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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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가 듬성듬성 난 덜컹거리는 버스는 빗속을 헤치며 달리는 중이었다. 사람은 몇 없지만 비 오는 날 특유의 꿉꿉한 냄새 때문에 소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모처럼의 휴일이다. 친구의 생일이란 핑계로 학원도 빠질 수 있었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비만 내리지 않았다면.
원래 비 오는 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녀였다. 괜히 울적해져서 비 오는 창밖을 보면 눈물이 나, 라고 말하는 친구의 소녀적 감수성을 무시할 마음은 없다. 단지 비 오는 날에는 신발과 양말이 젖고 흙탕물이 다리에 튀어 찝찝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싫을 뿐이다. 옷이 젖는 것도 싫었고, 반곱슬인 머리가 부스스 해져버리는 것도 싫었다.
‘이런 날엔 그냥 집에 있는 게 최곤데.’
그럼에도 소녀는 버스의 젖은 바닥으로부터 풍겨나는 물 비린내와 쉰 냄새에 괴로워하며 이동 중이다.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도 아니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우연히 만난 기획사 직원이라는 사람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깟 거 그냥 무시해.”
친구의 가벼운 조언에 마음이 혹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소녀는 차마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일단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소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은 약속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왜 그 약속을 했느냐에 대한 고민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기획사 직원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못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저 평범한 수준의 외모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외모에 대한 찬사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는 정도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또 하나, 소녀는 한 번도 연예계가 꿈인 적이 없었다. 앞선 고민의 연장선이지만, 스스로의 외모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연예계란 곳은 소녀의 인생에서 한 번도 고려된 적이 없던 분야였다. 보통 연예인이라 하면 대부분 예쁘고 잘생긴데다가 뭔가 특출난 재능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니 그 사내가 소녀를 붙잡고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라고 말을 건넸을 때, 단호히 뿌리쳐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왜인지 경계심이 그리 높지 않았고, 말로만 듣던 길캐를 자신이 당한다는 게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이라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다.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사내의 외관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기도 했거니와, 그가 명함을 건네며,
“저희 회사 알아요?”
라고 했을 때 하필이면 그 회사를 들어본 기억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 시은이 있는 회사 아니에요?”
“맞아요. 아시네요? 시은이 팬이에요?”
그렇진 않았다. 소녀는 시은의 유명한 노래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딱히 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소녀의 짝이자 다음 날이 생일인 친구가 시은의 광팬이었다. 그래서 시은의 쇼케이스 취소 사건에 대해 여러 번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 속에 여러 차례 언급되었던 회사가 바로 ‘D&D 엔터테인먼트’였었다.
소녀는 사내와 가까운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 길게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으나, 사춘기 소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잠시만요.”
그래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고 만나기로 했던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친구는 한층 높아진 톤으로 요구했다.
―꼭 오디션 봐봐. 그런데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왜?”
―시은 언니 직접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친구는 생일 선물로 소녀의 오디션을 부탁했다. 그게 선물이 되냐 했더니, 자기는 그걸로 만족한다고 대신 같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괜찮아요. 내일 같이 와도 돼요.”
직원은 흔쾌히 허락했고, 소녀는 다음 날,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동중이다.
생각에 잠긴 틈에 승객을 태우기 위해 정류장에 멈춘 버스.
“현진아?”
우산을 접으며 버스에 오른 친구가 소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친구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현진은 혀를 찼다.
“누가 보면 네가 오디션 보는 줄 알겠어?”
“나는 그렇다치고, 넌 뭐니? 옷 좀 제대로 입고 오지 그랬어? 그러다 오디션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면 충분하다 생각하는 현진의 눈에는 오히려 하얀 블라우스와 핑크색 스커트를 입고 하얀 가죽 가방을 뒤로 맨 친구가 오버라는 생각이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지. 뭐가 대수라고.”
“이랬는데 붙으면 대박이겠다.”
현진의 앞에 앉은 친구는 쉴새없이 재잘거렸고 덕분에 현진은 지루하지 않게 회사까지 올 수 있었다.
“회사 멋있다!”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친구가 작은 목소리로 감탄하는 말에 현진 역시 동의했다. 인테리어도 나쁘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건물 밖에서 나던 비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듯해서 좋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로비 카운터에 있던 예쁜 외모의 직원이 두 소녀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얘가 오늘 여기서 오디션 본다고 해서요.”
“그쪽은요?”
“어, 저기 그냥 따라왔는데, 따라와도 된다고 하던데요?”
직원은 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어떤 분과 약속을 했는지 아세요?”
그때 현진은 진심으로 그 사내가 사기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강하게 가졌다. 반듯한 인상의 사내가 사실은 여기 회사 소속이 아니라는 말을 기대하며 현진은 어제 건네받은 명함을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잠시만요, 라고 짧게 답하고 명함을 받아든 직원은 인터폰을 조작해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1분도 되지 않아 ‘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라고 친절하게 응대했다. 일단 그 사내가 여기 회사 직원임은 맞는듯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어제 보았던 직원이 직접 나와 현진을 맞이 했다.
