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08화 (908/956)

결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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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서류 한 장을 던져 주고 하반기 실적 향상을 위한 기획안 하나 써 봐, 라고 한다면 그건 시험이 아니라 괴롭힘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에게 쪽지 시험으로 중력 가속도 공식을 증명하라고 하면 그건 학업 성취도 평가를 위함이 아니라 학생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기 위한 모략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처음 필드에 선 아마추어에게 500야드 파5홀에서 앨버트로스를 주문한다면? 기계 체조 입문자에게 태양의 서커스 영상을 보여주고 따라해 보라고 시킨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고 말할 순 없다. 입사 이전에 회사에 대한 정성과 관심이 넘칠 정도였고, 시장 구조와 회사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이해할 뿐 아니라 범인은 흉내조차 못 낼 엄청난 통찰력을 지닌 직원이라면 혹시 해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보였고, 독학으로 대학 입시 수준의 학문을 쌓았던 학생이면서, 마침 뉴튼과 아인슈타인을 존경하여 그들의 학문적 업적들을 달달 외울 정도로 깊이 빠져 있던 새내기 중학생이라면 혹시 풀어낼지도 모르겠다.

억분의 일 확률로 존재한다는 피지컬 재능을 보유한 아마추어라면 수십 년 경력 프로들이 깜짝 놀랄 만한 감각과 힘으로, 거기에 미친 운까지 따라준다면 앨버트로스가 가능할 수도 있다.

한 번 보고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의 기억력과 엄청난 바디 컨트롤 능력을 보유한 강심장의 체조 입문자라면 무리해서라도 흉내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가능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일컬어 ‘천재’라 불러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천재’란 소리를 들음에 하등의 문제가 없을 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재는 보기 힘들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천재가 아니란 것이다.

“천재가 아닌 사람들에게 천재나 가능할 법한 일들을 주문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나윤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명의 풍속화 화가가 그린 군상들마냥 하나같이 난감한 낯빛을 하고 있다.

“화가 나지 않을까요? 안 될 걸 알면서 시키는 거잖아요?”

“하지만 시키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들이라면?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지하게 주문한다면?”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그럼 경빈이 넌 못 하겠다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있겠어?”

“전 그럴 거예요.”

“그렇구나. 용기 있네. 근표는?”

“전, 우선 대답은 할 거예요.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제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예요.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지만 안 됐다, 라는 걸 보여줘야 저에 대해 실망을 하지 않을 거 같아요.”

“오오, 근표. 생각이 깊네?”

나윤의 칭찬에 쑥스럽다는 볼을 붉히면서도 히죽거리는 근표였다.

“자, 들어봐. 경빈이 말도 맞고, 근표 말도 맞아. 처음에 말했듯이 누가 봐도 무리다 싶은 걸 요구한다면 당연히 거기에 대해 손을 들고 지적하는 게 맞아. 불의에 맞서는 거잖아? 그치? 하지만 잘 봐, 경빈아. 만약에 실장님이 너한테 내일까지 영화 대본 하나를 통째로 외워오라고 시켰어. 어떡할래?”

“대본이요?”

“자기가 맡은 배역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대사와 지문까지 모두 외워오라고 했어. 거기다 자기가 맡은 배역에 대한 연구까지 해오라고 시켜. 그 앞에서 넌 안 된다고 반항할 거야?”

“······.”

“할 수 있어?”

“···아니요.”

“못 할 거 같애?”

“모르겠어요.”

경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민을 바라보고, 보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아름에게로 토스. 아름은 달리 제스쳐를 취하진 않았으나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아니면 지금은 말을 꺼낼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나윤이 주도하는 대화를 경청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다 하는 사람 손?”

나윤이 남자 연습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지만, 그들도 대답이 조심스러운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

“어려울 거야. 지금 너희들 레슨 때 연습용으로 받아 보는 대본도 달달 외우려면 몇 시간 걸리지? 그런데 영화 대본을 통째로 외운다? 사실 그건 아무도 못 해. 직접 쓴 작가도 기억 못 할걸? 대충 맥락은 알아도 대사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를 모두 기억하진 못한다고. 그런데 만약 실장님이 시킨다면 어떡할 거야? 난감하지? 그래서 근표처럼 행동하는 게 좋을 수도 있는 거야. 해 보겠습니다, 당당하게 말하고, 대본 들고 가는 거지. 그리고 다음 날 숙제 검사받듯이 실장님 앞에 서서는 말이지, 응? 근표야. 이럴 때 어떻게 말할래?”

근표에게서 즉시 대답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다 외우진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겠죠.”

“근표 넌 참 바른 아이 같애. 근데 있잖아? 그때 실장님이 너한테 이렇게 말하면? 흠흠, 너. 어제는 할 수 있다며? 할 수 있다고 말했잖아? 그럼 어제 너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나윤의 모습이 단유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이는데, 마주한 근표는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니, 그게 거짓말이 아니고요···.”

“아니면? 왜 어제는 할 수 있다고 해놓고선 안 했는데? 나 무시하는 거야?”

그녀를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참 오랜만이다 싶다. 다시 만난 나윤에게서는 귀여움보단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겼었으니까. 어른스러워졌고, 생각도 깊어져서 가끔 단유를 놀라게 하기도 했었으니까. 지금도 그녀가 연습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언니, 누나의 느낌보다는 젊은 선생님 같은 분위기다.

“······.”

“물론! 너희 담당하는 실장님이 그렇게 악독한 짓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성격이 나쁘신 분도 아니니까 지금 내가 한 것처럼은 안 할 거야. 그렇지?”

“네.”

“어라? 대답이 시원치 않다? 혹시 불만 있었던 거야?”

“아니요. 없어요.”

