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15화 (915/956)

일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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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에게 강연을 부탁한 후, 그녀의 대답을 진 실장에게 알려주고 그녀와 직접 컨택하여 스케줄을 조정하도록 제의했다. 동시에 단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사실 재무 이사란 자리에 있으나 딱히 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아니, 일이 적진 않지만 단유에겐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연말에 세운 예산안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정도야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의 그래프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재무팀에서 매일 매일 처리하는 사소한 업무들과 보고들의 경우는 몰아서 정리해버리면 하루도 걸리지 않는 일들 뿐이었다. 보고서 속 숫자들이야 약간 과장해서 한번 훑는 정도로도 파악이 되고, 오류는 곧바로 수정이 되니 두 번 세 번 검토할 일도 없다. 게다가 ‘웅녀 프로젝트’ 이후 일상 업무를 제외한 회사의 모든 자원이 프로젝트로 소요되고 있으니 따로 재무 컨설팅이 필요한 업무도 없다. 결국 재무 이사라는 자리에서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일도 줄어든 것이다.

그러니 대훈이 ‘회사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이라고 놀리듯 말해도 반박할 거리가 없는 지금이다. 그런 사정이라 단유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이번처럼 연습생을 돕는 일은 꽤 의미가 있다. 봉사활동 점수를 얻기 위해 형식적인 도움을 주는 일도 아니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행위 자체가 크게 보면 회사를 위함이다. 또한 대표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임원, 간부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연습생을 돕는 건 업무 외 영역이나 단유로서 충분히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이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사내 메신저로 신인개발팀장이 사과를 해왔을 때 괜찮다고 대답했음은 물론이고 도움이 필요하면 능력이 닿는 선에서 돕겠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과연 능력이 닿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단유 본인이 미리 그 선을 정해놓고 그 선을 지킨다면 이후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생들을 돕기 전에, 연습생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예전에 연습생들의 연습복을 구매할 때도 그녀들이 먼저 필요로 했음을 이야기했고 거기에 맞춰주었다. 단유 스스로가 필요하겠거니 생각해도 정작 본인들이 필요하다 생각지 않으면 선물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먼저 연습생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게 좋겠다, 고 생각했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할 것도 아닌데 비밀로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서였다. 단유가 연습실이 있는 2층으로 설렁설렁 내려간 것은. 연습실을 돌아보며 뭐가 필요한지 살펴보려고 기웃거리다 우연히 남자 연습생들의 싸움을 보게 된 이유는 그런 까닭이었다.

****

“뭐냐? 너? 왜 또 시빈데?”

귀기가 서렸다 싶을 정도로 독이 오른 재만의 날선 시선이 세훈에게 꽂힌다. 하지만 세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야말로 왜 형식이한테 시빌 걸어?”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아가리 다물고 꺼져.”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는 재만에게 세훈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모르긴 뭘 몰라, 새끼야. 만만한게 형식이니까 시비거는 거 아냐?”

“꺼지라고 했다.”

“너부터 꺼져, 새끼야.”

“뒤지고 싶냐?”

“눈에 뵈는 게 없지? 저기 시간표 안 보이냐?”

분명 시간표에는 데뷔조 연습시간이 곧 시작될 것임이 적시되어 있으나, 재만은 고집을 부렸다.

“아직 시간 남았다.”

정확히는 6분 정도가 남았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억지 부리지 말고 꺼져, 새끼야.”

“와, 이 씨발놈이. 한 판 뜰까?”

“됐어, 새끼야. 실장님한테 찍히고 싶으면 너나 지랄하세요. 애꿎은 사람 끌고가려 하지 말고. 새대가리 새끼도 아니고 졸라 멍청하게 구네.”

어쩔 수 없다. 명분은 데뷔조에게 있고, 재만으로서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게 되면 자신을 우습게 볼 이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게다가 새대가리? 충분히 모욕적이다.

“개새끼가. 진짜 죽고 싶냐?”

