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09화 (909/956)

결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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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공기가 짓누르고 있는 녹음실 부스. 모니터링 창 너머로 굳은 얼굴의 창모가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지만, 옆에 앉은 엔지니어와 계속해서 뭔갈 이야기하는 중인 듯 하다. 얼마나 심각한 토론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녹음실 안에 지아가 기다리고 있음을 잊은 듯 보였다.

건반 앞에 앉은 지아는 창모로부터 다른 지시가 올 때까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다렸다. 단지 심심해서라기보다는 혹시라도 손이 굳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다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지아 씨.”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에 지아는 움찔하며 반응했다.

“네?”

“일단 전주만 가 볼게요.”

“8마디만 가나요?”

“네.”

엔지니어의 사무적인 대답을 확인하며 바라보니 창모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뭔가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아마도 지금 가녹음할 곡의 악보를 살피는 중인 듯 한데,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

엔지니어가 지아에게 오케이 싸인을 보낸 후, 창모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은데?”

“괜찮아요? 난 계속 뭐가 걸려.”

“뭐가?”

“좀 지루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임팩트가 없어요.”

“이펙트로 베리에이션을 좀 주는 건 어때?”

“앞부분은 약간 어쿠스틱하게 가는 편이 깔끔하지 않을까 해서요. 시작부터 이펙트를 쓰면 너무 지저분한 느낌이 들 것 같고.”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로 악상을 떠올려봐도 뭔가 신선하고 한 방있는 곡조가 나오질 않는다.

“그럼 생각하는 동안 쟤 좀 나오라고 해.”

“응?”

“지아 말이야. 벌써 3시간 째 저 안에서 벌서고 있다.”

엔지니어의 말에 창모가 고개를 들자, 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부스창 너머의 지아와 눈이 마주쳤다. 창모는 얼른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댔다.

“나와도 돼, 지아야.”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당히 알아서 나올 것이지, 미련하게 왜 그러고 있었어?”

창모가 반쯤은 미안하다는 투로 물었더니, 엔지니어가 창모를 타박했다.

“사수가 허락을 안 하는데, 부사수가 마음대로 피엑스 갈 수 있냐?”

“여기가 군댑니까?”

“군대나 다름없지 뭐.”

창모는 고개를 흔들며 지아에게 말했다.

“좀 쉬다 와.”

“선배님도 쉬셔야 하지 않아요?”

“난 괜찮아. 너 쉬는 동안 나도 쉬는 건데.”

“그럼, 뭐 마실 거라도 가져 올까요?”

“됐어. 여기 정수기도 있는데.”

악보 옆에 굴러다니는 펜 뚜껑을 입술에 물고 잘근거리는 창모. 지켜보던 엔지니어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내 입은 입도 아니냐?”

“그럼 형도 나갔다 오세요.”

“널 두고 어딜 가냐.”

“제가 가져 올게요. 뭐 드실래요?”

지아의 물음에 엔지니어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믹스 커피 주문해도 될까?”

“형이 직접 가서 마셔. 왜 애를 시키고 그래?”

“아니에요. 두 분 고생하시는데 제가 타올게요.”

지아가 녹음실을 나간 후,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창모는 식탐 많은 갓난아이처럼 플라스틱 뚜껑을 요리조리 깨물며 생각에 빠져있고, 엔지니어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조금 전 녹음했던 트랙들의 싱크를 맞추고 있었다.

“창모야.”

“···예?”

엔지니어의 부름에도 창모의 시선은 악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솔직히 말해봐.”

“뭘요?”

입술에 물고 있던 펜 뚜껑 때문에 새는 발음이 나왔지만 엔지니어는 개의치 않았다.

“너 이거 하기 싫지?”

“······.”

창모는 천천히 입술에서 펜뚜껑을 빼냈다. 에이 더럽게, 라며 엔지니어가 휴지를 건넸지만 창모는 받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는 작업이었으면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리가 없지. 트랙을 갈아 엎든, 이펙트로 떡칠을 하든, 아니면 직접 연주를 하든 뭐든 했을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하는 척만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너랑 한두 번 작업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모를 것 같냐는 엔지니어의 말에 창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우선은 이미지가 딱 떠올라야 하는데 모든 게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 같은 느낌?”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소리네?”

“모르죠. 시간이 더 주어지면 해낼 수 있을지도. 그런데 아마 시간이 더 있어도 딱히 마음에 드는 곡은 못 쓸 거 같아요. 이런 방식이라면.”

펜으로 악보 위에 의미 없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렸다. 겹쳐지는 동그라미 속에 음표가 묻히고 코드가 사라지고 오선이 지워진다.

“완벽이란 컨셉에 어울리는 곡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그건 컨셉일 뿐이잖아?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있어?”

“형 생각은 어떤 건데요?”