“농담이야. 심각하게 반응하지 마. 그런데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이렇게 느낄 때 있었어, 없었어?”

없다면 거짓말이다. 고작 하루 배워놓고 다음 날 평가한다고 줄 세워서 1대 1로 안무 평가를 받은 적도 있었고, 익숙하지 않은 발성이 고작 몇 번의 연습으로 될 리 만무한데 왜 이렇게 못하냐고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다들 그런 경험 있을 거야. 그렇지? 자, 들어봐. 나도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해봤다고.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돌아오거든. 안 되는 걸 되게 하라고도 하고, 막 소리지르고 압박하면 되는 줄로 아는 사람도 있더라고. 그런데 있잖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우린 천재가 아니잖아?”

나윤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쩐지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난감해하는 와중에도 나윤이 풀어나가는 주제가 흥미로운지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을 몰래 감상하는 재미는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으니, 단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장님이나 선생님 앞에서 난 천재가 아니니까 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할 수 없어. 또 할 수 있다고 말해놓고 지키지 못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긴. 혼이 나야지.”

“에이. 그게 뭐예요.”

뭔가 대단한 답이라도 기대했던 아이들에게서 실망스럽다는 듯한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왔다.

“못하면 혼이 나야지. 할 수 없으면 혼이 나야지. 그게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방식인 거야. 그걸 인정하잖아? 그럼 스트레스를 덜 받아. 혼나고 깨지고 또 혼나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신기하게 그렇게 혼나고 깨지기를 반복하면 어느새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결국은 해내게 돼.”

물론 시간은 조금 많이 걸릴 거라며 검지 손가락을 슬쩍 들어 올려 보이는 나윤. 단유가 슬쩍 팔꿈치로 툭 쳤더니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지는 그거야. 연습생 여러분들? 앞으로 남은 시간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이 여러분들을 기다릴지 가늠도 안 되죠? 가늠도 못 해요. 그 시간 동안 연습실에서 여러분들이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들. 때로는 이게 될까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이건 절대 안 돼,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을 거예요. 하기 싫으면 때려치우란 잔소리도 들을 것이고, 혹은 스스로 그만둘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여러분은 천재가 아니에요. 근데 또 그거 알아요? 다른 연습생들도 천재가 아니에요. 진짜 천재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정말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정도고, 사실 그런 천재는 여러분의 경쟁 상대도 아니란 말이죠. 무슨 말이냐.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고 평범한 방식으로 각자의 미래를 준비하는 거예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거. 혼날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을 거예요. 그럴 수 있어요. 천재가 아닌 이상은 그럴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앞으로 힘들 때, 도저히 못하겠다 싶을 때 스스로에게 말해줘요. 나는 천재가 아니다. 나는 평범하다.”

나윤이 미성의 톤으로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모습이 마치 라디오 디제이를 보는 기분이다. 원래 이렇게 다양한 색을 가졌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어른이 되면서 색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정말 기억해야 할 한가지. 평범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무기가 하나 있어요. 뭘까요?”

“노력하는 거요.”

“그렇지. 역시 아름 씨가 뭘 좀 아네. 언니라서 그런가? 맞아요. 노력하는 거예요. 열정을 노력으로 바꾸라는 말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도 아니에요. 단지 노력은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말이에요. 아시겠죠? 미래의 스타분들?”

만약 노력하지 않는다면?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삶도 없다.

****

“나 아줌마 같았지?”

“아니.”

“나이가 드니까 말이야. 저절로 아줌마가 되는 거 같애. 아무나 붙잡고 수다 떨고 싶어지고, 한 번 수다를 떨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러다가 정말 나중에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뜨는 거 아닐까 몰라.”

“입이라면 뜨면 익사는 면하겠네.”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마침 버스가 우르릉 울면서 앞을 지나갔다. 나윤이 손바닥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버스를 바라보니 얼마 안가 정류장에 멈추며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니 고작 저기서 멈출 거면서 왜 그렇게 빨리 달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느리면 승객들이 화를 내니까.”

“급하게 서두르다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지려고?”

“그게 딜레마지. 평범한 운전기사의 딜레마.”

“응?”

“천재적인 모터스포츠 선수의 감각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버스 운전기사의 딜레마. 승객의 안전을 위해 천천히 달려야 하지만, 예정된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도착해야만 하는 까닭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딜레마.”

“혹시 아까 내가 했던 이야기에 대한 대답인 거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방식은 노력이지. 하지만 노력만 해서 되는 세상이었다면 누구도 무리하게 시키진 않을 거야. 하지만 1등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학교를 졸업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진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회사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가 천재가 아니란 걸 알기에 포기할 수 없는 거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경쟁하고 싸우지.”

“맞는 말이네.”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사는 법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좀 더 좋은 위치에 설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늘 선택지에 놓이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가. 딜레마는 사람을 끝없는 고민과 시험에 들게 하지.”

“너도 그랬어?”

“음. 뭐 비슷해.”

“아닐 거 같은데.”

“왜?”

“넌 천재잖아?”

“아닌데?”

“너 고등학교 때도 계속 전교 1등 했었지? 대학은 서울대 가고. 천재네?”

“전교 1등에 서울대 간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어.”

“너 영화 대본 하루 만에 다 외울 수 있지?”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너 책 한 권도 외우잖아? 예전에 너 번역회사에서 받아온 책 달달 외우는 걸 내가 봤었는데?”

“그랬던가?”

“너 골프 쳐 본 적 있어?”

“아니.”

“넌 아마 앨버트로스도 곧잘 해낼걸. 천재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과연 말이 안 되는 소리일까?”

뒷짐을 진 나윤은 싱글벙글 웃으며 경쾌한 걸음으로 단유를 앞서 나갔다. 단유는 고개를 흔들며 그 뒤를 따라갔다.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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