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90화 (890/956)

낙서(6)

-------------- 890/952 --------------

“넌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래?”

휴게실에 나와 단둘이 복도를 걷던 중, 매니저가 불쑥 말을 꺼냈다.

“들었어?”

시은이 조심스럽게 살피니, 게슴츠레 실눈으로 시은을 흘겨보는 매니저였다.

“왜 그랬어?”

“···그냥 말하다 보니 그런 거야.”

“진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아냐, 그런 거.”

강하게 부정하는 시은을 지그시 바라보던 매니저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없다 쳐.”

“없다 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없어.”

“알았어. 믿어줄게. 대신 다음에는 단둘이 있을 때만 그런 이야기 하도록 해.”

“무슨 단둘이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아, 정말!”

“연습실에 가 있어. 난 사무실에 들러야 하니까.”

“그냥 이번에 매니저도 싹 바꿔 달라고 할까 봐.”

“그러든지. 나야 뭐 아쉬울 거 없다.”

“두고 봐, 언니.”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못 봤다.”

“으이구.”

시은은 매니저가 건네는 500㎖ 생수병을 낚아채듯 받은 뒤 개인 연습실 안으로 몸을 감췄다. 컴컴한 연습실의 벽을 더듬어 불을 켜고 앞에 놓인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책상 위에 가방을 올리고 잠시 숨을 돌리다 머리를 격렬하게 흔드는 시은.

‘왜 그랬지?’

자신이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스케쥴 없는 휴일이라고 너무 방심한 나머지 긴장을 너무 풀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평소에는 절대 그런 말 하지 않을 텐데.

그래도 덕분이랄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유가 자신에게 이성적 감정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

가방을 뒤적여 손거울을 꺼내들었다.

‘안경 때문인가?’

안경을 벗으니, 흐릿한 얼굴이 거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안 좋으니 자기 얼굴도 제대로 못 본다. 거울을 가까이하면 눈만 보이고 떨어뜨리면 흐릿해질 뿐인 얼굴. 한숨이 나온다.

****

“이사씩이나 되는 분이 너무 열심히라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대훈이 농을 던지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어쩐 일이세요?”

“방금 말했잖아요. 너무 열심히 한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파악을 위해 왔죠. 직원들이 이사님 때문에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린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그럴 리가요. 다들 바빠서 정신이 없는데.”

단유가 사무실에 붙은 창으로 바깥을 슬쩍 보며 대꾸하자, 대훈이 손을 저었다.

“아니,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들으시나. 그냥 농담 한마디 한 걸 가지고. 지금 재무팀 바쁜 건 나도 잘 아는 일이니까. 그래도 어지간한 일이면 직원들한테 맡겨도 될 일은 본인이 직접 부서를 돌아다니며 챙긴다는 말이 있습디다.”

“서류와 보고서만으로 결정하기엔 제가 아직 일의 숙지가 되지 않아서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빨리 일을 배우죠.”

대훈은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했다.

“직함은 이산데 하는 일을 보면 거의 막내 대리급입니다?”

대훈에게 소파의 상석을 양보한 단유는 그의 오른편 소파에 자리하며 대답했다.

“그렇게라도 빨리 일을 배워야죠. 일단 연단위 예산 조정이란걸 처음 겪다 보니 이렇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잘하고 계시는데. 얼마 후에 있을 이사회 때 못난 꼴 보일까봐 다른 이사들이 전전긍긍한다는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못 들었는데요?”

“저도 못 들었습니다. 하하.”

특유의 개그가 나왔는데 여전히 따라 웃질 못하는 단유였다. 업무는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훈의 개그는 시간이 지나도 배우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본론은 무엇인가요?”

대훈은 단유의 물음에 소파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실은 얼마 전부터 새로운 영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단유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곡팀과 안무팀을 외주 전문으로 돌리며 수익을 거두고는 있지만 소소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본업은 매니지먼트이기에 매니징을 할 연예인이 많을수록 회사의 수익이 늘어난다. 최근 시은의 컴백과 함께 꽤 큰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사실이고 거기에 만족할 수도 없는 실정이니 캐파(capacity)를 늘리지 않으면 안된다.

