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99화 (899/956)

고난의 행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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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지?”

“뭐가?”

“저기요.”

아름은 보민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회사 내 한정으로 시은보다 더 유명(?)하고 인기가 좋은 단유가 걸어가고 있었다. 특유의 풍채(?)로 멀리서 봐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단유의 곁에는 낯선 여자가 붙어 함께 걷는 중이었다.

“아, 저 알아요.”

경빈이 손뼉을 치며 아는 척을 했다. 그녀의 말에 아름과 보민은 그녀가 최근 회사에 영입된 연예인, 즉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몰랐지?”

“우리 그때 반 재편하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거죠.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 얘가 이상한 거야.”

“제가 뭘요? 저도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우연히?”

****

반 재편 후, 남자들과 함께 연습실을 사용하게 된 아름과 보민, 경빈. 새롭게 구성된 커리큘럼에 따라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느라 낯을 가릴 여유도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초반의 서먹함은 쉽게 지우기 어려웠다. 때문에 쉬는 시간을 보낼 때나, 점심,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 밖으로 나올 때도 같이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서먹해도 아예 모르는 남처럼 본 척도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어서 아름이나 보민의 경우에는 인사를 나누거나―힘들지, 힘내자, 파이팅 따위의―가벼운 대화 정도만을 나누긴 했다. 다만 초면에 낯을 가리는 편인 경빈은 거의 아름과 보민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을 정도로 다른 이들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너무 낯 가리는 거 아냐?”

“나중에 친해지면 되죠.”

아름은 경빈도 경빈이지만 자신들도 이렇게 지내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자신이 먼저 남자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우리 휴게실 갈 건데, 같이 갈래?”

조금 전 2시간짜리 연기 레슨을 끝내고 진이 빠져 있던 상황. 예전 통합반 때도 긴 레슨을 마치고 숨 돌릴 틈이 생기면 휴게실에 가서 ‘허락된’ 탄산음료를 마시며 기운을 되찾곤 했다.

남자 아이들 셋이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름이 나선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이 이 무리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편이었다는 것. 남자애들 역시 이제는 자신이 챙겨야 할 ‘동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아름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휴게실로 향했다. 도중에 매니저와 마주쳤지만, 매니저는 아름의 뒤에 선 아이들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역시 아름이네’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 같아 아름은 괜히 뿌듯했다.

“우리 회사는 이게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올해로 18살이 되었다는, 얼굴에 앳된 티가 역력한 동안의, 차연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키만 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신은 아직 자라는 중이라고 클래스 첫 미팅 때 당당히 자신을 소개하던 연준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너네 여기 자주 왔어?”

“자주 왔었죠.”

아름은 보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꽤 자주 왔는데, 거의 마주친 적 없지 않아?”

“아, 저희는 주로 아침이나 아니면 일과 끝날 때 쯤에 왔어요.”

이번에 답한 아이는 좀 전의 소년보다 한 살 더 많은, 하지만 외모만 보면 아름과 거의 동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성숙해 보이는, 김성필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그게···. 그러게요? 우리 쉬는 시간에는 왜 안 왔지?”

성필의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과 동갑인 근표를 바라보았다. 근표는 다른 두 아이가 장발인데 반해 마치 내일 당장 군대라도 들어가기로 결정된 사람마냥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년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연습실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

근표의 대답에 보민이 물었다.

“왜?”

근표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 보민을 향해, 하지만 시선은 보민의 사선에 두고 대답했다.

“귀찮아서요.”

어쩐지 남자애들다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쉬는 시간에는 뭐 했는데?”

“우리는, 그냥 쉬었죠.”

“바닥에 드러눕는 사람도 있었고.”

“근데 가수 지망하는 애들은 쉬질 않았어요.”

성필의 대답에 연준이 맞장구를 치며 덧붙였다.

“저러다 뼈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되게 열심히 하더라고요.”

아름은 연준의 대답에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열심히 흔들어주었다. 그러는 한편 머릿속으로는, 그러니까 걔들이 데뷔조로 낙점이 되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통합 B반의 여자애들도 열심히 하긴 했다. 누구의 열정이 더 절실한가를 따지면 비교가 어렵겠지만, 노력의 양과 질을 따지려 하면 아무래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게 이쪽의 사정이다. 남들보다 한 번 더 거울을 보고, 한 시간 더 움직이고, 하루를 더 치열하게 보내면 그렇지 못한 사람과 차이가 눈에 띄게 벌어질 수 있다.