결국 이번에도 재만이 먼저 세훈의 멱살을 잡아 틀었고, 세훈은 한 걸음 밀렸다. 얼굴이 붉어진 세훈은 역시 재만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다른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채, 언제라도 면상을 후려칠 준비가 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연습실 문으로 향하고, 거기에 선 단유의 덤덤한 모습에 두 사람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만들 하시죠?”

단유는 조용히 주문했다.

으르렁대는 수컷들의 날선 시선들이 익숙했다.

‘저때의 아이들은 다 비슷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중고등학교 때 숱하게 겪고 보았던 장면들이었다. 학교를 벗어났다고 해서 갑자기 어른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학교의 연장선인지도 모르겠다. 장소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지만, 결국 어른에 의해 구속받는 상황, 이라는 건 똑같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논리적인 판단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회사와 계약을 하고 들어온 연습생들이고, 계약이라는 것은 책임을 요구한다. 그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을 아이들이니 단순히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니며 통제받는 상황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책임감이라는 것에 무감각한 학생들과 무한 책임을 져야함을 매시간 매분 절감하는 아이들.

그러나 ‘아이들’이라 통칭되는 만큼이나 정신적으로 미숙함이 엿보인다.

문을 열고 연습실에 오른 단유. 구두굽이 연습실 마루에 닿으며 울림이 연습실을 메운다. 첫 울림에 화들짝 놀란 두 연습생이 손을 놓고 한 걸음씩 멀어지고, 두 번째 울림에 아이들은 침을 꿀꺽 삼킨다. 세 번째 울림에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숙여 뒤늦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여자 연습생들과 달리 남자 연습생들과는 그다지 잦은 교류가 없었음을 자각하며 네 번째 울림을 연습실에 퍼뜨린다.

그리고 마침내 연습생들에게 다가간 단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재만이 움찔했으나 아랑곳않고 뻗어진 단유의 손은 구겨진 옷깃을 펼쳐주었다. 이어 세훈의 옷까지 펴주고 다시 한 걸음 물러서는 단유.

“듣기로 다시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이유를 막론하고 징계가 있을 거라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런 싸움이 벌어진 건 정말 피치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죠?”

그럴 리가.

“···죄송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만과 세훈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단유는 두 사람의 뒤에 서서 눈치를 살피던 형식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죄책감에 입술을 바르르 떠는 모습. 우연히 단유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금방 시선을 떨군다.

말없이 두 사람 앞에 선 단유의 존재감이 장난 아니어서 뒤늦게 연습실로 들어오려던 데뷔조 연습생들은 이유도 모른채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들어오세요.”

단유가 뒤를 흘깃 바라보며 말하자, ‘명령’이라고 판단했는지 순식간에 안으로 우르르 달려드는 아이들이었다. 단유와 적당히 거리를 둔 위치에서 정렬한 채로 단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이런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트레이너든, 매니저든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통제했고, 아이들은 그 통제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양이라.

경험했듯이 통제에는 늘 일탈의 충동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앞에 선 두 사람은 일탈을 꿈꿨을까?

“다른 사람들 연습에 방해되면 안 되니까, 재만 씨랑 세훈 씨는 저 따라 오실래요?”

단유는 두 사람을 데리고 연습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연습실 안이 어수선해지는 모습이 아마도 지금 사태에 대한 이유를 파악하려는 것이리라.

“어, 이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마침 레슨을 위해 연습실로 향하던 트레이너와 마주쳤다. 트레이너의 시선 역시 단유의 뒤에서 ‘나 죄지었소’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연습생에게 닿았고, 단유는 둘을 변호하는 대신,

“따로 이야기 좀 나누려고 하는데, 양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트레이너의 허락까지 받은 단유의 뒤를 따르던 두 사람의 얼굴은 이보다 더 시커멓게 변하긴 어렵다 싶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아마도 실장에게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징계는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쩌면 전에 말한 것 이상의 징계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란 걱정이 든다.