연습생들은 아직 데뷔 전이고 데뷔를 시킨다해도 당장은 무리니 결국 바깥에서 영입을 해와야 한다는 이야기. 대훈이 ‘얼마 전’부터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회사 설립부터 현재까지 쭉 해오던 작업이었다. 그러나 처음의 계획과는 다르게 많은 스타들을 영입하지 못했고, 지금은 배우 쪽의 세 사람, 가수 쪽의 시은 한 사람 뿐이었다.

집중도의 측면에서는 사람이 적은 게 좋을 수 있으나, 회사가 초기부터 마련한 인력풀을 풀가동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따라서 더 많은 스타 영입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훈이 운을 뗀다는 것은 거의 영입이 가시화되었다는 의미일 테다. 그리고 새로운 스타의 영입은 곧 예산의 극적인 조정이 필요하다는 말과 동일하니, 아마도 그 때문에 단유를 방문했음이라.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단유는 고개를 주억이며 물었다.

“몇 명인가요?”

“한 사람은 거의 확실한데, 다른 한 사람은 아직 반반이에요.”

“두 사람인가요?”

“한 사람은 봄이 되기 전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한 사람은 적어도 여름이 되기 전까지 영입하려고 합니다.”

“그런가요. 일단 들어오기 전까지는 크게 변화가 없을 것 같으니 지금 편성 중인대로 예산안을 짜고 영입이 완료되면 그때 가서 유동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죠.”

대훈의 반응은 단유가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돈 문제가 아닌가?

“영입하려는 두 사람이 모두 배우 쪽입니다.”

처음 대훈이 회사를 설립할 당시에는 어느 한 분야로 치우치지 않는 매니지먼트사를 차리고 싶다고 들었는데, 당장에 회사와 계약한 연예인들은 거의 배우 쪽이다. 이러다 안무팀이나 작곡팀이나 모두 시은에게 전속으로 붙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대훈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두 사람 다 약간의 문제가 있어요.”

“문제요?”

“영입이 거의 확실할 쪽인 그 사람은 현재 회사에 생긴 문제로 인해 계약 종료를 빨리하고 우리 쪽으로 넘어오고 싶어해요.”

“의사를 분명히 한 겁니까?”

“네. 의사야 작년, 아니 우리 회사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계속 전해오고 있으니까요.”

“우리 회사가 만들어지기 전부터요? 대표님이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인가요?”

“저도 그렇고, 이사님도 그렇고요.”

“저요?”

거기까지 설명된 사실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하여 추리하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유진이요?”

“네.”

“걔 아직 계약이 남지 않았나요?”

“남았죠. 그런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거기 회사 대표한테 일이 생겨서요. 지금 그쪽 회사가 내부적으로 비상이랍니다.”

모를 리 없다.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던 중견 기회사의 대표 광식은 의식불명상태에 빠져 병원에 들어가고 한 달간 깨어나질 못했다. 무려 한달을 깨지 못하니 회사는 물론이고 의료계도 한바탕 소란이 났을 정도였다. 뇌파검사를 진행하면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의 뇌활동이 감지되는 반면 의식은 깨어나질 않으니 병원 측에선 언제나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입원한 지 한달이 지나고 어느 날, 마치 지난날의 모습들이 모두 연극이었다는 듯 말짱하게 정신을 차린 광식에 모두가 놀랐었다. 이후의 일들은 병원 측에서 극비로 돌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건너건너 밝혀진 사실들을 추합하면 광식은 ‘지옥같은 곳에서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의사들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엔 섬망증상 정도로 판단했던 의사들은 일관되게 주장하는 광식의 진술에 그의 정신병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문에 그는 깨어나고도 한 달여 이상을 병원에 더 붙잡혀 있어야 했다.

이후 정상 진단을 받긴 했지만, 오랜 기간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던 탓에 몸이 약해져 재활 운동을 받게 되면서 그의 업무 복귀는 계속 미뤄졌고, 그 사이 회사 내부는 엉망이 되었다.

