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2)-수정(12.02)
-------------- 914/952 --------------
“우와, 이게 다 뭐야?”
레슨을 끝내고 돌아온 아이들은 주방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먹지 못했던 족발이나 치킨같은 배달 음식들이 한 상 가득했다.
“이사님이 시켜주셨어요.”
시율의 대답에 아름이 놀라며 물었다.
“이사님 오셨었어?”
“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음식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
“먹어도 되는 거야?”
“먹어라. 니들 먹으라고 시켜주신 건데 먹어라.”
아이들 뒤로 나타난 진 실장이 심드렁한 어투로 허락했다.
“대신 오늘 먹은 만큼 고생은 해야 할 거다만···, 사실 니들이 그런 걱정하냐? 그냥 먹어, 오늘은.”
“감사합니다!”
“나한테 왜 감사해? 감사하려면 이사님한테 감사해야지.”
주방 탁자에 들러붙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진 실장은 시율을 따로 불렀다.
“결정했어?”
“네.”
시율의 밝은 표정을 보니 대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답은 역시나였다.
“왜 마음을 바꾼건데?”
“다른 곳엘 가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어요, 물론.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이사님이나 나윤 선배님, 그리고 실장님 같은 좋은 조언자 분들이 계시다는 거, 좋은 친구와 동료가 있다는 점 때문에요. 다른 곳에 더 좋은 조건의 회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더 좋은 조언자는 찾기 힘들 거 같거든요. 이렇게 좋으신 분들과 함께라면 분명 더 나은 제가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믿을 수 있는 분들과 함께라면 기다림도 의미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진 실장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 생각했다. 이제 딴 생각하지 말고 연습만 죽어라 해라.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줄게. 알지? 난 너희들 편이야. 너희가 잘 되야 나도 잘 되는 거야.”
“잘 부탁드립니다.”
진 실장은 그저 시율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굵은 손마디가 시율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
진 실장에게 강연제의를 받은 단유는 즉답을 피했다. 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다 싶지만, 연습생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해주기엔 자신이 아는 바가 없다고 느껴지는 탓이다.
만약 연습생들이 양자역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거나, 혹은 선형대수학의 응용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들에 대해 토의를 하고 싶어한다면 모를까, 연예계에 대해서는 겉핥기 정도로만 알 뿐이고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성공 스토리는 본인과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멘탈 관리를 위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특별히 멘탈을 유지하기 위한 비법이라도 있어야 말을 꺼낼 텐데 그런 비법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무엇보다 뭔가 젠체하며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건 단유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냥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개인적인 생각을 가볍게(?) 나누는 정도라면 모를까.
오히려 강연 같은 걸 한다면 나윤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이상하다?”
“뭐가?”
“전에 나 데려간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너한테 강연을 부탁한 건데 왜 나한테 오는 거야?”
나윤의 질문에 단유는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스스로 밝혔듯, 경험자이자 선배이며 현직에서 활동 중이기까지 하니 아이들에게 더 와닿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 않겠냐는, 답을 내놓자 나윤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단유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야?”
“응.”
게슴츠레한 눈빛을 쉬이 풀지 않는 나윤을 보며 되물었다.
“그럼 누난 내가 왜 이런 부탁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데?”
“딱히 널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에 네가 일부러 계속 일을 만든다는 느낌이랄까?”
“일을 만들어? 왜?”
“글쎄다? 음···그냥 나 보고 싶어서?”
농담조로 대꾸하는 나윤의 말에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부정하려 했지만,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라? 대답을 못 하네? 우리 이사님, 들킨 거야?”
“···의심하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 의심하지 마. 난 정말로 나보다 누나가 더 강사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니까.”
“일전에 시율이 설득한 것도 내가 아니라 너였잖아?”
“누나가 한 거지. 난 그저 누나가 좋은 조언자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임을 증언한 것이고, 시율 씨는 그걸 수긍한 거니까.”
“겸손도 하셔라.”
나윤은 주먹으로 단유의 가슴께를 가볍게 툭 쳤다.
“생각은 해 볼게. 그런데 알다시피 내가 요즘 바쁘잖아? 시간이 날지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곤 검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이마에 가져다 댄다.