데뷔조인 세훈은 데뷔조 탈락을, 재만은 연습생 자격 박탈과 퇴사 조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3층에 오르기 전에 단유를 붙잡고 제발 봐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까 고민이 되기 시작할 무렵, 단유는 두 사람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고―뜻밖에도(!)―4층으로 향했다.

재무팀으로 들어갈 땐, 재무팀 직원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야 했고, 재무 이사실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갈 것을 권유받았을 땐,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 따로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으로 회의실이 적당한데, 아쉽게도 지금 회의실은 간부팀 회의중이라서 여기로 왔어요. 일단 거기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요.”

두 사람을 자리에 앉혀 놓고 다시 나가버린 단유.

조용한 회의실에 남게 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의문과 불안감, 초조함에 입을 열기가 어렵다, 고 재만이 생각하던 찰나 세훈이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엿됐네.”

자조적인 목소리는 후회막심이라는 감정이 오롯이 배어있었다. 미안해 해야 하나? 그렇진 않았다. 재만은 지금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단지 내가 왜 이런 처지에 처한 걸까 후회스러울 따름이었다. 다시 조금 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화를 참지 못했던 자신을 쥐어박던지 머리채를 쥐고 억지로라도 자기 자신을 연습실 바깥으로 끌고나왔을 것이다.

무릎에 둔 주먹을 세게 쥐며 몇 번이고 이를 갈던 재만은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세훈 역시 비슷한 속도로 일어섰다.

“괜찮아요, 앉아요.”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단유는 두 사람에게 휴게실에서 가져온 음료수를 하나씩 건넸다.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목을 축이기엔 충분할 거예요. 두 사람 다 여전히 흥분한 모습인데, 마시면서 흥분 좀 가라앉히도록 하고.”

단유는 두 사람의 맞은 편에 앉으며 먼저 음료수 병을 땄다. 마셔요, 라고 재차 권유하는 단유의 손짓에 두 사람은 입을 맞춰 ‘잘 마시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음료수를 개봉했다. 이게 그 유명한 오렌지 주스구나, 라고 생각하며 맛을 보니, 보통의 오렌지 주스보다 훨씬 깊은 맛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레슨이 시작되기 전 남자 연습생들과 같이 휴게실에 왔을 때, 냉장고에 가득한 오렌지 주스를 보며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재무 이사님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게 소웠이었지, 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래서 오렌지 주스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인생의 성공과 이성으로부터의 인기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고 남자 연습생들은 그 맛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평범한 마트에서 판매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 나리라 예상했던 그 오렌지 주스를 들게 된 두 사람.

“이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누가 먼저 이야기 해볼래요?”

단유의 질문에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어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 해줄 수 있겠어요?”

재차 물어도 두 사람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재만 씨가 말해볼래요?”

그러고보니 아까도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듯 한데, 어떻게 이사님이 일개(?) 연습생인 자신의 이름을 알까 궁금했다. 이름표가 붙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와의 접점이라면 고작해야 작년 오디션을 볼 때 얼굴을 본 정도가 다였지만, 그때의 기억을 지금까지 하고 있을리 없다, 고 확신하는 재만이었다.

“그게요, 사실은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가, 란 호기심은 일단 접어두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단유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화가 많이 났었나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화를 내면 안 됐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욱하는 성격이어 가지고요.”

“그럴 수 있어요. 재만 씨 나이 때는 충동이 이성을 누르고 발현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단유는 이해한다는 듯 대답한 뒤, 세훈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세훈은 자신이 들어오기 전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신이 목격한 바, 그리고 형식에게 위압적으로 다가서는 재만으로부터 동생을 보호하기 나섰다는 변명을 덧붙이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 사이, 단유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보니, 진 실장으로부터의 문자였다. 아마 어떻게 사정을 들은 모양이었다. 단유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겠다란 문자를 보낸 후,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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