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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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연습실이구나.”
어느새 연습실까지 따라간 나윤과 단유. 나윤은 연습생들이 사용한다는 연습실 내부를 구경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때랑 너무 다르다.”
바닥이며 거울이며 천장에 붙은 에어컨까지 무엇하나 비교 대상이 안 된다며 입을 벌리는 나윤.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10년이나 차이가 나잖아요.”
나윤이 단유를 흘기며 ‘그걸 꼭 말로 해야 되겠어?’란 표정을 지었다. 머쓱해진 단유가 시선을 돌린 틈에 나윤이 물었다.
“몇 시부터 연습해요?”
아름은 뒤에 선 경빈을 바라보며 답했다.
“정해진 레슨은 오후부터지만 보통 9시에 나와서 개인 연습을 하는 편이에요.”
“발성 연습 같은 거?”
“네. 근데 얘는 아직 고등학생이라 오후부터 참여하고요.”
“그렇구나. 나 때는 학교 가서 출석만 부르고 조퇴서 받아서 왔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해요?”
경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연습생이라서 그렇게는 안 되고요. 나중에 데뷔조에 들어가면 회사에서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아, 맞다. 나도 그랬었는데.”
나윤이 박수를 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기억을 떠올렸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던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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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졸린 음성. 만약 단유가 5초간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대로 잠에 빠져들게 뻔한 목소리.
“일어날 시간이에요.”
「음?」
“학교 가야 한다고요.”
「···단유니?」
“네.”
「아침부터 니 목소리 들으니까 기분 좋다.」
‘기분 좋다’는 단어가 묘하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단유는 헛기침을 했다.
“매번 이러면 나 전화 안 할 거예요.”
「으응? 왜? 싫어.」
“매일 깨워달라고 하면서, 전화하면 매번 이런 식으로 질질 끌잖아요?”
「그래서 싫어?」
“싫어질 수도 있죠.”
「싫어, 싫어.」
갑작스러운 앙탈에 단유는 미간을 좁혔다. 마침 맞은편에서 씻고 나오던 명수가 단유를 보더니 입꼬리를 길게 늘린다. 제발 아무 말 말고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이미 단유는 교복까지 다 갖춰 입고 나갈 준비만 하고 있었고, 보통은 이렇게 거실에서 호빵의 재롱을 보며 명수가 준비를 마치길 기다리다 준비가 끝나면 같이 등교를 했다. 그런데 며칠 전 단유가 일찍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나윤은 아침에 자기를 깨워달라며 부탁을 했다.
처음 두세 번은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아침마다 반복되는 그녀의 앙탈(?)과 그런 앙탈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깨워보려 하는 단유의 모습을 희희낙락하며 지켜보다 놀려먹기 일쑤인 명수 때문에라도 더는 하기 힘들 것 같았다.
단유의 한숨소리가 들렸던지, 나윤이 조금 전과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 서러워.」
“왜요?”
「남들은 이럴 때 알콩달콩하면서 좋아죽는다던데, 내 남자친구는 아침에 좀 깨워달랬다고 이렇게 한숨이나 내쉬니까.」
서럽다고 하니 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또 한번, 이번에는 수화기에 들리지 않게끔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안 그럴게요.”
그런데 이번에는 나윤이 입을 열지 않는다.
“여보세요?”
「···나 일어났어.」
“화 났어요?”
「아냐. 내가 미안해. 기껏 아침에 깨워주려고 전화 줬는데 늦장 부려서.」
알아주니 고맙다만, 그래도 마음 한편이 찜찜하다. 무슨 말로 나윤을 달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일어났으면 얼른 씻어!」
「아이 참, 엄마! 나 전화 중이잖아!」
「전화 같은 소리하네. 학교 안 갈 거야!」
「아, 좀! 목소리 좀 낮춰!」
수화기를 급히 막은 듯 하지만, 이미 다 들리는 모녀의 대화에 단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아침에 전화를 하는 일은 없어졌다.
“미안.”
“뭐가요.”
“이제 아침에 전화 안 해도 돼.”