“넌 작곡가야. 작곡가가 뭔데? 곡 쓰는 사람이잖아? 넌 그냥 곡만 써. 괜찮은 곡. 거기까지가 네가 할 일이지, 거기에 무대랑 안무랑 그런 거까지 다 계산할 셈이야? 곡만 쓰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

“완벽한 곡을 써달라잖아요.”

“완벽이라는 컨셉에 어울리는 곡을 써달라고 했던 거지, 완벽한 곡을 써달란 건 아니었을걸?”

“······.”

“자, 들어봐. 이건 그냥 비윤데, 만약 내가 좋은 곡 하나를 집에서 듣고 싶어. 5.6MHz 무손실 음원을 구해서 듣는다고 가정할게. 그 음원을 아무데서나 재생시킨다고 과연 완벽한 청취가 가능하겠어? 불가능하잖아? 그것을 아무런 손실 없이 재생시킬 수 있는 기기가 필요하고, 그에 맞는 앰프랑 스피커도 갖춰야 제대로 청취가 가능하겠지? 그뿐일까? 케이블도 내 취향에 맞게 무산소 동선 케이블을 사용하고, 소리의 반향까지 신경 쓴 오디오룸을 구축한 뒤에 감상해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말하자면, 완벽한 노래란 단지 곡만 좋다고 완벽하다는 게 아니란 소리야. 아이돌 노래잖아? 노래와 안무, 의상, 무대에 외모, 목소리, 이런 게 다 합쳐져야 완벽하지. 그러니까 너 혼자 완벽한 곡을 만들겠다고 애 쓰지마. 넌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만들고 나머진 다른 파트 사람들에게 맡겨.”

모처럼 형 노릇 한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창모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엔지니어를 바라보던 창모가 피식 웃었다.

“홀가분해졌어?”

“아뇨, 그게 아니라···형이 조금 웃겨서요.”

“뭐가?”

“제가 그걸 모를 거 같아요?”

“응?”

“다 알아요, 그 정도는. 그런데 형 말마따나 아무리 좋은 장비와 좋은 오디오 시설을 가지고 있어도 음원이 좋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그렇죠? 결국 가수가 무대에서 하는 일의 본질은 노래란 말이죠. 팬들이 상시 무대 앞에 대기하면서 가수의 퍼포먼스를 볼 것도 아니니,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곡이잖아요. 곡이 좋아야 나머지도 살아나는 거고.”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하는 일은 결코 대충할 수 없는 일인 거예요. 곡 자체로도 오롯이 완벽하다 할 정도의, 누가 들어도 와 하고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의 곡이 뽑혀야 하는 거라고요.”

작곡가로서는 매우 훌륭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긍심과 자부심이 매우 높으니 자신의 작업을 허투루 할 수 없다는 가치관은 본받아 마땅하다.

“그래도 고맙네. 형이 이렇게라도 한 마디 해주니까 마음이 좀 가벼워진 느낌이에요. 고마워요.”

“웃겼다는 소리지?”

“웃긴 것도 조금 있고.”

“됐다, 관두자. 내가 무슨 오지랖을 부린 건지.”

엔지니어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뒤를 돌아봤다.

“얘는 애 아직 안 와?”

“쉬라고 보냈는데 벌써 오면 안 되죠. 그러게 커피가 마시고 싶었으면 직접 가서 마시라니까.”

눈을 찌푸리며 창모를 바라보던 오지랖 넓은 엔지니어는 툴툴거리듯 말했다.

“마, 낙서 그만하고 새 종이 꺼내 써. 뭐야, 그게.”

어느새 창모의 손 아래 깔려있던 악보, 였던 종이는 새까만 낙서로 뒤덮인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

원두커피도 있고, 에스프레소도 있지만, 믹스커피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기에 찬장 한편에는 항상 뜯지 않은 믹스커피 박스가 쌓여 있었다. 보통은 온수기 옆에 믹스 커피 한 박스가 뜯어져 쓸 수 있게 해놓는데, 마침 믹스커피를 타려고 찾아보니 박스가 비워져 있었다.

지아는 찬장을 열고 박스를 꺼내려 하는데, 이게 참 난감하게도, 지아가 팔을 쭉 뻗어 박스를 꺼내려 할 때 옆의 박스까지 건드렸던지 찬장에 쌓아두었던 다른 것들이 모조리 쏟아 내리려 했다.

“어, 어?”

허둥대며 떨어지는 것을 막아보려는데, 그 순간 하얀 손 하나가 지아의 머리 위로 뻗어 나와 마침 떨어지기 직전이던 박스들을 붙잡았다.

지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고맙···습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는, 오랜만에 마주친 단유였다.

“딱히 인사를 받으려 했던 건 아니지만, 고마워해도 돼요.”

“네?”

“고마워해도 되는지 물어보는 줄 알고 답한 건데, 됐어요. 신경 쓰지 마요.”