“보자, 생각을 해 보니까 말이야, 나쁘진 않겠어. 역시 저 때의 아이들이 무슨 고민들을 하는지 모르지 않으니까. 다들 17살의 내 모습인 것 같아서 돕고 싶다는 마음도 들고.”
잠시 말을 멈춘 나윤.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솔직히 돕고 싶어. 도울 수 있을 때 돕고 싶어. 그래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의 짐, 이란 단어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가 가수로 오래 가지 못했던 이유는, 무대에 서는 게 너무 힘들어서였어. 그 시절의 나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거든. 나 때문에 선배 언니들이 회사에 나간 것 같고, 나 때문에 가디스R도 해체된 것 같고, 나 때문에··· 너한테도 상처를 준 것 같고.”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알아,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 언니들한테는 언니들만의 인생이 있었을 테고, 회사의 문제도 있었을 테고. 어쨌든 나 때문만은 아닐 거야. 그런데 내 탓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아. 이유는 없어. 다만 심정적으로 그런 느낌이라는 말이야. 좀 더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까. 아니면 양보를 하는 게 좋았을까. 뭐 아무튼 사소한 기억들 속에서 내 행동, 내 말들이 후회가 되는 거지.”
“우선, 방금 말한 이야기들은 과거의 일들을 너무 과하게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닌가 싶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저러하다고 위로하긴 힘드네. 하지만 그 전에 말한 것 중에 내가 상처받았다는 말은 잘못된 판단이야.”
“그것도 알지. 네가 쉽게 상처받지 않는 성격이란 거. 오히려 내가 더 상처입었다고 해야 하나? 농담이야, 농담. 사과하려고 하지 마. 아무튼 말이야,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드니까, 그 시절의 내가 좀 밉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랫동안.”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반성하는 의미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말?”
“응, 그런 느낌. 저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거지. 내가 했던 실수들, 내가 했던 미숙한 생각들을 하지 말라고. 나중에 후회할 수 있는 행동은 피하라고. 그런 말들을 해주고 싶은 거지.”
아마도 나윤은 그걸 통해 17살 데뷔의 꿈에 부풀었다가 팀이 와해되는 경험을 했었던 어린 나윤을 위로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철없는 말들, 행동들이 몇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부끄럽기만 하기에, 그 전철을 밟지 말라고 진실 된 조언을 해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아무튼 기분 좋아.”
“뭐가?”
“니가 이렇게 먼저 날 찾아와 주는 게.”
“그게 뭐 어떻다고.”
“앞으로는 전화도 종종 먼저 해주라. 그럼 더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단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돌아온 시율의 쾌활함과 열정은 다시 연습실을 뜨겁게 만들었고 곧 다른 연습생들도 거기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남자 데뷔조의 지정 이후 한동안 시무룩했던 연습생들의 분위기가 반전될 정도였다.
“야, 야. 네 마음은 잘 알겠는데 그래도 적당히 해. 그러다 병 나겠어.”
“며칠 쉬는 동안 생각해 봤는데요.”
숨을 헐떡이면서도 시율은 밝게 웃었다.
“전 역시 가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는 게 정말 즐거워서요. 이틀 동안 연습을 안 했을 뿐인데도 몸이 근질거리더라고요.”
“역시 연습벌레답네.”
“지금보다 더 멋진 춤, 더 듣기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시율의 긍정적인 변화는 그녀를 지켜보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트레이너들은 이러한 변화를 기꺼워했다.
“그래, 열심히 하자, 얘들아. 그래서 나중에 너희들 데뷔할 때 다들 깜짝 놀라게 하자고. 할 수 있잖아? 그치?”
“네!”
“좋아,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할게.”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 너희들이 보여준 의지를 선생된 입장에서 응원해주지 않으면 안 돼.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난이도를 조금 올려보자.”
트레이너의 엄포에 우는 소리를 내보는 연습생들. 하지만 이내 레슨에 집중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순조롭게 흘러만 가진 않았다. 여자 연습생들이 다시 한번 각오를 다잡고 연습생 생활을 이어나갈 때, 남자 연습생들 사이에서 또 한 번 문제가 생겼다.
