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04화 (904/956)

내부자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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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예, 신고 좀 하려고요. 저희 집에 도둑이 들어서요. 도난품이요? 잠시만요. 음, 살펴보니까 일단 노트북이랑 태블릿, 여성용 손목시계, 콘덴서 마이크 같은 게 가방에 들어있고요. 그것 말고는 달리 가져갈 게 없었나 보네요. 가방이요? 아, 지금 도둑이 들고 있던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고 말씀드리는 거였어요. 도둑이요? 지금 옆에 있어요. 네. 아뇨, 도망가기 전에 잡아뒀고요, 거실에 눕혀둔 상태예요. 아뇨,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고요, 그냥 잡아만 뒀어요. 네. 그냥 오셔서 데려가시면 될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단유는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도둑을 힐끔 바라보았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내의 복장을 보니 도둑질도 쉬운 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운 날씨에도 검은색 긴소매를 입고 가방을 멘 채 짧은 시간 빠르게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할까? 옆에 굴러다니는 모자를 집어 사내의 머리맡에 두고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집안을 돌아다닌 흔적들이 거실과 방 곳곳에 남아 있었는데 그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거실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를 보면 사내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날 테니 따로 증거가 필요할까 싶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경찰이 와서 조사를 끝낼 때까지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엔 심심해서 TV를 켰다. 우연인지 때마침 방송되는 뉴스에서 휴가철 도둑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도둑이 양성되기라도 하는지, 아니면 소수의 도둑들이 부지런히 전국을 돌며 작업을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오늘 단유의 집에 들어온 도둑은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겠다.

경찰이 올 때까지도 정신을 잃은 채였던 도둑은 경찰의 손이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섰다. 자신의 두 팔을 잡고 있는 경찰을 보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해하다가, 단유를 보고는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마냥 어버버거리며 단유를 손가락질하는 창백해진 도둑. 단유는 덤덤히 손가락질을 받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고, 사내의 외견상 어디에도 상해의 흔적이 없어 일단 경찰들은 도둑을 경찰서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경찰에게 도둑의 행적이 담긴 영상 데이터를 넘긴 후, 조사 결과가 나오면 통보해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돌아선 단유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도둑이 흙발로 헤집어놓은 집안을 마법을 이용해 깔끔히 청소하고 도둑이 뒤진 방과 거실들을 정리했다. 하은이 두고 갔던 손목 시계나 만일에 대비해 구매해뒀던 상미의 마이크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명수가 가끔 올 때 사용하던 노트북을 창고에 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도둑이 이 집을 털려고 마음 먹었을까? 이 동네 자체가 부촌으로 소문난 데다가, 단유의 집이 주위 여느 집들 못지 않게 크고 부티나는 집이니까 도둑의 시선에선 한 탕거리로 적당했을지도 모르겠다. 낮 시간에 빈집임을 눈치챘다면, 더더욱 작업을 하기에 적당했을지도 모르고.

‘당황했으려나?’

다른 집들과 달리 이 집에는 사설 경비 시스템이 달려 있지도 않으니 땡 잡았다는 심정으로 가볍게 들어왔을 것 같다. 슬쩍 복권을 긁었는데 그게 1등이라면? 전자식 도어지만 요즘 기승한다는 도둑에겐 크게 어려움이 없었으리라.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이게 웬걸? 훔칠 게 딱히 보이지 않는다. 낮에 들어온 참이라 무거운 물건을 들고 나갈 수도 없고, 장신구나 돈 되는 것들을 찾으려 하니 텅 빈 옷장과 서랍장이 대부분이다. 허탈했을지도 모르겠다.

심술을 부리고 싶었겠지. 상미의 방에서 마이크 스탠드로 사용하던 봉을 들고 거실로 나와 비싸 보이는 TV를 내리치려는 찰나 단유가 눈앞에 나타났다. 휘두르려다 멈칫하는 스탠드를 붙잡아 뺐는 단유의 모습에 놀라 넘어진 도둑. 그리고 단유는 그에게 깊은 잠을 선사했다. 꿈 속에서 그는 이 집을 벗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을 테지만, 어떤 수를 써도 밖으로 나갈 수 없음에 좌절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긴 누가 이 집에서 첨단(?) 경비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까? 단유가 직접 제작해서 집에 설치한 무단침입 방지 시스템은 단유의 핸드폰과 연결되어 만일 허락받지 않은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올 경우 바로 연락이 오도록 되어 있었으니 그런 시스템에 조예가 없는 도둑은 그저 황당했을 테다.

