

“아직은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왜요?”

“저희 원칙이 그래요. 오디션이 끝난 후에 지금 제가 작성한 서류들을 면밀히 분석한 후에 결과를 내리는 거거든요. 비록 지금 오디션을 보는 사람은 저 뿐이지만, 저 혼자 결론을 내리면 안 되니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는 겁니다.”

“어차피 아저씨, 그러니까 이사님은 저 불합격 주실 거 아니에요?”

“모르는 일이죠. 아직은. 오디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진 씨가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그 순간 오디션이 끝나고, 그때 현진 씨에 대한 결론을 내릴 예정입니다.”

현진은 고개를 숙이고 고민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정리가 되질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오디션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룰과 맞닥뜨릴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학교와 집, 어디에서도 이런 룰과 마주한 적이 없던 현진이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조심스럽게 여겨지는 룰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왜 자신 때문에 애꿎은 아저씨가 회사에서 잘려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누가 그런 각오를 하랬냐며 책임을 피하고도 싶었지만, 동시에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다른 모습, 재능을 알아봐주고 믿음을 준다는 아저씨의 신뢰를 깨고 싶지 않았다.

****

달칵, 문고리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대훈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끝났어요?”

단유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대훈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에 끝났습니다. 대표님은요?”

“우리는 아직. 애들이 워낙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대충대충 할 수가 있나. 그래도 시간이 너무 길어지니까 잠깐 쉬자고 하고 나왔죠. 어땠어요, 오디션은?”

단유는 작성한 서류를 대훈에게 넘겼다. 대훈은 평가지를 보며 눈을 좁히더니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분명 오디션 때 사용하려고 만든 회사 내부용 평가지인데, 이제껏 본 중에 가장 여백없이 빽빽하게 쓰여진 평가지였다.

“뭡니까, 이게?”

단유는 오디션을 보며 기록한 것이라고 짧게 답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게 세밀하게 쓴 사람은 없었어요.”

“저 혼자 본 거니까, 다른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보통은 비쥬얼은 10점 만점에 몇 점, 정도로만 기입하면 될 공란에 마치 성형외과 상담 기록지라고 생각해도 될만한 자세한 서술과 감상이 길고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밖에도 다양한 항목들에 대해 간단한 점수나 감상 대신 논문 수준의 길고 디테일한 설명과 묘사가 들어가 있어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프로의식과 향상심은 없으나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딱히 연예인이 되고 싶다거나, 혹은 선망하는 직업은 없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자신의 진로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죠.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열등감이나 불안감으로 초조해하는 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훈은 눈이 침침해진다며 평가지를 도로 단유에게 건넸다.

“그래서 결론은 뭔가요?”

“결론은···.”

단유는 대답하기 직전, 잠시 조금 전 끝난 오디션을 떠올렸다.

****

“저 다시 할게요.”

“뭘요?”

“오디션이요. 처음부터 다시. 안 돼요?”

처음 들어올 때와 달라진 눈빛. 구태여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괜찮아요.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다시 고쳐 앉아 자세를 바로한 현진이 단유를 보며 말했다.

“솔직히, 아직도 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연예인이 되고 싶은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대충 오디션을 보려고 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죄송합니다. 되든 안 되든 최선을 다해야 했어요. 뭐부터 해야 하죠?”

“카메라 테스트부터 다시 할까요?”

단유는 서 대리에게 카메라를 다시 잡도록 일렀다.

****

“불합격입니다.”

단유가 담담하게 답했다.

“불합격인가요?”

대훈이 되묻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개인적인 기준에서는요. 하지만 역시 합격여부를 단독으로 판단해선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이 필요해요. 전 아직 이쪽으로 감이 없으니까.”

단유는 카메라에 저장된 영상을 재생시키고 화면을 대훈에게 보여주었다.

“주현진, 15살. 서재진 대리 캐스팅입니다.”

곧 화면에서 자세를 고쳐앉은 현진이 굳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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