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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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중에 바쁜 결제들을 처리하고 난 단유는 점심시간이 오기 전에 잠시 휴게실에 들렀다. 그리고 구석에 비치된 냉장고의 문을 열고 유기농 오렌지 100%를 착즙하여 만든 쥬스를 꺼냈다. 언제부턴가 단유가 오렌지 주스를 유난히 좋아하더란 소문이 돌면서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김 이사 인기 좋네요?”
대훈이 농을 던질 정도로 냉장고를 채우기 시작하는 다양한 오렌지 주스들에 단유는 멋쩍게 웃을 뿐. 그런데 어느 날, 냉장고에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유효기간 : OO-OO」
요컨대 유효기간이 있으니까 열심히 마셔달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단유가 마시는 양에 비해 냉장고를 채워가는 주스가 더 많은 실정.
“다른 사람들도 마시면 될 텐데, 왜 안 마시죠?”
“자네 껄 누가 마셔?”
“제 꺼라고 이름 붙은 것도 아닌데.”
“우리 회사에서 이게 자네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 만약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가 ‘발각’되면 눈총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질 거야.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마실 사람은 없지.”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싶어, 직접 자필로 쓴 포스트잇을 냉장고에 붙였다.
「혼자서는 소화하기 힘든 양입니다. 부디 다른 사원분들도 함께 마셔주세요.」
별 소용없었다.
“애초에 오렌지 주스를 김 이사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으니까요.”
가끔 커피가 질린다거나 색다른 음료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디스펜서에 저장된 탄산 듬뿍 들어간 오렌지 주스를 마시기도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오렌지 주스만 마시라면 그럴 사람이 적다는 대훈의 분석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자체적으로 공급자들이 공급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수요가 워낙 적다 보니 저절로 균형이 맞춰지는 것. 그래도 언제나 냉장고의 한 칸은 오렌지 주스로 빼곡할 정도.
결국 단유가 열심히 오렌지 주스를 마셔야만 일이 해결될 사안이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단유를 향한 ‘팬심’을 드러내는 사원들의 열렬한 애정과 정성을 무시할 순 없는 일이니까.
때문에 단유는 시간이 날 때마다 휴게실에 들러서 오렌지 주스를 원 없이 들이켰다. 솔직히 말하면 싫지는 않았다. 아니 꽤 즐거웠다.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훨씬 입에 잘 맞기도 했고, 건강에도 좋다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김 이사님?”
컵에 가득 채운 오렌지주스를 한 입에 다 마실 요량으로 벌컥벌컥 마시는 중에 뒤에서 은근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떼고 돌아보니 나윤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
“크음.”
순간적으로 사레가 걸려 헛기침을 몇 번 하니 나윤이 휴게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티슈를 뽑아와 건넸다. 단유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티슈를 받아 입술을 훔치는데,
“김 이사님이 그렇게 인기가 좋으시다면서요?”
라고 불쑥 말을 거는 나윤. 단유는 또 한 번 콜록거리며 입을 막았다. 이번에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단유를 보며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나윤이었다. 장난기로 가득 빛이 나는 나윤의 눈을 힐긋 확인한 단유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우와, 우리 김 이사님이 이렇게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나도 김 이사님 만날 때 선물로 오렌지 주스 한 박스를 사올 걸 그랬나봐요.”
“왜 그래요.”
“뭘 왜 그래요? 우리 멋있는 김 이사님이 주스를 좋아하시니까 빈손으로 만나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그러죠.”
“스케줄 없어요?”
“축객령인가요? 말 섞기 싫으니까 나가 달라는 뜻?”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요, 정말.”
“모르겠는데?”
단유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김 이사님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정말 다행이라면 마침 이 시간에 휴게실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눈치도 보네? 왜? 사람 있으면 불편해요?”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저는 상관없지만, ···누나가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무슨 오해?”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미는 나윤 때문에 단유는 괜히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윤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려는 그때, 단유에게는 정말 다행히도, 직원 두 사람이 휴게실로 들어오며 단유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윤도 돌아서서 두 사람과 눈인사 정도로 인사를 나눈 후 다시 단유에게로 돌아서는데, 불길한(?) 눈빛이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김 이사님?”
