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95화 (895/956)

고난의 행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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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학생 커플 둘이 마주 앉아 거의 얼굴이 닿을 정도로 붙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대는 모습이다.

“확실히 연애를 하면 사람이 예뻐 보이는 모양이야.”

턱을 괴고 중얼거리는 나윤은 갑자기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저렇게 예뻤었나?”

“응.”

“지금은?”

“지금도.”

“지금도?”

“···응.”

“혹시 말이야.”

“······.”

“아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문을 닫고는 가슴께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너머로 넘긴다. 반대쪽 귀를 쓸며 머리를 정돈하고 허리를 세운 후 옷을 단정히 정리한다. 입술을 오물거리고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가 편다. 앉은 자세를 다시 바로 하고 탁자 위에 팔을 얹은 후, 빨대를 집어 거의 식어가는 커피의 마지막까지 빨아 마신다.

그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던 단유는 그 동작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걸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에서 너한테 좋은 조건을 내걸건 가봐.”

“어떤 조건인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들은 정보로는···.”

단유는 대훈에게서 설명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좋은 조건인 거 같은데?”

“나중에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한 번 더 검토해봐야 정확하겠지만, 회사의 기본 모토가 서로 윈윈하자는 거니까 결코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만 되진 않을 거야.”

“그 정도면 내가 더 유리한 거 아니고?”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이 성공하게 되면 그게 곧 회사의 성공이기도 하다는 게 대표님의 생각이시니까.”

“좋은 회사구나?”

“좋은 회사라고 생각해.”

“그래. 그럼 할게.”

“···그럴래?”

“너한테도 좋은 거야?”

단유는 볼을 긁적이려다 손을 멈칫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단지 재무 이사일 뿐이고, 그래서 누나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거랑 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무슨 영업 사원처럼 수당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로 물은 거 아닌데.”

“···아무튼, 난 그저 누나랑 아는 사이기도 하니까 아무래도 미리 이렇게 만나서 의견을 조율하면 누나를 영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대표님의 요청이 있어서 나온 거야. 그러니까, 누나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것도, 혹은 들어오지 않는 것도 나에게 어떤 이득이나 손해는 없어.”

“그런 의미 아니라니까?”

“물론 누나가 들어오면, 좋을 거야. 난 지금 다니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꽤 있다고 생각하니까. 만약 누구라도 우리 회사에 들어온다면 다른 대형 기획사 못지않은 지원을 받으며 활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중요한 거잖아?”

“중요하지. 그래서 좋은 거지?”

“···응.”

“그래, 그럼 하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나 때문에 우리 회사 들어오겠다는 거야?”

“네가 너희 회사 좋은 회사라며? 거기가면 성공이 보장된다며?”

“아니, 보장된다고 까진 말 못 하지. 앞으로의 일을 누가 알겠어? 다만 도움이 많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지.”

“그게 그거지, 뭐. 아무튼, 네가 좋은 회사라고 했으니 좋은 회사구나, 라고 믿을 수 있는 거야.”

“······.”

“넌 거짓말 못 하잖아. 아니, 못 했잖아. 혹시 지금은 잘하나?”

“······.”

“지금도 보니까 못 하는 거 같네. 난 널 믿어. 넌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니가 말한 거라면 팥을 죽으로 쑨다고 해도 믿을 거야.”

“팥을 죽으로 쑤면 팥죽인데?”

“아, 그렇구나. 단팥죽 먹고 싶다. 이번 겨울에 단팥죽 한 번도 못 먹었는데. 혹시 근처에 맛있는 팥죽 파는 집 없으려나?”

탁자 위에 엎어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갑자기 팥죽 잘하는 집을 검색하는 나윤을 단유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

출납관리에 자금조달 및 운용, 재무계획 및 분석, 유동성관리, 수출입금융 등 대학 다닐 때 심심풀이로 읽었던 경제학 서적에서나 봤던 용어들이 현장에서 사용되는 경험을 체험하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책과 현장은 또 다르지만,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FM적 마인드로 여기저기 찔렀더니, 재무팀은 어느 때보다 힘겨운 겨울을 보내야 했고, 덩달아 사내 각 부서들에서도 융통성 없는 재무팀 덕에 고생을 해야 했다. 거기다 고충을 토로하기도 힘들게 단유가 직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지적하고 다니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유는 욕을 많이 먹어야 했다.

“그래도 김 이사 덕에 우리 자금 컨트롤이 좋아졌다는 평입니다.”

대훈은 단유를 칭찬하며 이사회를 시작했다.

“이렇게 깔끔한 예산관리 보고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말이죠.”

경영지원본부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대로면 올해 저희가 사용할 수 있는 자금 한도가 너무 적어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경영지원팀의 지난해 예산사용 내역을 분석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초창기라 많이 소요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부서에 비해 지출이 과도하다는 분석이었고, 만일 이를 유지하면 타부서에 들어갈 예산 지원액이 부족해질 수 있음을 우려했기에 적정한 금액을 산정했습니다.”

똑 부러지는 단유의 반론에 본부장은 단유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 머리를 싸맬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눠드린 기획안은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분기 내 예측초과 수익분이 발생할 시, 추가예산 지원도 가능할 수 있으니 실제 업무 진행 시 어려움은 크게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제는 편한 얼굴로 이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단유였다.

“봄비네요.”

이사회를 마치고 나와 휴게실에 들러 대훈과 함께 차를 한 잔 함께 하던 중, 대훈이 휴게실 창밖으로 보며 물었다.

“비 때문에 차가 많이 막히려나? 나윤이 지금 지방 내려갔죠?”