단유는 지아의 옆으로 한걸음 비켜서 주며 지아가 꺼내려 했던 박스를 하나 집어 건넸다.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박스를 들고 우물쭈물하던 지아는 곧 돌아섰다. 온수기 옆에 들고 온 박스를 두고, 박스 아래를 뜯어 믹스커피 한 봉을 집은 뒤 흔들었다. 그리고 단유를 곁눈질하며 컵에 커피가루를 붓고 온수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 사이 단유는 냉장고 문을 열고 오렌지 주스 하나를 집고 뚜껑을 땄다.

“마셔볼래요?”

“아뇨, 괜찮아요.”

“여기 많으니까 먹고 싶으면 먹어요.”

“괜찮아요.”

단유는 줄어들지 않는 냉장고 속 오렌지 주스들을 보며 속으려 혀를 찬 뒤, 냉장고 문을 닫았다. 돌아서니 지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스푼으로 커피를 휘휘 젓고 있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단유. 그리고 단유가 지켜보고 있음이 느껴지는지 고개를 들 수 없는 지아. 묘한 대치 정국을 깨뜨린 건 새로이 휴게실로 들어오던 이의 목소리였다.

“어, 여기 있었네?”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본 지아는 황급히 하던 걸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대훈은 손을 살짝 들어 인사를 받아주고 단유를 향해 물었다.

“식사했어요?”

“아까 먹었죠. 저 찾으셨어요?”

“마침 오늘 점심 약속이 없어서 오랜만에 같이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하고 갔더니 이미 나갔더라고요.”

“오전 업무가 일찍 끝나서 직원들 식사하라고 보낸 김에 같이 나왔습니다.”

“그랬군요. 직원들이랑 같이 식사했던 거예요?”

“아뇨, 전 다른 사람이랑 먹었고요.”

“다른 사람?”

“나윤 씨랑 액터클래스 연습생들이랑 같이 식사했어요.”

“아, 그래요? 잘했어요. 역시 우리 연습생들 제일 잘 챙겨주는 건 단유 씨 뿐이네요.”

“그럴 리가요. 우연히 마주친 김에 같이 갔던 것 뿐인데.”

“이러니까 단유 씨가 사내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거겠지. 나도 앞으로는 식사 약속 없을 때 연습생들 데리고 다녀야겠어요.”

“대표님이 끼시면 소화가 안 될 걸요?”

“아, 그런가? ···그 말인즉슨, 나는 안 되지만 김 이사는 된다는 소리네?”

“오렌지 주스 하나 드실래요?”

“됐어요. 전 커피나 마실게요.”

‘커피’란 말에 반응한 지아가 조금 전까지 젓고 있던 커피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이거 드실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제 건 제가 타 먹어야죠. 부하직원들 부려먹으면 저기 서서 지켜보는 김 이사한테 욕 먹을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전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니까.”

“아, 네.”

“요즘 일은 어때요. 할만해요?”

“네, 괜찮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요즘 작곡팀도 정신없죠?”

“네, 뭐, 조금.”

지아는 답을 하면서도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작곡팀이 바쁘긴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직 거기에 낄 정도의 경력이나 실력이 부족해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조금 전처럼 녹음실에서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앉아만 있어야 하는 일이라도 하는 게 오히려 편했다.

“그래요. 작곡팀 수고하는 건 잘 아니까 끝까지 수고해줘요.”

“네.···저 그럼 전 이만.”

“그래요, 일 보세요.”

지아는 대훈과 단유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휴게실을 나갔다.

“뭐 하실 말이라도 있으셨어요?”

“아뇨, 할 말은 무슨. 그보다는 그냥 단유 씨랑 이렇게 담소나 나눌까 해서죠. 생각해보니까 단유 씨랑 이야기를 하면 괜히 사람이 여유로워진달까? 그런 느낌이더라고요.”

단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유 씨는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가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일은 똑부러지게 하고. 마치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런 태도 때문인지 단유 씨랑 이야기를 나누면 진짜 어려운 고민 같은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왠지 풀리지 않는 문제도 척척 답을 내놓을 것만 같고. 단유 씨가 그랬잖아요? 여유를 가지라고. 나 혼자 여유 찾겠다고 동분서주하는 것보단 그냥 단유 씨랑 이렇게 담소를 나누고 있으면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물어볼 게 있는데, 그 여유의 비결이 뭡니까?”

“오렌지 주스 드실래요?”

“그게 비결이에요?”

“이 오렌지 주스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저도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요즘 이것 때문에 꽤 강박적으로 변하는 것 같거든요.”

“그래요, 그럼 하나 줘봐요. 우리 김 이사 여유 찾게 도와줘야지.”

두 사람은 오렌지 주스 한 병 씩을 따서 여유롭게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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