“네?”
“식사 하셨어요?”
당연히 점심시간 전이니 식사를 했을 리가 있나.
“아니요.···왜요?”
단유는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온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단유의 옆을 지나가던 두 사람이 흘깃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럼 같이 식사하실래요?”
등 뒤에서도 쳐다보고 있음이 느껴지는 이 순간, 단유는 빠르게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그래요.”
이번에는 분명히 목소리가 이상했다. 사레가 걸렸던 탓이 분명했다.
****
“진짜 스케줄 없어요?”
“왜요? 빨리 밥 먹고 스케줄 가라고?”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스케줄은 끝났어. 오전에 남산 쪽에서 인터뷰 건이 하나 있었는데, 오늘은 그걸로 끝.”
“···회사에서 일감을 제대로 잡아주지 않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냐, 모처럼 나 바쁘게 지내고 있잖아? 오죽하면 한달 만에 네 얼굴을 이렇게 보겠어?”
단유는 고개를 돌려 메뉴판을 보았다.
“뭐 드실래요?”
“나 아직 여기 잘 몰라. 네가 여기 더 오래 있었으니까 네가 더 잘 알겠지. 골라주는 대로 먹을게.”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벽에 붙은 메뉴판을 살폈다. 단유가 골라주는 대로 먹겠다던 나윤도 시선을 메뉴판으로 돌렸다.
“여기 메뉴가 되게 많네. 요즘은 메뉴 간소화시키는 식당들이 늘어나는 추세 아닌가?”
“여기는 다 맛있게 해서 뭐 하나 빼기 힘들 거예요.”
“그래? 네가 인증한 맛집이란 거지?”
“···제 입맛을 신용할 수 있나요?”
“아, 맞다. 너, 음식 별로 안 가렸지.”
짧은 문장 속에 오래된 추억이 응축되어 있다.
봄이지만 아직 날씨가 쌀쌀하니 따뜻한 국물이 들어간 걸로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단유는 연포탕을 주문했다.
“나도 그거 먹고 싶었는데.”
“그럼 먼저 말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네가 시켜줄 줄 알았지. 넌 모르는 게 없잖아?”
“그건 제가 알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
콧노래를 부르며 수저를 빼서 단유 앞에 놓아주는 나윤.
“요즘도 운동 계속 하나보다. 그치?”
“그냥 새벽에 가볍게 뛰는 정도예요.”
“역시 부지런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 난 엄마가 안깨워주면 못 일어나는데.”
“···어머니는 잘 계세요?”
“건강하셔.”
나윤의 졸업식 때 만났던 나윤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단유를 배웅하던 어머니. 당연하지만, 나윤과 헤어지면서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어졌다.
그러고보니 졸업식 때 나윤을 봤던 게 마지막이었구나.
그 날.
단유는 나윤에게 선물을 줬었다.
“그거 계속 하고 다녔어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있는데, 나윤이 불현 듯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이거 생각나?”
정말로 단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목걸이를 빼들고 있는 나윤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어, 그게···.”
나윤이 피식 웃으며 다시 옷 속으로 목걸이를 집어 넣었다. 작은 보석 펜던트를 매달고 있는 금빛 체인만이 나윤의 하얀 목 위로 반짝였다.
“계속 보고 있었잖아.”
저도 모르게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가 싶어 민망해진 단유는 옆에 놓여있는 물병을 집어 물컵을 채웠다.
“솔직히 고백하면, 매일 목걸이를 하고 싶었는데 스케줄에 따라서는 협찬받은 목걸이를 하고 있어야 할 때도 있었거든? 그래서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그랬어. 그래도 되도록 많이 걸고 다니려고 노력했었어. 예쁘기도 하고.”
차가운 물로 달궈진 목을 식힌 후, 단유는 길게 숨을 토했다.
****
“고마워.”
“뭐가요?”
“그냥, 전부 다.”
“······.”
“예전에 네가 가르쳐 준 거 있잖아? 제대로 보는 법, 듣는 법. 지금 이렇게 말하니까 좀 우습긴 하다. 그치?”
“아, 네.”
