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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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로는, 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겠지만, 어떤 선택이 더 좋은 길이었는지는 판단하기 힘들죠. 다른 선택을 한 인생을 살아보지 않는 이상은.”
갑자기 왜 그러냐는 나윤의 시선이 여간 따가운 게 아니지만, 단유는 할 말은 하겠다는 태도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왜요?”
조금 전까지 나윤과 단유가 어려워 움츠리고만 있던 시율이 생각지도 못했던 단유의 발언에 놀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인생은 그런 거예요.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알 수 없는 것. 시율 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처음 우리 회사에 오디션을 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시율 씨는 하나의 선택을 한 겁니다. 그렇죠? 시율 씨에게는 우리 회사 오디션을 보지 않는 선택지도 있었을 테지만, 그 선택지를 포기한 셈입니다. 그래서 결과에 만족하시나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더니 시율은 입술을 열었다.
“이 회사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좋은 선생님들과 이사님 같은 분을 만났으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받은 레슨은 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후회는 안 해요. 그래서 지금 더 미안한 마음이고, 혼란스러운 거예요.”
“우리 회사 오디션을 보지 않고, 다른 회사의 오디션을 봤더라면 어땠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어쩌면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회사라고 해서 우리 회사만큼의 지원과 레슨이 없으리란 법은 없고, 어쩌면 시율 씨가 바라는 데뷔를 곧바로 할 수 있었을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른 삶을 살아보지 못했으니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럼 제가 선택을 잘못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선택에 대한 잘잘못은 누구도 할 수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건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선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죠.”
“더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잖아요?”
“더 좋은 선택을 위해선 비교를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비교가 가능한가요?”
단유는 나윤과 시율을 번갈아 바라보며 답을 할 수 있냐 물었지만, 두 사람 다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시율 씨가 점심메뉴를 고른다고 가정해보죠. 여러 가지 메뉴판을 보며 어떤 메뉴를 먹을까를 고민하겠죠. 사실 어떤 메뉴를 고르든 시율 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거예요. 뜨거운 음식을 급히 먹다가 입천장을 데어 한동안 고생한다거나, 상한 재료를 사용한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난다거나 하는 변수는 제하고, 단지 맛이 다른 메뉴를 고른다는 가정이에요. 그것도 선택이라 한다면 사실 별로 고민할 문제는 아닐 거예요. 왜일까요? 그건 시율 씨가 고르는 메뉴들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축적된 정보가 있기 때문이죠. 이 메뉴는 어떤 맛이 나고 그 메뉴를 먹은 뒤에 어떤 기분이 든다는 것까지 경험한 정보가 있기 때문이에요. 때문에 경험에 따라 선택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요. 비교란 건 단지 음식간의 맛을 비교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음식의 섭취 이후의 만족까지 비교하는 것입니다.”
단유는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지금 한 이야기의 전제는 고민하는 점심 메뉴에 대한 경험이 과거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니 다음 질문이 떠오르죠. 만약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먹지 않은 메뉴를 고르는 일이라면 어떨까, 하는 거죠. 어때요? 아까보다 선택이 어려워졌죠?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시율 씨는 인생을 걸고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설령 하나의 선택으로 다른 선택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다음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수백, 수천의 기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시율 씨가 고민하는 문제는 다르죠. 수십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단 한 번의 선택이 곧 시율 씨의 인생의 항로를 결정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더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잖아요.”
나윤의 대꾸에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선택은 신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남습니다. 그 후회는 단지 포기한 가치에 대한 후회이며, 그 가치는 정확한 산정이 불가능한 가치이기에 후회의 크기는 가늠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조금 전에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해보죠.”
“단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메뉴를 앞에 두고 고민할 때, 만약 그 옆에서 그 메뉴를 경험해 본 사람이 조언을 해준다면 어떨까요? 간접적이지만 메뉴에 대한 정보를 얻음으로서 선택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게 되겠죠? 바로 조언자의 필요성입니다. 혼자 선택하기 힘들 때 좋은 조언자가 곁에 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시율과 나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죠. 시율 씨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를 할 겁니다. 좋은 선택이란 없어요. 더 나은 선택이란 것도 섣부른 판단입니다. 다만 어떤 선택이든 스스로 감당할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망설임은 그 의지가 부족하다는 뜻이겠죠. 또 하나, 선택에 대한 불안감은 선택의 결과에 불확신입니다. 미지의 결과를 예상해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조언자가 있다면, 그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분명 단유가 하는 말은 시율에게 하는 것인데, 나윤은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자리에서 단유가 말하는 조언자라 함은 바로 자신을 일컫는 것인데, 한 연습생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에 대한 조언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진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탓이다. 후배가 될 연습생이란 생각, 예전에 같이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설득을 돕겠다고 했던 결심, 그리고 자신의 알량한 경험만으로 조언을 너무 쉽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란 반성이 되었다.
“너무 장황했었나요? 사실 전 이쪽의 경험도 없고 아는 바도 없어 좋은 조언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윤 씨와 함께 동행한 건데, 그래도 제 기준에서 시율 씨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을 해주고픈 마음이 들어 한 이야깁니다. 가수 쪽은 잘 모르지만,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택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한 편이니까요.”
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이사님. 덕분에 결정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요? 좀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뇨, 나윤 선배님과 이사님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고 이해했어요.”
“결정을 하신 거예요?”
나윤이 묻자 시율이 싱긋 웃었다.
“네.”
“어떻게 하실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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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말은 잘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입만 살았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럴 리가. 넌 보기보다 생각이 깊어. 깊은 생각 끝에 나온 이야기는 늘 뭔가를 깨닫게 해 주니까 항상 듣고 싶어져.”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전 지루해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그런데 보기보다 생각이 깊다고요?”
