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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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 느낌이다. 설마 심장이 터졌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라는 심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는다. 터지지는 않았지만 터지기 일보직전인 것처럼 미친 듯 뛰는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진다.
‘바보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맞다. 그는 나윤의 첫사랑이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빠져들었고, 그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 오감을 곤두세웠던 나날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소중했다고 하지만, 간혹 기억이 희미해진 부분도 있긴 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던가, 늦은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왔을 때, 회사 앞에서 기다리던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던 기억은 있지만,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던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가끔 그에 대해 서운했던 감정을 품었던 것도 같지만, 돌이켜보면 왜 서운했던지 모를 정도로 스스로의 기억과 감정이 희미하다.
“잘 지냈어요?”
그의 목소리는 더욱 진중해졌고,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에서는 총기가 흐르고, 그의 오똑한 콧날은 어린 시절 반했던 그 모습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응. 너는?”
“저야, 뭐. 보다시피, 잘 지내고 있죠.”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단유는 단지 우연히 길가다 마주친 옛 남자친구로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D&D 엔터테인먼트라는, 몇 달 전 흘려들었다가 최근 시은이라는 가수의 영입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그녀의 성공적인 컴백을 이끌어 명성을 쌓기 시작한 회사의 이사로서 나온 마당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성들이 대부분 ‘대리’, 혹은 기껏해야 ‘실장’이니 ‘팀장’이니 하는 직급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이사’라는 폼 나는 직함을 떡하니 들고 나타났다.
아쉬움? 미련? 그런 것은 솔직히 느끼지 못하겠다. 다만,
“축하해.”
진심으로 그의 성공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그는 꽤 과묵한 편이었던 것 같다. 함께 있을 때면 거의 대부분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냈고, 거의 대부분 자신이 대화를 주도했었다. 하지만 속 알맹이 없는 말들이 대부분. 진짜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은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던가?
그와의 수년만의 재회는 둘째치고, 그가 들려줄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더욱 성숙해진 그의 얼굴을 감상하며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이야기는 그 무엇이라도 즐거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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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내 기억에는 우리 말 놓았던 것 같은데.”
“······.”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너무 생소한 감정과 생소한 경험이 이어지다 보니 평소의 똑 부러지는 모습이 나오질 않는다.
“어떻게 지냈어···?”
말끝을 얼버무리며 놓는 듯 마는 듯한 어조로 질문을 던지니, 나윤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도 저 눈웃음을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야 뭐, 이것저것 하면서 지냈지.”
일단 단유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그녀를 영입하기 위함이고, 말인즉슨 그녀가 계속 연예계 활동을 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저것’ 해왔다는 표현을 함은 ‘가수’로서 한 길만 걷지 않았다는 뜻일까?
“미안해요. TV를 잘 안 봐서.”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사정들로 인해 TV를 옆에 끼고 살 정도가 되지 못했음을 변명했다.
“또.”
“네?”
“말 놓아도 되는데.”
“아.”
이러다가 오늘 볼에 손톱자국이 길게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단유는 볼을 길게 긁적였다. 그 사이 머리를 맹렬히 굴려 다음에 할 말을 골랐다. 그러나 그 전에 나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TV를 봤어도 아마 난 잘못 봤을 거야.”
“왜···?”
“TV에 잘 나오는 편이 아니었거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잔에 꽂혀 있던 빨대를 휘휘 젓는 나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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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조사라도 하고 갈걸 그랬어.”
―웬일이야? 네가 그런 후회도 다 하고?
“그러게. 나답지 않았어. 오늘, 하루 종일.”
―그런 거 같다.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를 하는 것도 너답진 않지.
명수의 반응에 단유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대략 6시에 가까우니 영국은 9시 즈음?
“지금 거기 아침 아냐?”
―아침이지. 그리고 지금 난 훈련장에 도착해서 몸을 풀고 있을 시간이고.
“미안. 끊을게.”
―괜찮아. 이미 손짓으로 양해를 구해 놨으니까.
“손짓으로?”
―바디랭귀지, 몰라?
“그게 바디랭귀지로 해결될 일인가?”
―나, 나름 신뢰받고 있으니까, 이 정도는 용서해 줄까. 그렇지? 밥?