재능의 차이도 무시는 못하지만, 성장과 발전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를 하면 게으른 사람은 절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게 연습생 평가였다. 자신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것을, 전문가인 매니저와 신인개발팀, 강사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아!”

탄식의 소리에 돌아보니 경빈이 어정쩡한 자세로 빈 컵을 든 채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왜?”

“···엎질렀어요. 죄송해요.”

음료를 급하게 마시다가 컵 옆으로 음료수가 흘러내리는데, 턱을 타고 흐르는 음료를 억지로 피하려 몸을 급히 뒤로 빼다 보니,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엎었다는, 보지 않았으면 이해 못 할 실수를 저지른 경빈이 울상을 지었다.

“턱에 구멍 났어? 그걸 왜 흘리니?”

보민의 핀잔에 경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힝.”

“가서 씻고 와. 여긴 내가 닦을게.”

경빈을 화장실에 보내고 아름은 탁자의 휴지를 집었다.

“저희가 할게요.”

근표가 먼저 손을 뻗어 아름의 손에 든 휴지를 뺏더니, 바닥에 흐르는 음료를 훔치기 시작했다. 빠릿빠릿함이 마치 군대 휴가 나온 동기 녀석들을 보는 느낌이다.

성필과 연준, 보민도 덩달아 휴지를 집어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경빈이가 원래 좀 잘 흘려.”

보민의 툴툴거림에 성필이 히죽 웃으며 바로 옆에 있는 연준을 가리켰다.

“연준이 얘도 되게 잘 흘려요.”

“내가 뭘!”

“너 밥 먹을 때 맨날 흘리잖아? 우리 숙소 식탁 아래가 더러운 이유가 다 얘 때문이라니까요.”

“아냐, 그거 태민이가 흘린 거거든?”

“태민이나 너나 쌤쌤이거든?”

별거 아닌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말을 나누고 같이 웃다 보니 전보다 좀 더 친밀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아름이 애초 의도했던 바를 70% 달성한 것 같다. 나머지 30%는 지금 화장실에 갔지만, 지금과 같은 자리를 자주 만든다면 곧 그녀도 서먹함을 떨쳐낼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을 가져보는 아름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으러 향한 경빈은 그곳에서 낯선 여자와 마주쳤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는 중이던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경빈은 쭈뼛거리면서도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 회사 내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경빈이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물을 틀고 손을 씻다가 슬쩍 눈동자만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분명 낯선 사람인데,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느낌도 들었다. 일단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가 딱 연예인 포스다.

‘어디서 봤더라?’

궁리하던 중에 여자가 갑자기 입을 열어 경빈에게 말을 걸었다.

“연습생이에요?”

“네? 네.”

“아, 그렇구나. 여기 연습생들은 다 그 옷을 입나 보죠?”

그러고 보니 경빈이 입고 있는 것은 자기들끼리 ‘교복’이라 부르는 연습생 전용 연습복이었다.

“네.”

“많이 힘들죠?”

“네? 네.”

왜 그런걸 묻지,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여자가 빙긋 웃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분명 좋은 날이 있을 거예요. 포기하지 말아요.”

날 아나? 라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싶었지만 손은 비누칠이 잔뜩 되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낯이 익어가는 느낌인데, 도저히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걸 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지려던 찰나.

“전 이번에 이 회사로 오게 된 정나윤이라고 해요.”

이름도 어디선가 분명히 들어본 기억이 있는 이름, 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같은 식구니까 잘 지내봐요.”

화장을 마친 나윤이 한편에 놓여 있던 핸드백을 챙겨 들며 웃음을 지어 보인 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희미한 라벤더 향수 냄새가 잠시 머물다 사라져갔다.

****

“그래서 계속 궁금한 거예요. 분명 들어본 이름 같은데, 이러면서. 나중에 연습실 노트북으로 찾아보니까 글쎄!”

