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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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연습실 구석에 놓여있던 접이식 의자를 하나 집었다.
“제가 들게요.”
세훈이 달려오려는데 단유가 가볍게 손을 들어 막았다.
“괜찮아요.”
의자를 출입문 근처에 둔 후, 등받이에 기대며 앉는 단유. 손을 까닥거리며 ‘연습들 하세요’라고 말한다. 재만과 세훈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데 단유가 다시 일어섰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단유는 연습실 뒤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돌아와 의자 옆에 시계를 보이지 않게 덮어두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연습에 매진하란 뜻일까? 단유의 의도를 그렇게 해석한 두 사람은 노트북 앞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비록 같은 클래스라도 데뷔조와 비데뷔조로 나뉘어 있어 최근 몇 달간 함께 연습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서로의 연습과제가 다른 상황.
“따로 하자.”
“어떻게?”
“난 이거 쓰면 돼.”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 시늉을 해 보이는 세훈. 태블릿을 거울 아래에 비스듬히 세워두고 블루투스로 연결된 이어폰으로 들으며 연습을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안무 영상을 녹화하는 동시에 음악도 들을 수 있으니 카메라 테스트도 동시에 할 수 있다. 데뷔조는 저렇게 연습을 하나보다.
노트북을 양보하는 세훈의 태도에 재만은 솔직히 샘이 났다. 차라리 서로 하겠다고 싸웠으면 모를까 먼저 양보하는 모습이 저 잘난 걸 뽐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재만은 따로 태블릿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세훈처럼 양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돌아서는 세훈을 한 번 흘겨본 뒤, 노트북 속에서 안무 연습용으로 사용하던 음악을 찾아 재생시켰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오자 반사적으로 단유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혹시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불편을 느끼진 않는지. 하지만 단유의 표정은 처음과 동일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리를 약간 낮췄다.
세훈은 밴드형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몸을 가볍게 풀고 있었다. 본격적인 안무를 연습하기 전의 스트레칭인데도 들리지 않는 리듬이 몸에서 보이는 듯했다.
‘안 돼.’
재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시선이 계속 재훈에게로 향하는데 괜히 세훈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거울 앞에 선 재만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팔을 위로 쭉 뻗어 근육을 최대한 이완시키고 긴장을 푼다. 목, 가슴, 허리, 다리, 발목에 이르도록 몸 구석구석에 힘이 전해지도록 스트레칭을 하고 관절을 움직인다.
호흡도 중요하다. 안무를 가르쳐주던 트레이너 선생님도 호흡을 매우 강조했다.
“호흡으로 힘을 전달해야 동작의 끝까지 살아있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힘의 배분과 전달은 호흡과 함께 한다. 그리고 호흡이 꼬이면 춤도 꼬인다.
곡이 끝날 무렵에 스트레칭도 끝이 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곡이 흘러나온다. 이번에는 곡에 맞춰 안무를 연습한다. 수십 번을 연습했던 곡이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
트레이너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안무는 곡을 표현하는 또 다른 악기야. 안무 자체만으로 그 곡이 주려는 이미지, 느낌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춤이란 거대한 카테고리 속에 현대무용이나 발레, 스트리트 댄스 따위의 여러 장르가 존재하지만 재만은 단 하나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학예회 같은 축제에서 아이돌 퍼포먼스를 흉내 내는 정도의 경험도 없었다. 굳이 찾는다면 집에서 TV 보는 동안 덩실거리는 정도가 전부였다.
때문에 오디션 합격 후 회사에서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알게 모르게 받은 스트레스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노래만 잘하는 아이돌은 이제 성공 못 해.”
동의하는 바다. 때문에 각오를 다졌었다. 회사에서도 충분히 연습을 시켜주겠노라 했고, 힘들 거라고 경고했지만 재만은 기꺼이 고생을 감내하겠다고 장담했었다.
하지만 장담했던 순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생이 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데뷔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재만은 거대한 열등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트레이너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음악과 함께 해야 한다. 음율, 리듬이 몸을 통해 표현돼야 해. 전문 무용수 수준까지 바라는 건 아냐. 하지만 일반 대중이 보기에 넋이 나갈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손이 가리키는 방향, 어깨의 움직임, 시선, 발끝의 방향, 이런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우선은 노래와 안무가 어울려야 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트레이너가 알려줬던 내용들을 떠올리며 연습을 해 볼 참이었지만 어느 순간 버벅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몇 번을 반복했을까.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된 재만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연습 전 단유가 시계를 치웠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니, 그 순간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시선을 떼어 거울 속 자신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괜히 민망해졌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였으려나?
호흡이 거칠어진 느낌이다. 반복된 연습에 체력이 부족해진 느낌이다.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다 옆을 쳐다보니 세훈은 여전히 쌩쌩한 얼굴로 움직이고 있다. 저 녀석은 지치지도 않나?
뒤에서 단유가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다시 허리를 편 재만은 다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쉬지 않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다. 이쯤이면 잠깐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유혹이 재만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여전히 ‘미친 체력’을 자랑하는 세훈의 격렬한 안무가 곁눈질로 확인되면 도저히 연습을 멈출 수가 없다. 괜한 자존심 싸움인 걸까? 별로 자존심 대결을 펼치고픈 마음은 없는데, 마음과 다르게 몸은 계속 움직인다.
다행인건 처음보다 안무가 몸에 익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대화 한마디 하지 않고 오로지 춤에만 집중했더니 의식하지 않고서도 몸이 움직이는 기분이다.