사실 최초 설치 목적은 도둑을 잡기 위함이 아니라, 상미와 하은 두 사람만 집에 있을 때 혹시 모를 일이 생길까 걱정하여 만들어둔 시스템이었다. 처음부터 이 집의 구입 목적이 상미의 안전과 관련이 있었고, 하은도 단유가 ‘반드시’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이였으니 무단 침입 방지 시스템은 필수였다. 거기에 더해서 약간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음성 명령 시스템도 곁들였으니 간단한 명령어로 거실이나 각 방의 전등을 통제하고 TV나 오디오 등의 온오프를 실행할 수 있게 해뒀다.

지금이야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난 터라 시스템을 설치한 목적이 무의미해졌다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되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텅 빈 냉장고는 도둑의 짓이 아니라 원래부터 비어 있었다. 냉장고 도어 쪽에 붙은 바스켓에 며칠 전 사놓은 냉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냉수를 컵에 따르고 목을 축였다. 차가운 기운이 흘러내리며 더운 열기를 식혔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구나. 이 더운 날, 긴소매를 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느라 꽤 힘들었겠다. 언제 집주인이 돌아올까 몰라 전전긍긍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집 안의 도둑은 이렇게 쉽게 잡는데, 만약 회사에 도둑이 들면 어떻게 잡아야 할까? 회사에도 이런 경비 시스템을 구축해둬야 할까?

단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데 적당히 멈추지 않으면 하루 종일 이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윤이 말했던 정서적 음침함이 이런 것인가 싶다. 아무래도 나가서 사람을 만나야겠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갑자기 이곳으로 온 탓에 사람들은 단유가 여전히 회사에 있는 줄로만 알 것이다. 만약 회사 직원들, 재무팀의 직원들이 자신을 찾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

“이사님 언제 나가셨어요?”

“아까요.”

“전 계속 이사실에 계신 줄 알았는데.”

“저 찾으셨어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혹시 결제할 건이 있나요?”

“죄송합니다. 빨리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에요. 천천히 하세요.”

괜히 부하직원들을 압박하는 상사 노릇을 한 셈이 돼버렸다. 단유는 일부러 느긋하게 사무실을 가로질러 이사실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회사에서 단유를 찾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대훈 아니면 공 이사님. 공 이사님도 최근에는 잘 찾아오지 않는다. 기껏해야 같이 밥이나 먹지 않겠냐며, 그마저도 전화로 먼저 물어오니 재무이사실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훈이야 프로젝트 이후 걸음이 뜸해진 상태고, 결제 서류는 매일 아침 혹은 퇴근 1시간 전에 책상으로 올라오거나, 아니면 인트라넷으로 전송된다. 이사실로 찾아올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

“흠.”

단유는 다시 이사실 문을 열고 나섰다. 생각난 김에 공 이사님을 뵈러 가야겠다.

“어쩐 일인가요?”

공 이사의 반가운듯한 인사말에 단유는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사님 뵈려고 왔죠.”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문제는요. 그냥 얼굴 뵈러 왔어요.”

“바쁠 텐데?”

확실히 그동안은 바빴던 탓도 있고, 업무 시간에 일없이 회사 내를 돌아다니는 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굳이 이사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있다.

“바쁜 일은 다 처리했죠.”

소파에 자리를 권한 후, 단유의 맞은 편에 공이사가 앉으며 편안한 미소를 얼굴에 그린다.

“바쁜데 방해한 건 아니죠?”

“그럴리가요. 아시잖아요? 이 회사에서 제일 일 없는 사람인 거. 놀고 먹으면서 돈 벌려니까 괜히 미안해집니다.”

“이사님이 왜 일이 없어요? 내부 감사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이제는 저도 잘 압니다.”

“감사를 할 게 있어야 말이죠. 더구나 단유 씨가 재무를 맡은 후로는 그나마도 할 일이 줄어들었는데.”

