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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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생으로 계약 후 회사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때는 솔직히 무서움이란 없었다. 오직 설렘과 긴장만이 가득했다. 새것처럼 깨끗하고 조금 오버해서 풋살을 해도 충분할 것만 같은 넓은 연습실에 발을 들이며 미래를 꿈꾸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우스울 뿐이지만, 그때는 학교 다닐 때도 잘 하지 않았던, ‘피나는 노력’이란 단어를 가슴에 새기며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 라고 믿었다.
지금에 이르러 그 믿음이 깨졌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노력’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며, ‘의지’는 스스로를 다잡는 신뢰의 단어다. 허나 전과 다른 점이라면, 단순히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력과 의지를 넘어서, 더 많은 현실적 장애물들이 앞에 놓여있고, 그것은 자신의 노력, 의지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더해져야만 넘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회사에 대한 ‘믿음’이었다. 개인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회사’라는 믿음. 때문에 연습생들은 기꺼이 회사의 통제에 따른다. 통제에 잘 따르는 사람에게 회사는 보답한다. 그것이 무언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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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실내. 단유의 시선을 마주하기 두려운 재만과 세훈은 바닥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회사에서 가장 마주치기 두려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할 것이다. ‘실장님’ 이라고. 사실 그 위에 개발팀장님도 계시고, 이사님도 계시고, 대표님도 계시지만, 언급된 임원들, 간부들은 거의 마주칠 일이 없으니 두려울 일도 없다. 어쩌다 휴게실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다해도 조금 어렵다뿐이지 두렵진 않다. 그러나 실장님, 매니저들은 다르다. 그들은 연습생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하고 통제하며 제재를 가한다. 특히 지난 1년간 함께 했던 실장님은 자신들의 단점과 습관까지도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라 우연히 마주쳐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시선을 피하게 된다.
“잘 하고 있지?”
라고 예의상 묻는 질문에도 눈치를 살피며 대답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앞에 있는 이사님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단유는 ‘밥 잘 사주는 이사님’이었고, ‘연습생들에게 다정한 이사님’이었고, ‘과묵하고 잘 마주칠 일 없는 이사님’이었다.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소리를 크게 내지르는 모습을 본적도 없다. 더구나 한때 연습생들 사이에 화제가 됐던, ‘왕년의 스타’였다. 무섭게 여길만한 이미지는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말이 있다.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면 그게 더 무섭다는 말. 사실 이건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이다.
지금이 그렇다. 자신들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을 단유가 목격했다. 단유는 회사의 간부며, 회사 차원의 결정을 내릴 때 입김을 세게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단유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을 제재할 것인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다. 더구나 사무실에 들어올 때까지도 그는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마냥 행동했다. 화가 난 표정도 아니었고, 말투는 덤덤했고 정중했다. 왜 싸웠냐는 물음도 다그치는 말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사정을 설명할 때도 단유는 표정 변화없이, 진중하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이야기가 모두 끝난 지금도 그의 표정에는 화가 났다거나 혹은 화를 내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잠시 이어지는 침묵과 고요는 두 사람을 무겁게 옥죄었다.
그때, 단유가 입을 열었다.
“입에 안맞아요?”
크지 않은 목소리에 두 사람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단유는 두 사람이 들고 있는 오렌지주스를 가리켰다.
“아, 아뇨. 맛있습니다.”
“그래요? 난 또. 내가 계속 말을 시키는 바람에 마실 틈이 없어서 그런가 해서 그랬는데, 안 드시길래요. 만약 입에 안 맞으면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맛있어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이 상황의 원인이 오렌지주스 때문이었다니. 재만과 세훈은 남은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진정들 된 것 같으니까, 제 생각을 이야기해 볼게요.”
한번에 원샷을 하고, 입가를 손등으로 훔칠 때 단유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 실장님이 가끔 지나가며 하셨던 말씀을 들어보면 두 사람 모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요. 비록 재만 씨는 데뷔조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을 끌어올리려 하고 있고, 세훈 씨는 데뷔조로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과연 실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라는 의심도 들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사님이 일개 연습생인 자신들을 기억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실장님은, 우리들 앞에서는 혼을 내셔도 뒤에서는 많이 자랑스러워하고 계시는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며칠 전 싸움을 들켰을 때, 실장님이 대노하여 자신들을 윽박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싸움을 일으켜 화가 난 게 아니라, 자랑스러운 연습생이라 믿었던 연습생들이 그 믿음을 배신한 탓에 더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실장님께 너무 미안해졌다.
“연습생 생활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진 않을 거예요. 오히려 혹독하다 싶죠. 기본적으로 경쟁을 바탕에 둔 시스템이다 보니 그래요.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만들고, 남보다 낫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가게 되죠.”
특히 재만의 경우가 그렇다. 데뷔조까지 탈락했다는 상황. 그럼에도 목표를 포기할 수 없기에 힘을 내보지만 자신의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현실이 자신의 목을 조른다. 열등감. 그 감정의 정체다.
“더구나 회사에서 정한 기준은 상당히 높죠. 만약 그게 회사에서만 통용될 기준이라면 모를까, 바깥에서도 요구되는 기준이라는 점 때문에 더더욱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바깥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한 시도 여유를 부릴 수 없죠.”