거울 속에서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자신을 발견하는 재만. 원래 이렇게까지 춤을 추지 못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음악에 맞추고 있다. 딱히 다음 동작이 뭐였더라, 고민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디테일도 챙길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지금 몇 번째 곡을 반복해서 듣고 있었지?
무아지경이랬던가? 아마도 그 말이 지금의 재만을 가리키는 표현일 테다. 이제는 거울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이 어떤 동작을 어떻게 펼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 그건 좀 오반가?
그래도 거울 속에서 움직이는 자신을 보면 트레이너가 매번 지적하던 뻣뻣함도 많이 사라진 듯 하다. 무엇보다 리듬에 몸을 싣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다는 기분이다. 박자가 쪼개지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동작을 세밀히 나눠야 하는 디테일도 잊지 않고 챙기는 재만이다.
곡이 끝남과 동시에 정확히 춤이 끝나자 희열이 찾아온다. 모처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기분이다.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다시 곡이 흘러나온다. 단유는 계속 쳐다보고 있고, 세훈은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이쯤이면 정말 지쳐서 몸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기이하게도 몸에 힘이 남아 있다. 왜?
···모르겠다.
재만은 다시 안무를 반복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점점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트레이너가 알려줬던 수많은 지적들은 희미해지고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들도, 그게 뭐였던지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왜, 라는 질문도 사라지고, 어떻게, 라는 고민도 사라졌다. 그저 거울을 보며 춤을 추는 자신만 남았다.
온몸의 근육이 마치 불수의근이라도 된 듯, 음악에 맞춰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재만은 그저 움직이는 몸을 거울을 통해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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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문득 들려온 소리에 재만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보자, 세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
“응?”
뭐하다니? 보면 모르나? 맹렬하게 연습중이지 않은가, 라는 대답이 나오려는 찰나 재만은 뭔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너, 얼굴 왜 그래?”
“내 얼굴? 왜?”
자신의 얼굴을 더듬는 세훈을 지켜보며 재만이 물었다.
“너 연습 중이었던 거 아냐?”
“무슨 연습?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
“너 서서 잤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세훈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잠깐은 그,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 있어서 세훈이 춤을 추는지, 바닥에 드러누웠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전에 곁눈질로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세훈은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음을 재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딱 한 번 반복했다. 한 번.”
“한 번?”
세훈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음악 앱을 중지시키자 세훈의 목에 걸려 있던 이어폰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던 소리가 사라졌다. 조용해진 연습실.
‘응?’
몇 번이고 반복해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왜 안 들리지? 의아한 마음에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리자, 세훈이 말했다.
“내가 껐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푸나 싶던 재만이 어느 순간 가만히 서 있기만 하길래, 세훈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재만에게 접근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초점이 나간 눈동자를 확인한 세훈. 불러도 대답이 없어, 우선 노트북의 음악을 껐다. 그리고 다시 재만을 부르니 그제야 반응한 재만이다.
“내가 그랬다고?”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거울을 보니 땀에 흠뻑 젖어 있던 옷이 뽀송뽀송하다. 새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옷을 벗겨 세탁기에 돌리고 이후 건조기로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뒤 다시 입힌 게 아니라면, 이건 자신이 땀을 흘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땀을 흘리지 않았다는 말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세훈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왜 그러세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단유가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만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연습 안 하세요?”
단유가 다시 되묻자, 세훈이 대답했다.
“금방 할 겁니다.”
그리고 재만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재만은 얼떨떨하지만 일단은 세훈을 따라 대답했다. 그리고 세훈이 꺼놓았다는 음악을 다시 재생시켰다.
익숙한 음악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수십 번? 수백 번? 아니, 애초에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반복해서 들었던 그 음악이다. 세훈을 돌아보니, 많은 질문을 담은 눈빛으로 재만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재만은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멍청한 표정을 짓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연습을 하기로 했다. 숨을 고르고 몸을 움직이려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전주부가 다 흘러가고 중간 쯤부터 나오는 음악에 몸을 맞추려는데 너무나도 익숙하게 음악의 흐름에 맞추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을 통해 발견된다.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함에도 몸은 저절로 움직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느낌. 마치 눈 감은 마이클 조던의 프리드로우가 이럴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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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트레이닝은 여러 분야에서 실제로 많이 쓰이는 훈련이다. 특히 운동선수들이 시합 전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콩쿠르에 나서는 피아니스트, 그림을 그리기 전의 화가들, 시험 치기 전의 수험생들도 사용하는 훈련법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효과적이려면 오감을 동원해야 한다고 한다. 단지 머릿속으로 시각적 이미지만 떠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청각, 후각 등의 감각까지 동원하여야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각적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거기에 오감까지 동원한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역으로 만약 현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밀한 시각적 상상과 오감이 결합 된다면, 그 효과는 어마어마하게 뛰어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수차례 반복하기까지 한다면?
일전에 못된 짓(?) 해서 벌 받았던 모 기획사 대표의 경우를 응용한 이번 환상 마법은 꽤 효과적일 것이란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듯 보였다. 춤에 문외한인 단유가 보아도 처음에 어설프게 몸을 움직이며 보였던 춤사위와 지금의 것이 천지 차이처럼 보이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효과가 있음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이것을 좀 더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법을 연구해야겠다. 지금 재만이 보이는 얼굴처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건 별로인 거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