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19화 (919/956)

진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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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테리어 컨셉은 아마도 미니멀리즘이 아니었을까 싶다. 단유가 업무를 보는 이사실이나 재무팀 사무실과는 다르게 신인개발팀의 사무실은 벽과 천장이 모두 하얀색이고 액자나 기타 인테리어용 소품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초에 사무실 내로 사무용 집기와 비품들이 들어왔을 때는 너무 단촐해서 되려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신인개발팀 사무실에서 삭막함은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고 따뜻한 분위기란 것도 아니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사무실의 분위기를 설명하자면, 그냥 지저분하다. 벽에 걸린 여러 개의 화이트보드들은 심미적인 포인트를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실용성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화이트 보드의 크기는 모두 제각각이고 이것들을 걸기 위해 벽에 박은 못들도 모두 높이가 제각각이다. 휘갈겨 쓴 글씨들과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 마치 다잉메시지를 연상케 하는 자국들이 곳곳에 남아 있고, 중요포인트라고 별표라도 해놓은 모양인데 정작 중요한 별표 다음에 적힌 내용은 낙서인지 기호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사무실 가운데에 팀 회의를 위해 둔 작은 탁자가 있는데, 그 위에는 종이컵과 서류들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다. 누구라도 치우면 좋으려만 사무실 책상들의 주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책상 앞에 놓인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이해 못 할 부분은 아니다. 원래 신인개발팀이 회사 내에서도 가장 바쁜 부서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웅녀 프로젝트 이후 가장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부서이기 때문이다.

대형 기획사의 경우, 팀이 아니라 본부로 지정하여 산하에 캐스팅팀과 트레이닝팀을 둔다거나 혹은 아예 다른 부서로 팀을 나누기도 한다지만, 인력이 많지 않은 중소기획사는 신인개발팀 내에 캐스팅, 트레이닝 담당 직원을 두는 정도로 운영하는 편이다. 담당 직원이라고 꼭 그 업무만 하는 것도 아니어서 가끔은 다른 담당 업무 직원이 지원할 때도 있다. 요컨대, 네 일 내 일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 심지어는 신인개발팀 직원이면서 A&R까지 겸직하는 경우도 있다.

D&D 엔터의 경우에도 비슷했다. 다만 줄곧 자랑한 바와 같이 뛰어난 안무가와 창작 집단을 보유하고 있기에 트레이닝 팀을 따로 독립부서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독립부서로 신인개발팀과 접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트레이닝 자체는 트레이닝 팀에서 맡을 지라도 커리큘럼 구성과 스케줄은 신인개발팀과 협의하에 진행했다.

사실 트레이닝 팀을 제외하더라도 신인개발팀의 일은 많았다. 캐스팅은 물론이고 신인 및 연습생 관리도 신인개발팀에서 도맡아 하기 때문에 늘 바쁘고 분주한 신인개발팀 사무실이다.

과거처럼,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캐스팅을 하려는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런 추세가 점점 줄어드는 편이다. 비용과 시간의 소모가 심하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아카데미 학원의 존재로 굳이 캐스팅을 위해 외근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 현대 기술 발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캐스팅 담당들은 하루의 많은 시간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보낸다. 그들은 다양한 SNS들과 커뮤니티 사이트, 동영상 사이트를 뒤지며 끼와 재능, 외모를 가진 이들을 찾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한다.

요약하자면, 신인개발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은 어수선하고 지저분하며 게으름의 표상이라도 되는 듯 엉망이라는 뜻이다. 더욱 문제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그것이 일상이라 그게 지저분한지 아닌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고, 때문에 단유는 되도록 신인개발팀 사무실 내로 발을 들이기를 꺼려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을 부하직원에게 떠넘기기가 익숙치 않은 단유는 결국 신인개발팀 사무실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단유는 진 실장에게 재만과 세훈의 평가가 기록된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잘 봤습니다.”

반나절 가량을 재만, 세훈과 함께 보냈던 단유는 다음 날 직접 진 실장을 찾아갔고, 진 실장은 이사님이 직접 걸음하셨다는 사실에 송구스럽다며 허리를 굽혔다.