****
진 실장의 경고는 효과적이긴 했다. 데뷔조에 발탁된 남자 연습생들과 발탁되지 않은 연습생들 모두 이후에 나올 징계가 두려워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속에 있는 갈등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여자 연습생들 사이에 오고 가는 교감이 남자 연습생들에게까지 전해졌다면 모를까, 데뷔조는 철저히 따로 레슨을 받다 보니 그 긍정적 에너지가 미처 전달되지 못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야, 너 대답 안 해?”
“······.”
“반항하냐? 응?”
데뷔조가 발탁되기 전까지, 남자 연습생들도 여자 연습생들 못지 않게 돈독한 사이였다. 그랬던 이들이 데뷔조로 나뉘고 위상이 달라지자 조금씩 금이 갔다.
데뷔조로 발탁되지 못한 연습생이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할 순 없다. 데뷔하지 못하는 연습생, 이라는 자격지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데뷔조는 데뷔조 나름대로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고, 조금도 방심할 수 없다는 각오로 자신을 옥죄고 있던 때였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여유가 모자랐던 것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형, 동생들을 배려하는 연습생도 있었고, 신경이 날카로울 때는 스스로 교류를 피하며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심스러움이 부족한 아이는 있었고, 배려심보다 이기심이 조금 더 앞서는 순간적인 충동에 지고 만 아이도 있었다.
“내 말 우습냐?”
“아, 왜 그래? 참아.”
“이걸 어떻게 참아요? 형도 보셨잖아요? 이 새끼 졸라 같잖게 구는 거. 데뷔조면 다야? 내가 우스워?”
“그만해라. 실장님 알면 일 난다.”
“···내가 진짜···아우, 너! 상엽이 형 때문에 참는 거다. 앞으로 조심해라.”
데뷔조에 발탁되지 못한 재만은 그의 앞에서 입술을 깨문 채 침묵 시위를 벌이는 형식보다 2살이 많다. 평소 자존심이 강한 편이어서 월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자신을 자책하는 일이 잦았다. ‘잦다’는 말은 곧 그의 실력이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그의 재능이라면 ‘외모’였는데, 방송계 데뷔하려는 아이돌에게 외모는 정말 큰 장점이다.
그러나 실력이 외모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종종 나왔고, 이는 그에게 꽤 스트레스가 되었다.
오래 전부터 아이돌을 꿈꿨던 것은 아니다. 단지 우연히 D&D 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을 보게 되고, 합격이 되고, 연습생이 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미래를 아이돌로 정하게 되면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아이돌 원탑도 가능하다’는 평가에 고무되었다. 그 평가를 가슴에 품은 채 연습생 생활을 해 왔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력이 빨리 늘지 않았다.
그러다 데뷔조 선정 당시, 그는 실력 미달을 이유로 데뷔조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액터 클래스로 전향해보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재만은 거부했다.
“아이돌로 성공하고 싶습니다.”
빨리 실력을 길러 ‘아이돌 원탑’이 되고 싶었다.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했던 만큼 스스로에게 실망도 컸다. 그리고 설마 본인이 그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지만, 데뷔조의 연습생들을 볼 때 열등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번 숙소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동갑인 친구와의 사소한 신경전이 곧 말다툼으로 이어졌고, 거센 욕설이 오가다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뻗게 되었다. 본격적인 싸움이 되려는 찰나 진 실장이 들이닥친 까닭에 싸움은 금세 중지되었지만 재만의 열등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리고 오늘, 연습실을 사용하던 중, 데뷔조인 형식이 연습실에 들어와 말을 걸었다.
“저희 곧 연습해야 돼요.”
말인즉슨, 데뷔조 연습생들이 연습실을 쓸 시간이 되었으니 비켜달란 이야기였다. 이전의 싸움으로 데뷔조 연습생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어린 동생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정상적인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야, 너 뭐라고 그랬어!”
그렇게 시비가 붙었는데, 함께 연습하던 탈락조 상엽이 재만을 말리며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을 듯 보였다. 만약 그 타이밍에 다른 데뷔조 연습생이 문을 열고 들어서지 않았다면 말이다.
“야, 김재만! 너 뭐 하는 거야!”
재만과 싸웠던 동갑 친구이자, 데뷔조였던 세훈이 달려와 재만과 형식 사이에 섰다. 부릅뜬 눈으로 재만을 노려보는 세훈, 그리고 그 시선에 또 한 번 욱한 재만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