마지막에는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묻는 말로 들렸는데, ‘밥’이란 사람은 과연 명수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가?”
―애프터는 잡았어?
“미팅하냐? 무슨 애프터야?”
―야, 무려 10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잖아? 아, 혹시 그 누나는 남자친구 있대? 혹시 벌써 결혼한 건 아니지?
“몰라. 안 물어봤어.”
―그걸 왜 안 물어봐?
“그게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해? 야, 김단유. 너 그 누나랑 헤어진 뒤로 다른 여자 만난 적 있어?
만나기야 숱하게 만났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하지만 명수의 물음이 ‘교제’를 의미한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 단유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없잖아? 그치? 솔직히 너 정도 순정이면 그 누나가 한번은 만나줘야 한다고 생각해.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야, 그건?”
―남자가 말이야, 응? 10년이나, 응? 순정을 바친 상대인데, 그런 마음을 알면, 응? 한 번, 딱, 만나서 응?
“뭐?”
―거 있잖아. 드라마틱한 고백. 나도 당신을 기다렸어요, 뭐 이런 거.
“너 아침에 뭐 잘못 먹었어?”
―요즘 상미가 한국 드라마를 다운 받아서 보는데, 옆에서 같이 보느라고 그런가, 조금 물들었다.
도대체 요즘 한국 드라마가 어떻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떠올리는가? 만약 명수가 시나리오 작가였다면 시청률 0%는 확정일 테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이야기는. 일 이야기 했지.”
―일 이야기만?
“뭐, 대충, 그런 이야기.”
―얼버무리지 말고, 얘기해봐.
당장 명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조바심내는 꼴이 만약 옆에 팝콘이라도 있으면 우걱우걱 입에 우겨 넣으며 단유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을 것만 같다.
“그냥 우리 회사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고, 누나도 관심이 있으면 우리 회사랑 계약하는 게 어떻겠···.”
―야, 김단유. 김 빠지게 왜 그래? 설마 일 이야기만 계속하진 않았을 거 아냐? 다른 이야기는 안 했어, 정말?
단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왜 하필 명수에게 전화를 했던 것인가, 자책했다.
“꿈 이야기 했어.”
―난데없이 무슨 꿈?
명수의 목소리에 가득 담긴 호기심이 전파를 타고 지구 반대편에서 넘어와 단유의 귀를 간질이고, 그 자극으로 인해 낮에 있었던 나윤과의 일들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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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계약하면 되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대훈은 통화를 마치고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던 단유를 향해 몸을 돌리며 손을 펼쳤다.
“수고했어요, 김 이사님.”
“궁금해서 그러는데, 나윤 누나는 왜 영입하려 하시는 거죠?”
“왜요? 김 이사가 보기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니요. 제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전 재무이사일 뿐이고, 그 외 회사의 인재 영입과 같은 부분은 제 담당이 아닙니다.”
“담당이 아니니 간섭도 하지 않겠다?”
“네.”
“그런데 이유는 궁금하다?”
“···네.”
“오늘 직접 만났잖아요? 어땠어요?”
“어떻고 자시고. 그냥 이야기만 나눴을 뿐인데, 그걸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 않나요?”
“왜요?”
단유는 오늘따라 대화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좋은 편이지만, 그걸로 가창 실력이 어떤지 추정하기는 어렵잖아요? 실제로 말할 때의 목소리와 노래를 부를 때의 목소리가 다른 경우도 있고. 또 현대 가요에서 테크닉이란 부분도 무시 못하니 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테지만,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니까 알 턱이 없죠. 퍼포먼스는···뭐, 그것도···.”
“잠시만요.”
대훈이 단유의 말을 잘랐다.
“지금 보니까 김 이사는 나윤 씨가 가수로서 활동할 거라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아닌가요?”
“나윤 씨가 예전에 가수 활동을 했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
“그런데 나윤 씨가 마지막으로 가수 활동을 한 것은 벌써 5년도 더 된 일입니다. 이후 신곡을 내거나 혹은 공식적으로 가수 활동을 한 적은 없습니다.”
“네? 그럼···, 지금 누나는 무슨 일을 하는데요?”
“리포터예요.”
“리포터요?”
“네. 그리고 케이블에 패널로 몇몇 프로에 고정으로 출연중이고요.”