“메시지 남기시면 제가 직접 받으러 갔을 텐데 말입니다.”

“이게 뭐라고 실장님을 오라가라 하겠어요.”

“진 실장은 서류를 받으며 연습생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연습실의 ‘미스테리’에 대해 언급했다.

“두 녀석 모두 갑자기 일취월장한 실력을 보여 다들 놀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번 일을 계기로 각오를 새로이 한 모양이지요.”

“이사님이 지켜보는 자리라는 생각에 더 노력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글쎄요. 제 생각엔 그 두 사람 모두 그만큼의 포텐셜을 가지고 있다가 이번 계기로 터뜨린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물론 그런 면도 없잖아 있겠지만, 전 어쩐지 이사님의 도움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냥 앉아만 있었는데 도움은요.”

“그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연습생들 연습도 참관해 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다른 연습생들도 실력이 급상승할지.”

진짜로 그렇게 믿는 건 아니지만, 결과도 좋거니와 그 결과에 대한 공을 이사에게로 돌리는 게 미덕이라고, 오랜 경력이 속삭였다. 아부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님은 알지만, 립서비스는 언제나 대화를 부드럽게 하는 장치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단유는 진 실장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다음 기회라 함은 단유가 마법을 사용해도 상대나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방법을 찾은 뒤가 될 것이다. 만약 단유가 볼 때마다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면 아무리 단순한 사람이라도 단유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진 실장도 더 이상은 요구하지 않았다. 상대는 보통의 상사가 아니라 사내 서열 순위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라는 점, 그럼에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여지를 남겨주었으니 더는 욕심이라 판단했다. 더구나 단유의 뒤에서 눈을 부라리는 개발팀장의 압박 때문에라도 더는 부탁하기 힘들었다.

그때 사무실로 들어오던 한 직원이 단유를 발견하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비록 이사지만 나이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고, 딱히 권위의식도 없는 단유였던지라 저런 식으로 높은 어른을 대하는 것처럼 인사를 건네면 부담스러웠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응대하고 돌아서려는데 진 실장이 아는 체를 했다.

“서 대리 일찍 들어왔네?”

서 대리라 불린 이는 어딘지 들뜬 모습이었는데 진 실장의 물음에 입꼬리를 늘리며 대답했다.

“오늘 대어를 잡은 것 같습니다.”

“대어?”

누가 들으면 회사 땡땡이치고 낚시라도 간 거 아니냐 오해할 법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서 대리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노력파인 캐스팅 담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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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말이야, 응? 회사에 출근해서 출근도장 찍고 바로 나가서 제주도 가서 캐스팅하고 오후에 다시 돌아와 퇴근도장을 찍었다, 이 말이야.”

어쩌다 개발팀 전체 회식을 할 때면, 그리고 술 한 두잔에 얼굴이 붉어지며 ‘나 취했소’ 하던 개발팀장은 종종 그렇게 과거를 미화하고 추억했다.

얼마되지 않는 월급을 받아야 했으나 대신 높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기에 하루를 빠듯하게 보내야만 했던 개발 팀장. 그에게 요즘 직원들의 하루는 하품 나올 정도로 지겹고 편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직원들이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동영상 사이트에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자기 PR용 영상들이 올라오는 판이다. 그것들을 뒤져 괜찮은 원석을 고르는 작업은, 중학교 교문 앞에 서서 하교 때까지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며―그러다 가끔은 신고받은 경찰이 출동해서 불심건문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괜찮은 원석을 찾겠다고 눈동자 굴리던 시절의 것보다 훨씬 발전되고 효율이 좋다. 그러니 컴퓨터 앞에 앉아 SNS 등을 뒤지느라 등이 굽는 직원들의 노고를 과소평가할 생각은 아니다. 단지 자기 때처럼 몸을 고되게 만들며 일하는 형태가 좀 더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팀장처럼 생각하는 직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요컨대 서 대리가 그랬다.