“너 덩치만 보면 무슨 운동이나 하다 온 사람같이 보이잖아? 솔직히 너 지금 입고 있는 양복 벗고 평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다들 무슨 운동 선수 아닐까 착각할걸?”
단유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볼을 긁적였다. 나윤이 작게 웃으며 단유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단유가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단유의 두 볼을 잡고는 시선을 맞추는 나윤.
“농담이야. 몸은 이래도, 네 눈은 세상 누구보다 깊고 맑으니까. 누구라도 너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면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잠시 그렇게 두 사람은 눈을 맞춘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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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팀장에게 된통 깨진 진 실장은 트레이너에게 양해를 구하고 데뷔조 애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너네 무슨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희 아직 데뷔 안 했어. 데뷔도 안 했고, 데뷔가 확실하지도 않아. 무슨 뜻인지 알아? 데뷔 전까지 불성실하거나 실력이 모자라는 멤버는 가차 없이 자르겠단 소리야.”
단순히 경각심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데뷔조는 경우에 따라 멤버 수를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있다.
“실력만 좋다고 데뷔할 수 있을 거 같아? 솔로도 아니고, 그룹 생활을 하게 될 아이돌을 뽑는데 숙소에서 사고치는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갈 정도로 회사가 너그럽지 않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진 실장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들이 불쌍하다거나 가여워 그런 것은 아니다. 아이들 관리를 잘못한 탓에 자신의 커리어에 흠이 갈까 봐 두려워서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장으로 진급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한 탓이었다.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아직 데뷔조가 데뷔를 한 것도 아닌데, 새끼 매니저들까지 생기며 지위가 상승한 탓에 너무 안일했다.
진 실장은 독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몰아붙인 후, 계엄령에 가까운 엄포를 했다. 매일 식단 관리 및 체중 관리, 주간 평가 및 월간 평가에 따라 벌점과 상점을 부여하고 벌점 초과자의 경우 그에 상응하는 벌이 주어질 것임을 선포했다.
“어떤 이유로든 이런 일이 또 한 번 벌어지면, 그때는 위에서 뭐라고 하든 내가 책임지고 데뷔조 엎는다. 알았지?”
이후 다른 클래스의 연습생들 단속에도 나섰다. 여자 연습생들에게도 남자 연습생과 똑같은 조치를 취했다.
“연습생 과정은 결국 경쟁이다. 함께 연습하고 격려하고 위로해도 결국 한정된 데뷔조에 들기 위해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너희들은 동료다. 서로가 동료라는 것을 망각하고 싸우기만 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원칙을 위배하는 거니까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싸운 두 사람을 불러다 강제로 화해시키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어떤 이유로 싸웠든, 싸웠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두 사람은 잘못을 한 것이고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동의하지?”
“네.”
풀죽은 싸움꾼 두 사람의 얼굴에 그려진 푸른 멍자국에 진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주일간 숙소 청소는 너희 몫이다.”
레슨 받을 거 다 받고 지친 몸으로 숙소로 돌아가 다시 숙소 청소까지 해야 한다. 결코 가벼운 벌은 아니다.
“내가 직접 매일 검사할 거야.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하면 기간 연장. 두 번 이상 지적되면 레슨 금지. 그럼에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데뷔조 제외 및 퇴사까지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알겠어?”
레슨 금지는 연습생들에게 치명적이다. 레슨 안 받고 쉬니까 좋지 않겠냐 생각한다면, 이미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연습생으로서의 자격 박탈이다. 주간, 월간 평가를 고려하면 다른 연습생들에게 뒤쳐질 수밖에 없게 되고, 평가 점수가 하위에 계속 머무르는 연습생을 포용할 회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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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하게 하셨네요?”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연습생들 사이의 싸움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니까요. 그래도 저 애들한테는 다행인 일이죠. 폭력은 이미 법적으로 처리할 문제니까요. 이렇게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저 아이들에게 회사가 많이 베푼 겁니다.”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입에 든 얼음을 와작 깨물며 대답한 진 실장은 이어 단유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 그리고 고맙습니다. 시율이 설득해 주셔서.”
“나윤 씨가 한 겁니다.”
“이사님이 나서주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나윤 씨에게도 감사하다는 인사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역시 선배라는 생각이 드네요. 연습생들의 마음을 잘 아니까 그렇게 잘 보듬어 줬던 거겠죠.”
“윤시율 연습생은 잘 하고 있습니까?”
“전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기력도 차린 것 같고, 가끔 보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듯 해요.”
진 실장은 코끝을 긁적였다.
“역시 멘탈 관리라는 게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죠. 좁은 연습실과 숙소만 오가는 일상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아무리 꿈이 있고, 그 꿈을 향해 달릴 의지가 있다 해도 말이죠.”
“네.”
“중고딩 때 많이들 느끼잖아요? 답답하고 일탈하고픈 욕구. 아마 지금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겁니다.”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스를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요즘 냉장고에 보관되는 오렌지 주스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열심히 마신 탓도 있지만, 오렌지 주스를 공급하던 공급자들 중에 몇몇이 마음을 돌린 듯 했다. 마음을 돌린 것인지, 자금이 여유롭지 않은 탓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 말 쯤이면 냉장고는 전과 같이 텅텅 비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쁘진 않다. 빚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지금 생각난 건데, 언제 한 번 이사님께서 아이들한테 강연 한 번 하는 건 어떨까요?”
“강연이요?”
“이런 이야기하면 또 저희 팀장님한테 깨질지도 모르겠지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