“저 때문인가요?”

“덕분이죠. 설마 단유 씨가 횡령을 할 리도 없거니와, 딱 부러지게 일을 처리하니 제가 따로 살필 일이 없는 거죠. 보자, 안에 뭐 마실게 있나?”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물을 마셔서요.”

“그래요? 아, 요즘 단유 씨의 냉장고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단유는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잠깐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가네요.”

“다 단유 씨가 잘난 탓이죠. 내 딸이 조금만 더 나이를 먹었다면 내, 단유 씨를 다르게 봤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몇 살인데요?”

“이제 10살인데, 관심있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죄송하네요.”

“뭐가요?”

“이사님께 10살 된 딸이 있다는 걸 지금 알아서요.”

“괜찮아요. 뭘, 그런걸 가지고. ···음, 생각해보니 그런 건 있네요. 요즘 단유 씨를 보면 처음의 단유 씨랑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안 좋은 쪽인가요?”

“그럴리가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점점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잖아요? 단유 씨는 제게 고객이었고 전 단유 씨의 자산관리사로서 신의를 다해야 하는 입장. 불편한 표현으로는 갑을 관계였던 거죠. 게다가 단유 씨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좋은 뜻으로 부르는 거니까. 아무튼 저로서는 단유 씨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설령 단유 씨가 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해도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로의 가정사나 사적인 일들을 시시콜콜 캐묻지 않아 좋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에서는 단유 씨가 어떤 성격인지 아니까 굳이 저에 대해 알려하지 않는다해도 서운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없습니다.”

“말을 잘라서 죄송하지만, 서로의 사적인 부분을 나누는 게 친밀도를 특정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한국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과거에는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상대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습니다만, 최근에는 그런 추세가 많이 줄어들었죠. 다만 단유 씨에 대해서는 원장님 덕분에 개인적으로 들은 게 좀 많네요. 그래도 안 좋은 이야기는 들은 게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튼, 요즘 시대도 시대인데다 단유 씨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려는 듯한 태도였기에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 딸에 대한 관심을 미리 두지 않아 죄송하다고 말씀하셨죠? 그게 단유 씨가 달라졌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오늘이 선약이 없었다면 저녁이나 같이 드시지 않겠냐고 물어서 화제를 돌렸을 텐데 아쉽네요.”

“아, 그건 저도 아쉽네요. 오늘은 저도 선약이 있거든요. 아까 말한 제 딸과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해서요.”

“음,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뇨, 이왕 오셨는데 간만에 자산 현황이나 같이 좀 보시죠.”

“잘 관리해주시겠죠.”

“관리는 잘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씩 점검하는 거죠. 형식상.”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태블릿을 집어 단유에게 건네는 택윤.

“그리고 하던 김에 아까 하던 말을 계속 하자면, 아마도 단유 씨의 변화를 가장 기대했던 사람이 원장님이실 것 같습니다.”

단유는 태블릿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사회 생활, 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과 부대끼다보니 단유 스스로도 분명 전과 달라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친구들이랑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간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직장생활의 스트레스, 같은 건 미안하게도 아직 잘 못 느낀다. 하지만 직장생활, 단체생활을 하는 와중에 조금씩 생각과 태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음은 분명하다. 본질적인 가치관이 흔들리거나 변하지는 않지만, 행동지침이나 요령이 미세하게 변하고 있다.

택윤이나 하은은 그 변화를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단유도 일부분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훈과의 대화나 최근의 회사 내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돌이켜보면 과연 그것이 마냥 긍정적인 변화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과거의 단유였다면, 대훈에게 직설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가 정원사가 되든 말든, 회사 내부에 잡초가 자라고 있다고 알려주었을 것이다. 잡초를 자르라고 일렀을 것이고, 만약 그 잡초가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자신의 발목에 엉겨붙을라 치면 먼저 잡초를 뽑아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점점 회사의 시스템과 수없이 얽힌 관계를 지켜보다보면 섣부르게 행동하기가 꺼려진다.

조심스러운 태도가 원만한 사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처세이고, 그것을 깨달았다는 게 긍정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계속 따를 용의는 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인 걸까? 아직 사회물을 덜 먹어서인지 단유는 확신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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