이제 막 20대 후반에 접어든 서 대리는, 현실 감각이 제로인 사람은 아니었다. 즉, 발품 팔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아카데미에 전화해서 괜찮은 학생들이 없는지 미리 전화해보거나 모니터와 핸드폰을 번갈아 사용하며 SNS를 뒤지는 게 좋은 지망생을 뽑을 수 있는 방법임을 모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업계에 뛰어들며 귀가 따갑도록 들은 전설같은 이야기들, 가령 가만히 서 있어도 등이 축축히 젖을 정도로 더운 여름, 구두 밑창이 끈적거리다 못해 떨어질 정도로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하여 캐스팅한 소녀가 지금은 대배우가 되어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로망을 품었다.

자신의 손으로 캐스팅한 이가 데뷔하고 스타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는데 작은 모니터만 들여다보는 건 마치 로또 번호를 맞추겠다고 지난 회차 당첨 번호들의 수학적 연관성을 찾는 것만큼이나 시시했다. 직접 움직여 자신의 눈으로 보고 필(feel)을 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입사 이후 지금까지 영업 사원 못지않게 외근을 나가는 중이었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개발 팀장은 그 노력이 가상해서 그의 외근을 허락해주었는데, 그랬던 그가 지금 헐레벌떡 뛰어와 ‘대어’를 낚았다고 좋아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리 있나.

“어떤 앤데?”

서 대리는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뭐?”

진 실장이 묻자 서 대리는 얼른 핸드폰을 조작해 사진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어떻습니까?”

“어떻긴 뭐가 어때? 이거가지고 뭘 알아?”

“딱 필이 오지 않습니까?”

“모르겠는데?”

“이게 사진으로만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직접 보면 말입니다, 뭔가 묘한 카리스마같은 게 느껴진다 이 말입니다. 지금 사진 상으로도 비율이 괜찮지 않습니까?”

작은 얼굴에 턱까지 내려오는 단발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역시 핸드폰 사진 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가수 쪽이야?”

“네. 실력은 테스트를 해봐야겠지만, 일단 외모는 합격 아닙니까?”

“오디션 볼 마음은 있대?”

“저랑 카페에서 30분 정도 이야기를 했는데 말입니다, 설득하느라 혼 났습니다. 그래도 오디션은 한 번 보겠다고 했습니다.”

“언제?”

“내일이라도 괜찮지 않습니까?”

“내일?”

진 실장의 고개가 엉망진창인 화이트보드를 향했다. 서 대리도 함께 고개를 돌렸고, 덩달아 단유도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옮겼다.

“내일 애들 월평하는 날이라고 적혔는데 안 보여?”

“아, 맞다. 깜박했습니다.”

“내일 팀장님도 같이 월평 심사 봐야 하는데, 누가 오디션을 보나?”

진 실장의 대답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 서 대리.

“안 되는데···.”

“왜?”

“그게 사실은, 얘가 시간 내기가 좀 빠듯한 모양입니다.”

이제 중3이라는 사진 속 여자 아이는 마침 오늘 친구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겨우 시간을 내서 거리로 나섰다가 서 대리와 마주쳤다고 한다. 평소에는 학원 때문에 그렇게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는데, 마침 내일은 토요일이기도 하고 친구 생일도 있어 부모에게 겨우 허락을 받아 학원을 빠질 수 있게 되었는데, 굳이 시간을 내자면 그때 뿐이고 그 외에는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뭐야, 그게. 오디션도 제대로 보기 힘들겠구만.”

“그래도 놓치기 아깝다는 감이 왔단 말입니다.”

“네 감을 믿기가 어려워서 말이지.”

지난 1년 간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서 대리의 실적을 언급하는 진 실장에게 ‘이번은 분명하다’며 강한 어조로 변명하는 서 대리.

“그래도 내일은 어렵지. 사람이 없잖아, 사람···이?”

무심코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던 진 실장의 눈빛이 변했다.

진 실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사내에 작은 풍파를 일으켰던 돌발 오디션을. 그리고 그 오디션, 이라고 해야 할지 면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 과정에서 현재 작곡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아라는 사람을 발굴해낸 당사자가 바로 단유임을 진 실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덩달아 서 대리도 단유에게 시선을 던지는데, 그 묘한 침묵 속에서 단유는 볼을 긁적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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