사실 대표 한 명이 없다고 해서 회사의 시스템이 망가지는 곳은 아니었다. 회장님이 병 때문에 담요를 무릎에 두르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도 회사는 멀쩡히 돌아간다. 그러나 문제는 사자가 빠진 자리를 노리는 승냥이 떼와 늑대 무리들이 싸우면서 벌어졌다.

“계파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오히려 소속 연기자들이 피해를 입는 상황이 와버렸죠. 때문에 지난 두 달여 파행을 겪어야 했던 것도 모자라 앞으로의 활동에도 적신호가 떴다는군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군요.”

“거기가 좀 유별난 곳이어서 그런 면도 있습니다.”

중세 군주의 재림이라도 되는 듯이 강압적으로 아래를 휘어잡던 이가 사라진데다 그의 복귀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조짐이 보이자 아래에서 기회만 노리던 몇몇 사람들이 야심을 드러냈고, 마침내는 눈에 보일 정도로 서로를 적대하며 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에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그것이 예전 택윤이 이야기한 ‘정치 싸움’일 것이다.

“그쪽 사정은 더 들어봐야 의미 없는 일이고, 그래서요?”

“계약 만료일은 아직 1년여가 더 남은 실정이에요. 하지만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제가 직접 데리고 다녔던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그렇더군요. 사실 이럴 때 연예인을 빼오는 모습을 보이면 여러 곳에서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새끼 힘들어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강 변호사님과 협조해서 전속계약 해지가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중입니다.”

회사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음으로서 계약 당사자인 갑과 을의 신뢰관계가 깨졌음을 증명하여 계약 해지를 주장하면 되지만, 실제로 그것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법적인 건 강 변호사님이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계시니 아마도 잘 풀리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그래서 유진이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은···.”

“좀 전에 말씀대로 가장 큰 걸림돌은 사실 여론입니다. 아무리 회사가 개판이어도 그 상황에서 계약해지까지 시켜가며 빼내오는 것은 주위에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요.”

“그런가요.”

“그 때문에 유진이가 많이 망설입니다. 혹여 우리 회사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죠.”

회사를 나오고는 싶다. 하지만 회사를 나와 D&D 엔터로 오게 되면 자칫 D&D 엔터가 오명을 쓸 수도 있다. 물론 본인에게도 안 좋은 이미지가 덧씌워질 가능성도 없진 않다.

“설득해주세요. 단유 씨가.”

오랜만에 ‘이사님’이라는 호칭 대신 ‘단유 씨’란 호칭으로 불렸다.

“친구니까 아마도 단유 씨의 이야기라면 잘 듣지 않겠습니까?”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그러죠.”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제 친구 일인데. 대신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뭔가요?”

“반드시 유진을 설득해서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은 못 드립니다.”

“네?”

“대표님 말씀도 들었지만,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본인의 의사인데, 방금 이야기로는 유진이 정확히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불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유진이 오고 싶다는 것도 대표님의 의사가 다분히 가미된 의견으로 들리고요. 해서 일단 유진이랑 이야기를 해보고 설득하겠습니다. 만약 유진이가 정말로 힘들어서 그 회사에 있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때 유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제 1옵션으로 저희 회사로의 이전을 고려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대표는 멍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어, 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네.”

그리고 단유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네. 그렇죠. 한 사람 더 있는데, 이 사람은 솔직히 저희 쪽에서 확신이 안 생기는지라.”

“확신이 없으면 영입하지 않으셔도 무방한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그러자니 또 아쉬움이 있어서요. 현재의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는 편인데, 그래도 지원을 열심히 해주면 잘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 사람이라서요.”

“그런가요?”

“그런데 조금 알아보니까 의외로 그 사람이 단유 씨랑 인연이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저요?”

“네.”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과 관련 있는 연예인? 당장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만의 하나, 대훈이 영입하려던 후보가 가수 쪽이었다고 한다면 갤럭시즈나 가디스R 정도를 떠올렸을 테다. 하지만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로부터 벌써 10년이나 흐른 마당이고 이미 가요계에서 그들의 이름은 사라진 지 오래다.

“누군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