중요한 순간을 강조하며 눈을 반짝이는 경빈. 마치 자신이 궁리했던 것 이상으로 궁금해 여겨달라는 반응이라 아름은 피식 웃으며 ‘그래서 뭔데?’라고 되물어 주었다.

“뮤직비디오요!”

“뮤직비디오?”

“있잖아요? 이사님 예전에 나왔던 뮤직비디오! 거기 가수요.”

“그게···.”

아름이 보민을 바라보자, 보민이 ‘가디스R’이라는 정확한 이름을 떠올려냈다.

“네, 그거요! 가디스R! 그 가수예요, 저분. 정나윤!”

아름과 보민이 동시에 입을 벌리며 다시 한번 단유의 곁에 선 나윤을 바라보았다.

****

“쟤들 우리 회사 연습생들이지?”

신호등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 나윤이 물었다.

“응.”

굳이 누굴 가리키는지 찾을 필요도 없이 단유도 즉시 대답했다. 길 위에 멈춰 서서 이곳을 바라보는 세 명의 소녀들을 보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너 인기가 아주 하늘을 찌른다?”

“누나 보는 거 같은데?”

“너 때문이겠지.”

“······.”

“이거 이러다가 질투의 화신들에게 칼 맞고 쓰러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질투의 화신?”

“너랑 이렇게 걷던 중에 내가 얼마나 많은 시선을 받았는지 아니?”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거 보라고 가르쳐 준 건 아닌데.”

“그건 네가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알 수 있는 거야. 여자들의 육감이 얼마나 놀라운 건지 가르쳐줄까?”

“아니, 됐어.”

충분히 나윤의 변화에 놀라는 중이었으니, 여기에 무언가를 더 얹어 놀라움을 배가시키고 싶진 않았다.

나윤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건너편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연습생들을 지켜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에 생각나? 나 연습생 때?”

“기억나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때가 아닐까 싶어. 오직 데뷔만을 목표로 밤낮없이 나를 혹사했던 때. 가장 괴로웠고, 가장 치열했고, 가장 뜨거웠던 때.”

그러나 감상과 달리 다소 건조한 목소리. 단유는 나윤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 어땠어?”

“어땠냐니?”

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말 하잖아?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만약 옛날로 돌아가더라도 그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괴로웠어?”

“응. 괴로웠지. 탈출하고 싶었고.”

나윤은 어깨로 가볍게 단유를 툭 밀었다.

“넌 내 유일한 탈출구였었고.”

그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건너오는 두 사람을 보며 세 소녀는 다시 걸음을 옮겨야 할지, 아니면 단유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먼저 나선 건 나윤이었다.

“우리 회사 연습생이죠? 그쪽은 전에 봤었고. 저 기억나죠?”

나윤이 경빈을 콕 집어 묻자, 경빈이 놀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근데 저 기억하세요?”

“당연하죠. 이렇게 예쁜 아일 어떻게 잊겠어요.”

“감사합니다.”

쑥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칭찬한 나윤에게 인사를 꾸벅하는 경빈이었다. 한 걸음 늦게 도착한 단유에게도 연습생들이 인사를 건넸다. 단유는 가볍게 손만 들어 인사를 받은 뒤 나윤의 곁에 섰다.

“근데, 저기···그러니까, 전의 가디스R 맞죠?”

“맞아요.”

나윤이 연예인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경빈과 보민이 팔짝팔짝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저희 그 뮤직비디오 엄청 많이 봤어요. 노래 너무 좋아요, 언니, 아니 선배님.”

“언니라 불러도 돼요. 근데 나 때문이 아니라, 여기 이사님 때문인 거 아니에요?”

“어···, 이사님이 나와서 신기한 것도 있지만, 노래도 너무 좋아요.”

“진짜예요. 지금 나와도 분명 차트인 할걸요?”

“에이, 그건 아니다. 지금 나오면 구식이라고 아무도 안 들을걸?”

“아니에요, 정말 좋아요.”

“말이라도 고마워요. 식사는 했어요?”

“예, 지금 막 하고 들어가려는 중이에요.”

“그럼 같이 가요.”

나윤이 이렇게 친화성이 좋은 사람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단유는 네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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