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6)
-------------- 918/952 --------------
한 시간여의 연습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연습에 매진한 세훈. 처음엔 그렇게 열심히 연습할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하다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숨을 헐떡이며 연습에 빠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뜻이다.
뒤에서 이사님이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란 이유도 있지만, 그가 갑자기 불타오른 건 옆에 있는 재만 때문이었다. 동갑인 재만에 대해서는 지난 1년간 함께 하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노래는 곧잘 하는 편이지만 음정이 불안한 면이 있고 고음을 내는 데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곧잘 받던 친구였다. 사실 노래보다 춤이 문제였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된 안무 수업을 받은 적이 없던 친구여서 안무 숙지나 동작 구현이 미숙했다. 나름 노력을 하는 듯 하지만, 춤이란 게 레슨 몇 번 받는다고 금방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는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전반적으로 재만은 자신감이 부족했다. 자존심은 강한데 그 자존심에 못 미치는 자신감이 그의 실력 성장을 방해했고, 그래서 데뷔조에 들지 못했다, 고 세훈은 나름 파악했다.
그랬던 녀석이다. 비록 몇 달 함께 하지 못했어도 그 실력이라는 게 갑자기 급성장할 리는 없으니 대충 그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반전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그저 멍청하게 음악만 듣고 있어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까지 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음악에 맞춰 안무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세훈은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갑자기 저렇게 출 수 있다고?’
새로운 재만의 발견이라고 해야 하나? 고작 몇 달이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이 저렇게 실력이 늘 수 있는가, 란 의문이 들었다.
그보다 애초에 그렇게 실력이 늘었다면 진작에 숙소에서 무슨 말이라도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데뷔조 연습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세훈이었던지라 숙소에 돌아올 때쯤이면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눕기 바빴기에 모를 수도 있다.
‘아냐,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이건!’
나름 춤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세훈이었는데, 지금 재만이 펼치는 안무는 쉽게 흠을 잡기 힘들 정도로 ‘완벽’했다. 베이스라인에 맞춰 웨이브를 펼치는 미세한 디테일까지 살리는 재만의 안무에 샘이 날 정도다.
‘도대체 지난 몇 달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데뷔조 탈락을 계기로 각성이라도 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비데뷔조에서 데뷔조로 발탁되는 경우를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비데뷔조에 속한 연습생이 데뷔조 연습생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면 회사 입장에서 멤버 교체를 진지하게 고려할 만하지 않은가. 노래도 되고 춤도 되는 멤버가 데뷔조로 ‘승격’을 하게 된다는 뜻은 곧 데뷔조에서 비데뷔조로 이동하는 멤버도 있다는 뜻이고, 자신이 그 멤버가 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는 말. 머리 끝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더는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 생각한 세훈이 이후 미친 듯 연습에 빠져든 건 당연한 순서다. 옆에서 연습하는 재만이 계속 신경 쓰인다. 곁눈질해보면 즐거운 듯 미소를 띠며 연습을 이어나가는 재만의 표정이 보인다. 즐거울 만하리라. 세훈 본인이라도 재만처럼 춤출 수 있다면 아무리 고된 연습도 즐거울 것만 같으니까.
이를 악물고 연습에 매진한 세훈. 평소보다 배로 힘을 준 탓인지 연습이 끝날 무렵이 되자 무릎이 괜히 후들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한 연습들 중에서는 가장 집중해서 연습에 매진한 시간이었고, 평소에 왜 이런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했던가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 연습이나 레슨 중에 이런 집중력을 계속 발휘한다면 실력이 부쩍 느는 걸 스스로 느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만이 그렇게 해 보인 것처럼 말이다.
이후로 세훈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단순히 비데뷔조로 교체될 것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결정권자인 트레이너와 매니저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만을 목표로 하여 노력했다.
결국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세훈은 무사히 데뷔조에 남아 마침내 데뷔 무대를 앞에 두게 되었다.
데뷔 전날,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트레이너로부터 수고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너무 긴장해서 몸이 굳지 않도록 주의해. 그렇다고 아예 긴장을 풀어서도 안 되겠지? 적당한 긴장은 실수를 방지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각자 푹 쉬고 마인드 컨트롤 하길 바란다.”
“네!”
데뷔조 연습생들의 우렁찬 대답이 연습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침내 데뷔 무대에 선 연습생들. 무대 아래서 서로의 손을 겹친 채로 파이팅을 외쳤다.
“오늘 우리가 최고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자!”
무대가 시작되기 전, 암전된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는 연습생들. 그 사이에 선 세훈은 가볍게 양 볼을 때리며 각오를 다졌다. 실수만 하지 말자고 되뇌며 자신의 포지션에 서서 무대의 시작을 준비했다. 오랜 꿈이 실현될 순간이었다.
음악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동시에 무대의 불이 켜졌다.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며 세훈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일까? 다음 안무가 생각나지 않았다. 손을 올리는 것이었던가? 오른발을 차고 뒤로 밀며 턴하는 동작이었던가? 그도 아니면 자신이 센터 포지션으로 이동하는 포메이션이었던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 함성이 멎고 노래도 멎었다. 어두운 관객석으로부터 시퍼런 눈빛들이 모두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듯하다.
‘사고다!’
결국 자신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주춤거리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세훈. 그런데 뒤가 허전한 기분이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자신을 제외한 모두 무대를 내려간 것인가? 자신만 이곳에 홀로 두고? 다시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저 어둡기만 한 그곳에는 빈좌석 뿐이다.
‘꿈이었으면!’