“어떡하지? 오늘은 시은이가 스케줄이 있어서 보기 힘들 거 같네?”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괜찮아요’라고 답하는 친구와 현진을 데리고 휴게실, 이라 부르는 카페테리아로 데리고 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원래는 우리 신인팀 팀장님이랑 실장님들이 보셔야 하는데, 오늘 우리 회사 연습생들 월말 평가날이라 시간을 빼기가 좀 어려워.”
“어? 그럼 오늘 오디션 못 보는 거예요?”
친구가 현진을 대신해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대신 다른 분이 오디션을 봐주실 거야.”
“다른 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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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출근한 단유는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창가에 서서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리드미컬한 음률을 만들어내는 유희를 즐기던 중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희란 무엇일까?’
현대에는 노동을 아리스트텔레스적인 사고로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비판한 바와 같이 ‘노동의 신성함’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룰 때 가장 보기 좋은 법이다. 적절한 노동과 적절한 유희가 어우러질 때 인간은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회사에 지내며 여러 사람들을 보다보면 가끔 그 유희란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이는 타인의 유희를 위해 하루 10시간 이상, 수 년을 연습생으로 지낸다. 어떤 이는 타인의 유희를 위해 적게는 수 일, 많게는 수 년을 창작의 고통 속에서 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의 노고를 곁에서 보다보면 완성된 음악을 온전히 유희적으로 즐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예로 명수의 경우가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흘린 땀의 양을 사람들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공개된 것은 마치 창밖의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정도 뿐이다. 얼마나 많은 비구름이 머리 위에 떠 있고,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려 바닥을 적셨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그렇기에 더 즐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명수를 비롯한 축구 선수들이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근육이 터질 정도로 훈련을 하고 때로는 정말로 근육이 파괴되는 고통을 수시로 느껴가며 축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매순간 확인하고 관찰하게 된다면, 이후로는 축구를 즐겁게 보는 게 어려워질 수 있다. 90분간 숨이 턱 끝에 차도록 뛰고도 경기에 졌을 때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와 좌절을 곁에서 생생하게 관찰하게 된다면 더 이상 축구는 유희적 관람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요컨대, 불편한 진실은 적당히 가려진 채여야 편안하게 유희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수십여 갑의 담배와 수북한 재떨이, 수백 잔의 알콜, 수천 시간의 스트레스와 불면증이 만들어낸 악곡 위에 그와 동일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땀흘린 가수의 노동, 그리고 이를 돕는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겪는 고된 일상이 음악을 즐기는 내내 연상되어야 한다면, 과연 그 음악이 유희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괜히 스포트라이트가 밝은 게 아니다. 관객과 대중은 스포트라이트의 밝음에 집중하여 그 주변의 어둠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전히 유희로서 즐기게끔 하려는 목적이다.
왜? 그래야 돈이 되니까. 그러니 누군가의 유희는 누군가의 노동이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단유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신인개발팀의 서대리였다.
“저, 오늘 오디션 보기로 한 학생 왔는데요?”
“아, 네. 가겠습니다.”
단유는 옷을 고쳐입고 돌아섰다. 어제 언뜻 들은 바에 따르면 상대는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먼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과연 스포트라이트 속에 자신을 감출 준비가 된 사람인지 확인해야 했다. 각오가 서지 않은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쪽으로 발을 들이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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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 하나는 월말 평가를 진행하기 위해 사용중이고, 다른 하나는 월평을 준비하는 연습생들의 대기실로 사용중이었다. 때문에 남는 연습실이 없는 관계로 서 대리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부탁드립니다.”
서 대리가 찾은 곳은 스튜디오였다. 부스 바깥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카메라 하나를 두고 나란히 서서 간단하게 오디션을 볼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스튜디오의 사용을 위해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다행히 작곡팀으로부터 1시간 정도 사용을 허락받았다.
“오디션 후 반드시 원상복구 시켜놓겠습니다. 청소도 깨끗이 하고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이사님께서 직접 오디션보신다는데 당연히 자리를 양보해드려야죠.”
그리하여 서 대리는 이른 아침부터 출근해서 스튜디오를 들락날락거리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사실 딱히 거창한 준비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카메라 한 대와 모니터링용 TV를 가져다 설치하는 게 다였고, 대신 넓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내부의 탁자와 소파 등을 임시 공간으로 옮기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을 뿐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면 돼. 편하게. 오케이?”
서 대리는 그렇게 현진을 다독거렸다. 현진은 두꺼운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처음에는 별로 긴장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오디션을 시작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개를 돌려 친구를 바라보았다. 오디션이 진행되는 동안 복도에 있는 의자에서 대기할 예정인 친구가 두 주먹을 앙증맞게 쥐고 소리없이 파이팅, 을 외쳤다.
다시 문으로 시선을 돌린 현진. 단순한 느낌이지만, 어쩐지 이 문을 열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현진은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었다. 생각보다 문이 무겁다는 생각을 하며 밀었더니 안에는 예상 외의 인물이 바른 자세로 앉아 현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저 사람이 이사님?’ 이란 생각이었다. 엄마가 자주 보는 드라마에서 종종 주연 혹은 서브주연 정도로 출연하는 잘생긴 ‘이사님’을 실제로 만난 기분이었다. 드라마는 현실을 과장한다더니, 현실 그대로이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거기 의자에 앉으실래요?”
단유는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맞은 편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