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12화 (912/956)

결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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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대가리는 왜 달고 다녀? 눈은 어디다 두고? 위 아래 구별 못해?”

“죄송합니다.”

진 실장은 목에서 치밀어오르는 변명들을 꾸역꾸역 누르며 사과했다. 사실 할 말은 많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힐난 사이에 입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터질 듯한 얼굴로 폭풍 래핑을 하는 팀장의 화를 몇 마디 변명으로 섣부르게 잠재우려다 도리어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사님이랑 통성명 좀 했다고 네 친구처럼 보였어? 응? 나중엔 대표님이랑도 야자 까겠다? 응?”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죄송할 짓을 왜 해!”

딱히 복잡한 사정이 있어 죄송할 짓을 한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단유를 곁에서 관찰할 기회를 자주 얻었던 진 실장은, 단유가 연습생들과 크게 벽을 쌓지 않고 친밀하게 교류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또 단유의 평범치 않은 관찰력과 통찰력, 그리고 진심을 헤아릴 줄 아는 배려심을 엿보았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근엄함과 진중함이 배어있는 대화는 상대로부터 신뢰를 느끼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평가다. 하지만 진 실장은 단유기 때문에 자신이 하지 못하는 설득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란 기대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부탁을 했다.

그런 생각을 지금 팀장에게는 할 수 없다. 나중에 팀장이 화를 누르고 진정한 뒤라면 고려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털어놓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지금 진 실장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바로 남자 숙소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기에 단유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거니와, 아직 팀장에게도 보고하지 못했다. 시율의 문제를 전날 오전에 보고 했었기에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보고하고 이후 남자 숙소에서 보게 된 난투극에 대해 말하려 했다. 하지만 보고 중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팀장의 폭주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어 난감한 처지다. 난투극까지 보고하게 되면 진 실장은 오늘 하루 종일 팀장실에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보고를 안 할 수도 없으니, 일단 말을 꺼내긴 해야 하는데 이걸 언제 꺼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냥 확 지를까.’

불난 집에 기름을 부으면 불은 커지겠지만, 대신 빨리 연소해버리지 않을까?

****

“괜찮습니다. 제가 한 번 만나볼게요.”

“굳이 김 이사가 나설 필요가 있어요?”

“제가 나서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연습생들 문제는 신인팀에서 맡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진 실장님이 부탁하셨고 그걸 수락했기에 하려는 것도 있지만, 전부터 연습생들이랑 밥도 같이 먹으며 이야기도 나누면서 친해진 것도 있으니 그냥 모른 척 지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 그렇다면 부탁드리죠.”

대훈은 보고 있던 연습생 프로필 파일을 덮은 뒤 단유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김 이사님.”

“네.”

“이건 대표니까 하는 말이에요.”

“네.”

“실리적으로, 나가겠다는 연습생을 반드시 설득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한테도 대충 들었습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하다고.”

“시율이라는 연습생의 평가가 좋다는 건 여러 건의 보고를 통해 익히 아는 바지만, 굳이 마음이 떠난 연습생을 잡는 건 회사로서 이익이냐 하면 쉽게 대답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그리고 회사가 한 연습생에게 너무 신경 쓴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른 연습생들에게 차별감을 느끼게 할 우려가 있어요.”

“조심할게요.”

“조심하란 이야기는 아니에요.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말란 이야기입니다. 물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시율이가 마음을 돌려서 회사에 남겠다고 하면 좋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이야깁니다.”

추측이지만, 대훈뿐 아니라 회사 내 누구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그들이 보기에도 현재 여자 연습생들은 데뷔가 임박한 것도 아니고 여자 연습생들을 주축으로 한 데뷔조를 결성할 시기가 되었을 땐 새로운 연습생이 들어올 수도 있고 하니 당장에는 퇴사를 결정한 연습생이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하긴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인데 오죽할까.

