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3)
-------------- 897/952 --------------
늦은 시간, 아름은 레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두컴컴한 거실등을 켜고 들어서는데 뒤따라 들어오던 보민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언니, 배 안 고파와요?”
“냉장고에 포도 있을 거야?”
“포도 가지고 안 될 거 같은데.”
“그거라도 먹어. 다 먹진 말고.”
“저랑 나눠 먹어요.”
“난 괜찮아. 난 그냥 씻고 쉴래.”
보민에 이어 마지막으로 들어온 경빈이 폴짝 뛰어 보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저랑 먹어요.”
“그래.”
두 사람은 들고 있던 가방을 거실 소파에 던져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가방 챙겨.”
“먹고 챙길게요.”
아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같은 방을 쓰는 시화는 클래스가 다른 탓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인지 바닥에서 흐르는 냉기가 몸을 움찔거리게 만든다.
“보민아, 보일러 좀 켜.”
“네!”
가방을 침대 옆에 두고, 침대 사이드에 걸려있던 수건을 집어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끝낸 후, 머리를 수건으로 만 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 문을 열고 나오니, 여전히 거실에서 포도를 먹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가방도 여전히 소파 위에 그대로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먹었길래 샤워가 끝나도록 먹고 있나 싶었는데, 한 알 한 알을 보석처럼 소중하게 입안에서 굴리며 먹는 모습이다.
“누가 포도를 그렇게 먹어?”
“아깝잖아요?”
“그냥 다 먹어. 또 사면 되지.”
“살쪄요.”
“그게 걱정이었으면 애초에 먹질 말던가?”
“배는 고프고, 당은 떨어지고, 그런데 살찌면 실장님한테 한 소리 들을 거고.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씻어. 나중에 애들 오면 복잡해지니까.”
“네.”
“포도 껍질은 음식 쓰레기 봉투에 따로 담아.”
분리수거를 당부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걸쇠가 풀리고 뮤지션 클래스에 배정된 여섯 아이들이 우르르 돌아왔다.
“왔어?”
“네.”
평소 같으면 힘든 내색을 하면서도 인사는 씩씩하게 하던 아이들인데, 오늘은 전체적으로 기운이 빠진 모습이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입장하는 아이들의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다 지윤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지윤은 아름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의 지윤에게서 보기 힘든 반응이라 무슨 장난이라도 준비하는 걸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리얼한 모습이다.
“나중에요.”
지윤을 뒤따르는 아이들도 비슷했는데, 마침 시화가 아름을 보더니 입꼬리를 아래로 길게 떨어뜨린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
“왜 그래?”
막내인 시화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름은 시화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시화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서 침대 곁에 두고 1층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무슨 일인데?”
아름의 질문에 시화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젖어들었다.
경위를 들은 아름이 시화를 달래고 거실로 나오니, 이미 거실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사납던’ 슬기도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 무릎을 껴안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고, 시율은 보민을 곁에 두고 한풀이 비슷하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무뚝뚝한 채린은 언제나 그렇듯 시율의 옆에 찰싹 붙어 이따금 시율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윤과 지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름이 거실에 나타나자 시선이 쏠렸는데, 아름은 대충 이야기를 들었다며 아이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왜 우리는 데뷔가 안 된다는 거죠?”
슬기가 아름에게 물었다. 아름이 결정권자도 아니니 딱히 해줄 말은 없었지만, 슬기도 답을 바라고 묻는 건 아니어서 아름은 대신 슬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 네가 그랬잖아. 노력은 반드시 보상을 받을 거라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더 큰 보상이 뒤따를 거야. 그러니까 당장에 미련을 갖지 말고 좀 더 미래를 보자. 더 큰 성공을 위해서 준비하는 거야.”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리 큰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장은 그렇게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솔직히 우리도 열심히 했잖아요? 들어온 시기도 비슷하고, 실력도 그리 큰 차이는 안 나고. 물론 남자 애들 중에 잘하는 애도 있지만···.”
그렇게 토로하던 시율이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푹 떨군다. 아름은 시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지 모르잖아? 지금 아프다고 무너지면 안 돼.”
무릎 위에 턱을 얹고 있던 슬기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무너지진 않아요. 단지 결과가 이렇게 나오니까···마음이 조금 그래서 그래요.”
“결과라니? 아직 결과라고 말할 때는 아니잖아? 우리 아직 갈 길이 멀어. 지금은 단지 데뷔 전에 겪는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자. 결과는 나중에,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볼 수 있다고 봐, 나는.”
입술을 깨물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슬기.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경빈이 그런 슬기의 손을 덮으며 ‘괜찮아요’, 위로의 표정을 짓는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율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요.”
제대로 듣지 못한 아름이 되묻자, 시율이 고개를 들며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했다.
“니가 뭐가 미안해?”
“사실 아까 연습실에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솔직히 우리나 남자 애들이나 별 차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들어온 시기도 비슷하고. 월평 점수가 남자애들이 더 좋게 나왔다고 하는데, 채린이나 슬기언니는 월평에서 1등 한 적도 있잖아요? 실력에서 솔직히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도 이렇게 된 게 어쩐지 다른 사람들 실력이 모자라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제가 언니들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죄송하고 미안해서···.”
울먹거리던 시율은 이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차라리 데뷔 보류 멤버로 저만 지목되면 마음이 편할 텐데, 괜히 저 때문에 언니들 전부 데뷔가 미뤄진 거 같고, 그래서, 그래서···.”
“아냐, 니탓 아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뭘 못해?”
“저, 안무도 잘 못 따라가고, 노래도 못한다고 선생님한테 혼도 많이 나고···.”