“뭔가 그럴싸한 명칭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어린 애 같이 보는 법, 듣는 법이라니. 아, 그런데 그때는 너나 나나 다 어렸을 때니까 상관없었구나. 그치?”
“그렇네요.”
“아무튼 그게 많이 도움이 됐어. 덕분에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특히 요즘 나 잘나가는 인터뷰이가 된 거 알지? 그게 다 네 덕인 거 같아. 그때 배운 걸 잘 써먹고 있다는 뜻이지. 그런 곳에 써먹으라고 가르쳐준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아니에요. 도움이 되었다면 제대로 사용하고 계시는 거죠.”
“가끔 그런 이야기도 듣는다? 혹시 초능력 가진 거 아니냐고. 자기가 고민하고 있는 거,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걸 어떻게 그렇게 잘 골라내냐고. 사실 가만히 지켜보다보니 알 수 있었던 것 뿐인데.”
“잘 됐네요.”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참 다행인데, 이 거리를 나윤과 단 둘이 걷는다는 건, 조금··· 뭐랄까? 이질적인 느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기분? 만약 나윤이 단유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겠다고 허락해준다면, 당장이라도 외진 곳으로 숨어 가만히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고픈 심정이다.
“가끔 지방 같은 데 가서 밤 촬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하늘을 보면 서울보다 별이 잘 보여. 그 별들을 가만히 관찰하다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 세상은 얼마나 넓고 거대한 것인가. 그리고 이 넓고 거대한 세상에서 지금 이곳 이 시간에 존재할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그리고 이 시간을 살면서 만나는 인연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그런 걸 생각하다보면 모든 게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지지. 그래서 더 고마운 거야.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들 너란 사람을 만났었다는 게.”
“저도··· 그래요.”
나윤은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글 웃더니, ‘고마워’라고 답하곤 다시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발뒤꿈치가 땅을 튕기고 나갈듯한 경쾌한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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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데뷔조를 결정했으니 남은 건 그들이 무조건 성공할 수 있게끔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일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말합니다. 성공은 하늘의 뜻에 달린 거라고. 운이라고.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공은 빈틈없는 계획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대훈은 잠시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신생 기획사입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분들이 어디 아마추어인가요? 당당하게 말하건대, 우리는 프로입니다. 그것도 아주 경력 많은 프로.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하는 것 만으로도 사실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데뷔를 앞둔 아이들이 노력을 해야겠지만, 이 바닥에서 몇 년, 혹은 몇 십년을 구른 우리는 압니다. 성공의 80%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그렇지 않습니까?”
회의장에 모인 간부들은 중후한 저음으로 ‘예, 그렇습니다’하고 외쳤다.
“우리는 이전에 없던 성공 사례를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실패와 성공을 저울질하며 노심초사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공하기 위한 기획과 계획을 세워 무슨 짓을 해도 실패할 수 없는 성공을 노릴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 뿐만 아니라 전 직원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정말 고된 일정을 소화해야 할 겁니다.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로 쓰러지겠다 싶은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절대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며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중합시다.”
간부들이 박수를 쳤다. 이어지는 박수를 손을 들어 그치게 한 후, 대훈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마지막 멘트를 던졌다.
“오늘부터 우리는 고된 일정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우리 회사가 사운을 내건 최초의 프로젝트이며 동시에 우리 회사의 비전을 증명할 프로젝트입니다. 해서 저는 이 프로젝트의 명칭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좌중이 침묵한 가운데, 대훈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당당한 어조로 발표했다.
“프로젝트 명은,”
한 템포 쉬었다가 진심을 담아 뱉었다.
“웅녀 프로젝트입니다.”
“···네?”
“기나긴 시간 마늘과 파만으로 연명하며 인간이 되기를 기도했던 단군신화 속 웅녀의 마음으로 우리는 성공을 만들기 위해 지난한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 끝에서 우리는 당당히 성공의 과실을 맛보게 될 테니 말합니다. 웅녀 프로젝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웅성거림은 없었다. 그러나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행위만으로도 귀가 시끄러운 기분이 드는 단유였다. 슬쩍 대훈을 쳐다보니,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않고 혼자 뿌듯해하는 대훈의 모습이 보였다. 단유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애를 썼다. 처음으로 대훈의 개그코드에 웃을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