“정말요?”
“좋아한다?”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런데 왜요?”
“엄마한테 한소리 들었어. 너도 아침에 학교 등교해야 하는데 나 때문에 늦으면 안 되잖아.”
나중에 나윤의 어머니께 따로 연락해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같이 있고 싶은데, 같이 있을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그래서 전화로라도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라며 아쉬움을 남기는 나윤을 위해, 단유는 가벼운 결정을 내렸다. 그 날 이후, 단유는 학교를 마친 후, 나윤의 학교로 ‘순간이동’했고, 교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그녀와 함께 회사로 향했었다. 학교에서 회사로 가는 동안의 짧은 시간, 그리고 그녀가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또는 숙소로 돌아갈 때의 짧은 시간을 함께 했다.
사실 하교와 퇴근길을 함께 했던 순간은 많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단유가 나윤과 교제를 시작한 후,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데뷔가 결정되었고 그녀는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나름 오래도록 기억할만한 추억을 쌓았다고 나윤은 생각했고, 그 생각에 단유도 동의했기에 지금 나윤이 보여주는 눈빛에 옅은 미소로 화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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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내가 참 어렸어.”
나윤은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연습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도 연습일지 쓰고 그러나?”
“그렇죠, 뭐.”
연습일지 이야기가 나오자 연습생들의 얼굴이 팍 일그러진다. 그 모습에 나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나도 연습일지 쓰는 거 되게 싫었거든. 우린 일주일마다 검사받고 그랬는데. 검사받을 때 괜히 뭐라도 잘못한 것처럼 벌 받는 기분이고.”
“그러니까요!”
나윤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는 듯 경빈이 발을 한번 구르며 강조한다.
“그래도 그게 도움이 많이 된다? 내가 뭘 했고, 어디서 문제가 있는지, 뭐가 부족한지를 한눈에 알 수 있으니까. 그거 제대로 적어놓질 않으면 나중에 한참을 헤매게 돼. 경험자로서 하는 충고야.”
“네.”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며 남자애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이들을 돌아보는 단유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정자세를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남자애들이라 씩씩한 발성으로 인사를 해온다.
“같이 연습하는 애들?”
나윤이 묻자, 아름이 ‘같은 클래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남자애들에게 나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 ‘안녕하세요, 선배님!’이라고 또 한 번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소년들이었다.
단유는 연습실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이제 비켜줘야 할 거 같은데?”
“어? 그러네. 아, 그러고 보니 여기는 연습실에 시계도 있네? 우리는 연습실 시계가 없었는데. 알지?”
마치 백화점에 시계를 두지 않는 것처럼, 연습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에 몰두하라는 의미에서 시계를 치워버렸던 과거 연습실을 회상하는 나윤의 표정을 계속 감상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어쨌든 지금은 연습생들이 사용하는 공간이고 그걸 방해하면 안되기에 나윤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나가자.”
“응.”
나윤은 싱긋 웃으며 연습생들에게 인사를 고했다.
“다음에 또 봐요.”
“네,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선배님.”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힘내요.”
“고맙습니다!”
연습실 문까지 닫아주고 복도로 나온 나윤은 어깨를 한번 으쓱대더니 단유에게 물었다.
“나 너무 눈치 없었나?”
“뭐가?”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게 아닌가 해서.”
“별로 많이 하지 않았어.”
“괜히 연습실 보니까 감상적이게 돼버렸네.”
복도를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단유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물었다.
“부러워?”
“부럽냐고? 아니. 왜?”
“부러워하는 거 같아 보여서.”
나윤은 단유를 흘겨보다 답했다.
“넌 여전하네. 가끔은 적당히 모른 척 해주는 게 좋을 때도 있어.”
“미안.”
“으휴, 하긴 단유라는 사람이 어디 변하겠어? 한결같아서 좋긴 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시 문이 닫힌 후, 나윤이 단유를 향해 홱 돌아섰다.
“우리 인기 많은 김 이사님은 여태 어떻게 이렇게 고고하게 지내셨나 몰라?”