이 모든 상황이 꿈이길 바랐다. 자신이 사고를 친 것도, 자신을 두고 멤버들이 사라진 일도, 관객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무대에 남은 상황 모두가 꿈이길 바랐다.
“야, 뭐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툭 쳤다. 놀란 세훈이 돌아보니 이어 마이크를 찬 리더형이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형···?”
“정신 못 차리네. 야, 이제 우리 순서야. 정신 차려.”
“응?”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자신은 무대 아래에 서 있었고, 다른 멤버들이 손을 겹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냐, 진짜. 정신 차려, 김세훈.”
“네, 네.”
엉겁결에 겹쳐진 손 위로 손을 올리자, 리더형은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우리가 최고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자!”
다시 무대에 올랐다. 다시, 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세훈에게는 두 번째 무대였다. 아직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이제 곧 무대가 시작될 이야기란 것이고, 이는 곧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기 전이란 뜻이었다.
암전된 무대 위, 정해진 포지션에 선 세훈이 무대를 둘러보았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백 디스플레이와 여러 무대 장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대 가장 앞에는 가사가 스크롤되는 모니터가 놓여 있고 그 뒤로 여러 대의 스탠드 카메라, 그리고 공중에는 지미집 카메라가 준비되어있는 게 보였다. 아까(?)와 다르게 무대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긴장이 다소 풀린 모양이라, 스스로 조심만 하면 아까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숨을 고르며 무대를 준비하는 중, 음악과 함께 무대 위로 조명이 쏘아내렸다. 다양한 컬러의 조명이 위, 아래, 옆에서 쏘아지고 동시에 전면에서―매니저와 실장님이 줄곧 강조하던―붉은 시그널 램프가 점등되었다.
동료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한 세훈. 수 달에 걸쳐 준비한 데뷔무대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다는 욕심마저 머리에서 지워내고 오로지 음악에 맞추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무대는 끝나 있었고, 세훈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성공인가?
그런데 관객석에서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 무대가 끝나면 예의상이라도 소리를 질러주지 않나? 다시 무대가 암전되고 동료들이 말없이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세훈의 가슴 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번에는 뭐가 잘못된 거지?’
알 수가 없는데, 이유는 본인의 무대를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실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니 평가도 할 수 없다. 단지 환호 없는 퇴장이 이토록 슬프고 절망적임을 깨닫는다. 이런 무대를 위해 지난 시간 그렇게 노력했던 것이 아닌데.
“야, 뭐해?”
울고 있었던가? 눈물을 닦던 중 세훈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리더형이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울어?”
“네? 아니요.”
“이제 곧 무대에 오를 건데 울면 어떡해? 여기요, 세훈이 메이크업 고쳐야 할 것 같은데요?”
코디가 다가와 세훈의 메이크업을 고쳐주는 와중에도 세훈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방금 무대를 마치고 내려왔는데, 또 무슨 무대? 자신이 몰랐던 스케줄이 있었던가?
“데뷔무대 끝나고 우는 애는 봤어도, 시작하기 전에 우는 애는 네가 처음이다.”
코디의 말에 세훈은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너무도 익숙하게 다시 암전된 무대 위로 오르게 된 세훈. 똑같은 상황, 똑같은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진다.
혼란은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연속 재생을 버튼을 누른 것 마냥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무대가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점점 무대 주변의 상황들은 물론이고, 무대 위 동료들의 움직임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에 맞추고 무엇을 커버해야 하는지가 반복학습을 통해 몸에 익는다.
다시 암전이 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세훈,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반복될 상황을 준비하는데, 예의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가 세훈을 불렀다.
“야, 뭐해?”
세훈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리더형 대신 재만이 서 있었다.
“어? 네가 왜 거기 있어?”
“···무슨 개소리야?”
재만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무대는 온데간데 없고 오래도록 사용했던 연습실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연습실이라니?
재만이 박수를 쳤다.
“알았다!”
세훈이 동그래진 눈으로 재만을 바라보자 재만이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너 꿈꿨지?”
“꿈?”
“내가 아까 그랬다니까. 눈뜨고 꿈꾼 기분. 너도 그렇지?”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던 와중에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단유였다.
“괜찮아요?”
“네? 네.”
단유는 허리를 살짝 숙여 세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움츠려드는 기분, 이라고 느낄 때 다시 단유의 말이 이어졌다.
“많이 힘든가 보네요. 오늘은 두 사람 다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여기까지 해도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연습실도 비워줘야 하는데, 두 사람 모두 열심히 해준 것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점심은 제가 사드릴게요.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다며 연습실을 빠져나가는 단유의 등을 바라보다가 재만에게로 고갤 돌렸다.
“재만아.”
“응?”
“너 진짜냐?”
세훈의 물음에 재만이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왜 웃냐?”
“너 아까 한 시간 전에 나한테 그랬지? 왜 멍청하게 서 있었냐고. 지금 니가 딱 한 시간 전 내 모습이다.”
“그럼 설마 너도 나처럼···그랬냐?”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곧 서로가 비슷한 현상을 겪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현재의 연습실에서, 한 사람은 미래의 데뷔무대가 반복되는 경험을 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 일은 곧 연습생들에게도 알려졌다. 믿지 않는 이도 있었고 반신반의하는 이도 있었으나, 결국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기이한 경험의 증거로서 두 사람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 성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몸치에 가까웠던 재만이 능숙하게 안무를 소화해내는 것이나, 쉽게 흥분하기 일쑤여서 안무 대형을 놓치던 세훈의 침착하고 숙달된 안무 소화 능력은 보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