****

퇴사를 결심한 뒤, 바로 짐을 뺄 생각이었던 시율이었지만 진 실장이 며칠만 더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라며 한 제안을 받아들인 까닭에 숙소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대신 언제라도 나갈 수 있게 사복이나 개인 물품들은 모두 정리해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간단한 화장품 몇 가지와 언제라도 구겨 넣을 수 있는 옷 정도만이 숙소 행거에 걸려 있었다.

레슨도 빠졌다. 딱히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고, 오히려 데뷔가 간절한 편인 시율에겐 매 시간이 소중하지만 시간은 돈이고, 레슨 타임은 돈에 돈이 더 붙는다. 더 이상 회사로부터 갚을 길 없는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레슨에도 빠지고 숙소에 남았다.

숙소를 나가던 친구, 언니, 동생들을 밝은 미소로 배웅한 뒤, 텅빈 숙소를 바라보다 청소기를 집었다.

순번을 정해서 청소를 하고는 있지만, 연습에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제대로 청소를 할 리가 없었다.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청소기를 돌렸다. 걸레를 씻어 구석구석까지 닦아냈다. 이렇게 더러웠던가 새삼 놀랄 정도였다. 세면대와 거울, 변기까지 광이 나도록 청소했다. 그랬더니 오전이 다 지나가버렸다.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며 냉장고를 열었는데 샐러드가 눈에 들어왔다. 식욕이 떨어졌다. 결국 물 두 컵으로 배를 채우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창 밖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목에서 땀이 흘렀다.

무슨 꿈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허우적대다가 눈을 떴을 땐 해가 이미 한참 기울어 있었다. 하루가 이리도 길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이 긴 시간을 아무것도 못하고 보냈다는 것이 억울하고 한심하고 안타까웠다.

각 방에 들어가 동료들의 침대 시트를 정리해주고 행거에 걸린 옷들도 괜히 정리해 보지만 시간이 멈춘 것인지 창 밖의 해는 여전히 같은 위치였다. 그나마 시계의 시간이 아까와 다르다는 것이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그때, 도어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누군가 올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 깜짝 놀란 시율이 고갤 돌리니 저절로 켜진 인터폰 스크린에 낯익은 얼굴이 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어? 안녕하세요?”

다급히 달려나가 문을 열고 인사를 하던 시율은 단유의 곁에 선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하고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안녕? 우리 전에 봤었죠?”

“네, 선배님.”

“들어가도 돼요?”

나윤이 생글생글 웃으며 묻자, 시율은 얼른 물러서며 공간을 마련했다.

“들어오세요.”

“고마워요.”

단유는 나윤의 뒤를 따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기 금남의 집 아니에요? 김 이사님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나?”

놀리듯 묻는 나윤의 말에 시율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이사님이신데, 괜찮아요.”

“이사님 놀리려고 한 말인데, 시율 씨가 당황하네. 죄송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혹시 물 있어요? 목이 되게 마른데.”

“어, 얼른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요.”

시율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단유는 거실 소파에 천천히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이 되게 깨끗하네요?”

나윤의 밝은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 썰렁하기만 하던 집 안에 생기가 도는 기분, 이라고 느끼며 시율은 대답했다.

“청소를 했거든요, 오전에.”

“어머?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나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시간이 남아서요.”

“되게 부지런하구나, 시율 씨.”

나윤에게 차가운 물컵을 건네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저 별로 안 부지런해요.”

“보니까 대청소를 한 거 같은데, 되게 힘들었겠다. 집이 넓어서. 게으른 사람은 못 해요, 이런 청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며 쭈뼛대는 시율의 모습이 귀여운지 나윤은 생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내가 집 주인도 아닌데, 계속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요.”

그렇게 마주 앉은 세 사람. 단유와 나윤, 이 두 사람이 왜 우리 숙소에 왔을까란 생각부터, 어떻게 저런 조합이 만들어 졌을까란 호기심까지 머릿속이 복잡한 시율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윤은 숙소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단체 합숙을 하면서 힘든 것은 없는지 등등.

그다지 어려운 질문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시율이었지만 대답은 꼬박꼬박 잘했다.

“진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네.”

해가 많이 떨어져서 실내가 많이 어두워졌다. 시율의 얼굴에도 그늘이 깊게 드리웠다.