세훈이 그렇다. 데뷔조가 된 것은 기쁘지만, 이건 단지 시작이었다. 데뷔조이기에 더더욱 높은 기준을 통과해야만 하는 의무가 생겼다. 굳이 그렇게까지 높은 허들을 통과해야만 할까, 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 건 그 허들이 바로 데뷔 이후의 성공을 판가름하는 허들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허들을 넘지 못하면 설령 데뷔를 해도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한해에도 수없이 많은 아이돌이 등장하는 때, 이름하나 기억 못 시키고 사라진 아이돌 그룹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않았다. 그런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 스트레스를 표출한다. 어떤 이는 ‘건전하게’ 스트레스를 풀어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자기 혐오, 나아가 외부로 공격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진 실장도 이 점을 걱정했다. 때문에 단유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일 테다. 물론 단유는 진 실장이 부탁한 ‘강연’이란 형태의 도움은 여전히 제공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의 도움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어떻게 도울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지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생각해보았고,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효과적일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사용해봄직한 방식이었다.
사실 가장 좋은 건, 시스템을 완전히 개선하는 것이다. 시스템을 개선해서 그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하는 것이 좋은데,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육성 시스템의 기저라 할 경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겪는 마음의 불안, 스트레스의 원인이 경쟁이다. 시스템에서 경쟁이란 요소를 배제시킬 수 있는가? 불가능이다. 설령 사내의 멤버들과의 경쟁을 하지 않도록 바꾸더라도 회사 바깥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습생들과 아이돌들이 경쟁자가 된다.
그러니 그들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성공의 과실로 스트레스를 감추려 한들, 스트레스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니 단유의 앞에 앉은 이들에겐 그저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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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다는 진 실장에게 단유는 손사래를 쳤다. 자신에게 사과할 내용이 아니잖냐는 단유의 말에 진 실장은 그래도 송구스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단단히 주의시키겠습니다.”
“그건 실장님의 역할이시니까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구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이번 일로 두 사람 징계가 불가피하죠?”
“물론입니다. 새끼들,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녀석들, 제대로 혼을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본보기로라도 크게 벌을 내릴 생각입니다. ···혹시 따로 생각하시는 징계가 있습니까?”
“징계는 아니고요.”
단유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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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대훈에게도 따로 부탁해야만 할 일이었다.
“응? 왜요?”
대훈에게 부탁하자 대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켜보고 싶어서요.”
“지켜보고 싶다?”
“전부터 생각하던 게 있었어요. 지금 우리 회사가 나아가는 방향이 과연 틀리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해졌거든요.”
대훈의 얼굴이 몇 시간 지난 찰흙처럼 굳어졌다.
“처음 대표님이 회사를 세울 때 하셨던 이야기 있죠? 수직적인 회사가 아니라 수평적인 회사를 만들고 싶다. 아티스트와 회사가 진정한 공생을 이루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 물론 이제 겨우 2년 째에 접어든 회사라 섣부른 평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재 회사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고 싶어서요. 그건 재무 회계 표만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전에 공 이사님과 함께 있을 때 나눴던 대화의 연장인가요?”
“아, 그것과는 조금 달라요. 그때의 이야기는 회사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였고, 지금은 정책의 방향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니까요. 회사 내부 직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연습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관찰하는 것도 좋은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여러 가지가 시도되고 진행되는 와중에 연습생들을 상대로 한 프로젝트는 현재 회사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줄 것, 이라는 단유의 대답에 대훈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두 연습생이 레슨에서 빠지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두 사람을 가만히 두는 건 나중을 위해서라도 별로 좋지 않잖아요? 그러니 겸사겸사 제가 일주일 정도 두 사람과 함께 한다면 징계와 동시에 저의 개인적인 의문에 대한 해결도 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제 업무는 소홀히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김 이사 일은 걱정 안해요. 단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그래요. 김 이사님이 나선다는데 막을 명분이 없으니까. 우리 회사 사주께서 하시는 일에 제가 배놔라감놔라 할 순 없잖아요?”
“왜 또 그러세요. 일개 투자자입니다.”
“하하, 아무튼 편하신대로 하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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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레슨에 빠지는 건 전에도 들었던 문제니까 이해했다. 오히려 더 큰 벌이 내려지지 않은 걸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회사에 정시 출근하여 대기하란 말에 왔더니 빈 연습실에 단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부터 일주일 간 여러분들을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감독이요?”
“음, 이게 어떤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일주일 간 잘 반성하는지,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는지를 제가 지켜볼 예정입니다.”
매니저도 아니고 이사가 직접 자신들을 지켜본다? 일주일간? 재만과 세훈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도? 야, 나도.’
숨이 턱 막히는 심정이리라.
반면 단유는 지금 이 순간 자리하기 전까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던 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한번은 해봄직한 방법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게 실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에 선 이들은 실험체가 아니니까. 동시에 그들이 그 어떤 이상함(?)도 느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자연스럽지는 못할 테다. 마법이 자연스러울 리 없으니까. 그래도 설령 의혹을 가지더라도 최대한 의심을 하지 않게, 의문을 품더라도 그것이 단유로부터 기인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자연스러운 연기가 필요하다.
단유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어 주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지금 이 연습실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그 시간 동안 단유는 온전히 이 공간의 지배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