진심으로 단유는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나윤과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미묘하게 엇갈리던 반응과 대답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몰랐어요?”
“네.”
“그렇구나. 사실 새 앨범은 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건, 이번에 시은이 일로 김 이사도 경험했잖아요? 나윤 씨의 전 소속사도 경제적인 이유로 새 앨범을 내주지 못했던 듯 해요. 그리고 지금은 그 소속사마저 나와서 혼자 활동하는 중이고.”
“그럼···대표님은 왜 누나를 영입하려는 거죠?”
“시은 씨 추천이에요. 전에 한 번 만나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말도 차분하게 잘하고 인터뷰이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고. 목소리도 좋은 편이고 재치도 있는 편이어서 잘만 하면 꽤 좋은 MC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네요. 그래서 최근 그녀가 나왔던 방송들도 찾아보고 개발팀이랑도 상의를 해봤더니, 지금 우리 회사에서 영입해서 지원만 제대로 해주면 여러 방송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을 재목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영입 결정이 내려진 거죠.”
나름 알아보고 결정했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단유에겐 살짝 충격이었다. 단유에겐 가수로서 무대 위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모습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왜 그러세요?”
대훈이 단유의 표정을 살피다 물었다.
“아닙니다.”
“혹시 불편한 관계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솔직히 놀랐을 뿐이에요.”
“하긴 김 이사는 나윤 씨가 가수를 그만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가디스R이었죠?”
“네.”
새벽 안개보다 더 희미하고 습한 목소리가 단유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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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때?”
“어떻다니?”
“나 많이 늙었어?”
“늙었다는 표현을 쓰기엔 아직 한참 모자라지 않을까?”
“내일 모레면 나도 30이야. 이 정도면 이 바닥에서 늙었다는 소리 들어도 부족하지 않지.”
10대 때의 탱탱한 볼살이 없다며 볼을 길게 늘리는 모습을 보이며 분위기를 이끄는 나윤의 모습은 낯설지만 익숙했다. 어릴 때의 나윤도 가끔 이렇게 엉뚱한 모습으로 단유를 웃기곤 했었다.
“근데 지금 나 꿈꾸는 거 같아.”
“꿈?”
“응. 솔직히 나 예전에 너랑 만날 때 말이야,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 단유 네가 커서 어른이 된 뒤에 정장을 입으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말이야.”
“그때 입었던 교복이랑 별 차이 없지 않아?”
“교복이랑은 다르지. 지금 너, 되게 멋있어. 정말 꿈에서나 그려보던 모습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되게 기분 이상한 거 알아? 마치 10대로 돌아간 기분이야. 10대로 돌아가서 꿈을 꾸고 있는 기분?”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회상하는 건 슬픈 일이다. 그 때문에 나윤은 눈을 내리깔며 또 빨대를 휘휘 젓는다. 턱을 괴고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는 나윤의 시선에 어린 커플이 보였다.
“좋을 때다, 그치?”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단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나윤은 말을 이었다.
“저 때는 정말 소소한 것에도 기뻐할 줄 알았는데. 자라면서 소소한 행복 같은 건 꿈에도 못 꿀 지경이 되고 말았어. 현실이란 참 냉혹해.”
감상에 젖은 듯한 나윤의 말이 이어지는데, 단유는 도저히 그 중간을 자르고 일 이야기나 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저 봐, 우리도 저거 많이 했잖아.”
바라보니 커플의 여자 쪽이 가방에서 펜을 꺼내 들고 티슈에 뭔가를 끄적거려 남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작지만 맑은 웃음 소리가 카페를 채웠다.
“그때 연습 일지에다 이것저것 적고 그랬잖아.”
연습 일지로 쓰던 공책의 여백에 한껏 귀여운 말들을 주워 담아 써서는 단유에게 건네곤 했다. 그러나 단유의 기억 속에 그 연습 일지에는 그보다 더 많은 낙서들이 끄적거려져 있었다. ‘낙서’라고 하지만 실은 나윤의 소망이 담긴 기도였다. ‘데뷔하자’는 말이 가장 많았고, ‘성공해서 엄마한테 다 갚아야지’ 같은 말들도 적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과연 그 낙서들은 어느 정도나 현실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