혼자 집에 있었기에 딱히 불을 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단유는 습관처럼 ‘불 켜’라고 말하려다 이곳엔 음성 인식 시스템이 없다는 걸 떠올리며 거실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딸칵, 불이 켜졌다.

“빨리 데뷔하고 싶죠?”

나윤은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워낙 나긋나긋한 말투라 공격적으로 들리진 않았다.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의 목소리라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제가 예전에 가수 데뷔했던 건 알죠?”

“네, 알아요. 뮤직비디오도 봤는걸요.”

나윤은 고개를 기울여 단유를 바라보았다.

“우리 회사에 그 뮤직 비디오 안 본 사람이 있기는 할까?”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가 회사에 영입되기 한참 전에, 모종의 이유(?)로 그 뮤직비디오가 회사 내를 휩쓸었다는 사실은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저도 지금 시율 씨가 걷고 있는 길을 한 번 걸어본 선배의 입장에서 시율 씨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조바심나는지 알아요. 정말요.”

대화하는 내내 바닥 어딘가를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던 시율이 처음으로 고갤 들고 나윤과 시선을 맞췄다.

“사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해요. 왜냐하면 난 가수로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니까요.”

나윤의 말이 끝나고 단유가 첨언했다.

“데뷔곡이 음원차트 10위에 겨우 오르긴 했었지.”

나윤이 눈을 흘겼다.

“그래도 시율 씨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본 경험자로서 한 마디 하자면, 만약 시율 씨가 정말로 데뷔해서 성공을 하고 싶다면, 이 회사에서 꾸준히 레슨을 받는 게 시율 씨한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요. 그냥 우리 회사니까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회사라고 하니까 우습네. 사실 나보다 시율 씨가 먼저 회사에 들어왔는데, 그쵸? 아무튼 하던 말 계속하면, 데뷔가 목표라면 어느 회사를 가도 상관 없을지 몰라요. 데뷔만이 목표라면. 하지만 소속사의 힘은 데뷔 이후에 나타난다고 봐야 해요.”

“저도 알아요.”

“하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연습생이라도 회사 생활 1년을 하면 대충 주워듣는 것도 있으니까 모르진 않을 거예요. 그런 점에 우리 회사, 꽤 유능한 회사일지 몰라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지도 않고, 나름 체계적이고 서포팅도 잘 해주니까. 사실 신인 가수팀에게 서포팅은 엄청나게 중요해요. 가수 본인의 실력과 상관없이 회사가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주느냐가 개인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윤의 모습에 시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율 씨는 아직 가능성이 많아요. 오히려 지금 서두르다가보면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어요. 차라리 지금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실력을 기르는 게 진짜 성공의 밑거름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인내심을 갖고 실력을 기르자. 나머지는 회사에서 모두 지원을 해 줄 것이며 D&D라는 회사는 그런 지원에 있어 충분히 만족할 만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라는 게 나윤의 주장의 요지, 였지만 말을 끝맺을 찰나 단유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지금 생각한 결심대로 행동하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시율과 나윤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어쩌면 시율 씨는 지금 선택지 앞에서 갈등하는 중일 겁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자신의 삶에 이익이 될지, 자신의 꿈에 도움이 될지를 계산하면서 말이죠. 엄밀히 말해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에요. 조금 전에 회사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지만, 다른 회사도 비슷한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까, 이왕이면 빨리 데뷔도 할 수 있고 지원도 든든하게 해 줄 회사를 찾는 것도 좋겠죠.”

나윤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단유를 바라보았지만, 단유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요. 어떤 선택이든 후회는 남습니다. 후회없는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기왕이면 후회가 적은 쪽으로 하겠다? 후회가 적을지 많을지는 선택 전엔 모르는 겁니다. 선택 후엔? 그래도 모릅니다. 사람은 한 번의 선택으로 한 번의 삶만을 사니까요.”

“그럼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요? 이사님?”

반쯤 입을 벌리고 단유를 바라보는 시율 대신 나윤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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