아름은 시율을 안고 위로했다.
“아냐. 네가 얼마나 잘했는데. 우리 같이 레슨 받을 때, 내가 널 보면서 얼마나 감탄을 많이 했었는데. 너도 되게 잘해. 그리고 막말로 지금 좀 못한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 레슨 받으면서 잘하면 되지. 노력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자책하지마. 네 탓 아냐.”
흐느끼는 시율을 가슴에 품고 다른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동조하듯 슬기가 엉덩이로 바닥을 밀고 다가와 시율의 등을 껴안으며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네가 모자란 게 아니라, 우리 전부가 아직 모자란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 응? 시율아. 우리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하자. 같이 열심히 해서 우리 정말 잘 할 수 있다고 선생님들이랑 실장님한테 보여주는 거야. 우리가 어디가 모자라냐고 말로 항의하는 것보다 실력으로 보여주는 거야. 그러자, 응? 야, 넌 또 왜 울고 그래?”
시율의 옆에 붙어 있던 채린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열심히 할게요.”
앞뒤 없이 그 말만 내뱉고는 슬기에게 안기는 채린의 모습이 어쩐지 뭉클하게 느껴지는 아름이었다.
“그래, 오늘만 울고 내일부터는 열심히 하자.”
“죄송해요, 언니.”
“뭐가 자꾸 죄송하대.”
“언니도 데뷔하고 싶으시잖아요. 그런데 괜히 투정 부리는 거 같아서.”
“아냐, 괜찮아. 이럴 때 언니한테 투정 부려. 괜찮아.”
“정말 죄송해요.”
아름은 사과하는 슬기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방에 들어간 뒤로 전혀 나올 생각을 않는 지윤과 지서에게도 위로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보민이랑 경빈에게 맡기고 아름은 그들이 들어간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연 아름은,
“아이, 깜짝이야.”
속옷만 입은 채로 침대 위에 앉아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지윤을 발견했다.
“뭐야? 뭐하고 있어?”
“네? 어, 그냥 씻고 나왔는데요?”
“···괜찮아?”
“네, 뭐. 괜찮아요. 샤워를 했더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랄까? 그냥 개운한 느낌이네요.”
“···어떤 의미에선 넌 정말 대단한 애다.”
“제가 원래 단순하잖아요.”
“널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집에 한 명도 없을걸?”
“저 있잖아요.”
“말을 말자. ···정말 괜찮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우울한 느낌도 있는데 자고 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애들 울어요?”
아름은 문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서는요?”
“지서 방엔 아직. 너부터 보려고 왔는데, 지금 보니 안 와도 됐을 거 같네.”
“지서는 애가 하는 거랑 다르게 멘탈이 좀 약하잖아요? 걔한테 가보세요.”
아름은 대답 대신 옆에 널려 있던 티셔츠 하나를 집어 지윤에게 건넸다.
“입어.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이불 안에 들어가면 괜찮아요.”
“그래도 입어.”
“보기 흉해요?”
“···에휴, 넌 정말.”
히죽 웃는 지윤을 보며 아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이 정도는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인데요. 사실 비밀인데요, 저 여기 들어오기 전에 한 번 연습생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랬어?”
전혀 몰랐던 사실이기에 아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이번 거는 사실 약과예요. 차라리 이번이 낫죠. 한 번은 데뷔시켜주겠다고 했다가 데뷔 한 달 앞두고 엎은 적도 있었는데요.”
“왜?”
“잘 몰라요. 그냥 엎어졌어요. 그 뒤로 회사 나오고···. 그때는 멘탈이 완전히 부서져서 다시는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거든요. 그냥 공부나 하자 생각하고 지내다가 수능 성적에 맞춰서 대학까지는 갔는데, 도저히 적성에 맞지를 않으니까 그래서 다시 여기로 온 거예요. 이번에는 포기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엎어진 것도 아니고 단지 미뤄진 거 뿐이니까.”
돌이켜보니 연습생 생활에 제일 잘 적응했던 게 지윤이었다. 그녀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앞장서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거나 여러 가지 상황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잘 해냈던 이유가 그런 과거 때문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연습생 때 제일 중요한 게 있다면, 그건 조바심을 내지 않는 거예요. 이게 말은 쉽지, 절대로 그렇게 안 되거든요. 저도 모르게 빨리 데뷔하고 싶어지고···. 자기는 준비가 다 된 거 같은데, 회사에서는 준비가 안 됐다고 하니, 괜히 회사를 의심하게 되고, 그게 커지면 나중에 회사랑 갈등도 생기고 결국 이도저도 아닌 처지가 되도록 자신을 몰고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각오하는 거예요. 조바심내지 말자.”
아름은 지윤의 말에 수긍했다. 사실 아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그 조바심이었기 때문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연습생 생활이니 매 순간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조금 더 빨리 진도를 나가서 더 많은 걸 더 빨리 배우고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데뷔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늘 있었다. 그래서 클래스 재편성이 아름은 기뻤다. 데뷔까지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 달. 뮤지션 클래스에서 데뷔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는 말에, 아름은 시화 앞에서 울컥 눈물을 떨굴 뻔했다.
그래도 언니니까, 이 숙소의 최연장자로서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눈물을 막아냈다.
그런데 지윤이 말했다. 경험자로서,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이다. 입장이 뒤바뀐 느낌이지만, 아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조바심내지 말아야지.”
아름의 대답에 지윤은 또 한번 히죽 웃어 보이곤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요란하게 이불을 끌어모아 그 속으로 몸을 집어넣더니 ‘나가실 때 불 좀 꺼주세요’ 부탁하는 지윤. 아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달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