“응? 무슨 말이야?”
“당장 이 회사 내에서만 해도 김 이사님한테 살랑살랑 유혹하는 눈길이 적지 않은데.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없어.”
“정말?”
“···없어.”
“잠깐, 지금 없다는 말은 유혹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야, 아니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야?”
“······.”
“와, 이 교묘한 언변. 그러니까 널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알지만, 마음은 주지 않고 대신 이용해 먹었다는 소리네?”
“이용은 무슨.”
곧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급히 내린 단유의 뒤를 나윤이 졸졸 따라왔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건 맞잖아? 그렇지? 모를 리 없잖아? 그런데도 모른 척 했다면,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 혹시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거나? 그런 거야?”
단유는 대답 대신 걸음을 빨리했다. 재무팀 사무실을 지날 때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있던 직원들이 단유를 보며 인사를 건네다 뒤에 따라오는 나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대답을 안 하실까?”
“······.”
단유는 묵묵히 걸어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고, 나윤은 그 사무실까지 쫓아 들어갔다.
사무실 문이 닫힌 후, 직원들은 서로의 표정을 확인했다.
“이사님 얼굴 빨갛던데. 맞지?”
“응.”
“이사님 얼굴이 저렇게 된 거 처음 보는데, 나 이사님 당황한 모습 처음 봐.”
“우리 이사님도 저런 표정 지을 수 있구나.”
“저 두 사람, 예전부터 친했던 걸까?”
“그랬겠지. 같이 뮤직비디오도 찍었는데.”
“혹시···.”
“에이, 설마.”
“하지만···.”
“그럴 리가.”
그때 문이 열리고 다시 단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결제할 서류 있으면 가져다 주세요.”
“오전 중에 다 처리하셨는데요?”
“없어요?”
“···네, 지금은.”
“···알겠습니다.”
다시 문이 닫히고 단유가 모습을 감추자, 직원들은 픽픽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만약 저 두 사람이 그런 관계라면, 이사님이 잡혀 사는 쪽이겠다.”
“야, 넘겨 짚지 말고, 일이나 해.”
“응? 얘 수상한데? 혹시 네가 소문의 오렌지파?”
“아니거든?”
역정을 낸 직원은 컴퓨터를 두드리며 혹시라도 결제받을 일이 생길지 몰라 열심히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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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에 대한 소문은 금방 사내로 퍼졌지만, 소문은 크게 힘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날 이후로 다시 나윤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단유를 다시 만날 일이 적어졌기 때문이었다. 단유 또한 딱히 나윤을 챙기려 든다거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내는 일이 없었기에 주위에서는 다른 증거들을 찾기 어려웠고, 때문에 소문은 그저 소문으로 남다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다른 이유로는 봄을 맞이하며 회사가 무척 바빠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위 ‘웅녀 프로젝트’라는, 어디가서도 절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그런 남부끄러운 이름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직접 연관된 사내 각 부서는 매일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회사에 속한 다른 연기자들, 시은과 나윤을 비롯 겨울에 새로 영입한 연예인들의 지원을 위해서도 많은 부서에서 정성을 쏟아야 했기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 시간이 이어진 탓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냉장고에는 오렌지 주스가 쌓이고, 단유는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오렌지 주스를 마셨고, 대훈은 회의 시간마다 간부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의 이름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고수했고, 나윤은 가끔 단유에게 꽃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찍은 셀카를 보내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시계가 있음에도 고개돌려 시간을 확인할 틈도 없다는 듯 연습생들은 거울을 보며, 숨을 헐떡이고, 구슬땀을 흘리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다가 개고, 아침 햇살이 침대 맡에 닿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더니, 긴 소매와 자켓들이 거리에서 사라지고 대신 반팔에 선글라스, 하얀 선크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맹렬히 에어컨이 가동되도 더워서 쓰러질 것만 같은 여름이 찾아왔다.
“데뷔조를 확정한다.”
신인개발팀 팀장의 엄숙한 선포 아래, 데뷔 카운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