함께 있던 매니지먼트부의 실장이 정자세로 대훈의 질문에 답했다.

“네. 새벽에요. 그런데 그때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별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아, 그래요? 그래도 전 비가 내리면 괜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항상 도로 위를 달려야 하는 직종이다보니. 대중교통 운전을 하시는 분들보다 우리가 더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실제로도 교통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례가 종종 있고, 그럴 때마다 대훈은 병문안 혹은 부의금을 들고 장례식장을 방문해야 했다.

“로드들에게 주기적으로 교육을 시키고 있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로드 뿐 아니라 모두가 안전에 주의해야죠.”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대훈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런 식으로 대표의 존재감을 아랫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대훈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다.

짧은 문장 속에서 아랫사람들을 걱정하는 모습과, 규칙을 통제하려는 대표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드러내는 수법은, 뻔하지만 잘 통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대훈이 대표로서 적응해 나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대표로서의 권위랄까, 그런 게 잘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도 군림하는 대표의 모습보다 친근한 상사로서 함께 하고 싶어했었고. 그러나 작년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스스로도 이대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조금씩 말에 무게를 싣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가볍게 던지는 농담도 자제하며 대신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아랫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자연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그가 계속 성장 중이라는 것을 뜻했다.

“김 이사.”

“네.”

“오늘 특별한 스케줄 있어요?”

“이사회 외에는 달리 특별한 스케줄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같이 저녁이나 할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들 보세요.”

그렇게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피한 대훈. 단유도 곧 자리를 뜨려는데, 곁에 있던 인재개발팀장이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하신 모양이네요?”

“네? 아, 조금요. 요즘 저희가 비상 체제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신경이 많이 곤두선 모양이에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이해한다는 뜻을 보였다. 비공식적으로는 아직 활동이 끝나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는 지난 1월에 활동을 마무리한 시은 때문에 회사가 전력으로 풀 가동되었었다. 대부분 부서의 인력들이 총 동원되어 한 사람을 지원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단유는 그 광경이 꽤 신선하게 다가왔고 그들의 열정이 몸으로 체감되었다.

그 열정의 반작용으로 지금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인재개발팀장이 피곤을 호소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조금 전 팀장이 말한 ‘비상 체제’는 시은의 것과 다른 상황이었다.

“데뷔 그룹 때문인가요?”

“그렇죠. 올 상반기 내에 데뷔시키는 것이 목표긴 한데, 쉽지 않네요.”

정상적, 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한 회사에서 그룹형 아이돌을 데뷔시킬 때 보통 2년 내지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들 한다. 평균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5년, 혹은 6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고 짧게는 3개월에서 6개월만에 내는 경우도 있다.

그와 비교해서 1년만에 데뷔 그룹을 조직하는 현재 회사의 상황은 일반적이진 않다. 소속된 아이들 역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실력이 모자라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실력은 기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 결정하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합의를 본 거죠.”

지난 간부 회의 때 나온 내용이었다. 작년 한 해는 딱히 회사의 수입이랄 게 없던 해였고, 그래도 회사 설립 초기니 이해할 수 있다고도 했지만, 올해부터는 다르다. 본격적으로 회사의 이름을 내건 데뷔 그룹을 내어 수익활동과 회사의 인지도, 명성 등을 끌어올려야 할 해였다.

“어렵지만 도전하는 게 의미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실패할 수도 있음을 가정하고 도전해 보자는 대표의 취지에 다른 사람들은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다. 다들 그 취지에는 동감하니까. 그러나 취지가 그렇다는 것이지, 실패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인재개발팀장은 매일매일 팀원들과 함께 그룹으로 데뷔시킬 아이들을 선발하느라 늦은 퇴근을 밥먹듯 하는 중이었다.

단유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혹시 선발은 끝났나요?”

“대충은, 네.”

팀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쉽지 않았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작곡팀은 지난 주부터 작업에 들어갔고, 곡만 나오면 안무팀에도 총동원령이 떨어지겠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겁니다. 아니 시작한 셈이죠.”

이제부터 이어질 과정도 단유에겐 흥미로운 관찰물이 될 느낌이 들었다.

‘아니지.’

단순히 관찰만 할 순 없다. 무엇보다 이 고난의 행군에는 엄청난 규모의 ‘돈’이 투자될 예정이니 말이다.

“성공만 하면 효자고, 성공을 하지 못하면 아픈 손가락이지만, 실패를 하면 불효자가 되죠. 여간 힘든 게 아닐 겁니다. 저희나, 아이들이나.”

이어지는 팀장의 넋두리를 들으며 단유는 연습실에서 땀흘리고 있을 아이들의 얼굴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아직은 풋풋하기만한 아이들. 스타를 꿈꾸며 발에 테이핑을 하고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그러다 문득 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낙서가 현실이 되는 순간, 난 또 다른 낙서를 가슴에 새기기 시작했지. 그 낙서가 또 다른 현실이 되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그러다 어느날 거울을 봤더니 내 몸이 온통 낙서 투성이야. 난 처음에 끄적거렸던, 가장 순수했던 때의 꿈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너무 지저분하게 뒤덮인 낙서들 때문에 찾을 수 없었어. 끔찍해서 난 눈을 가렸어. 그리고 주저앉았어. 그리고 한참을 방황했고, 그동안 내 몸에 그려진 낙서들을 지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어. 그러다보니, 이렇게 됐네? 어때, 이제보니까 나 되게 못났지?”

단유는 입안이 쓴 느낌이 들어 남아 있던 커피를 개수대에 비워버렸다. 커피는 입에 잘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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