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89화 (889/956)

낙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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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화음에서 병행장조로 넘어가는 부분이 꽤 느낌 있어. 클래시컬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으로 여기를 살리는 포인트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화성악적인 전개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도 들어. 되도록 빨리 벗어날 수 있게 노력하도록 하고. 오케이? 좋아, 일단 오늘은 통과. 그래도 아직 멀었어. 알지?”

“네!”

“그럼 계속 수고하고.”

6개월이 넘는 밀착 교습의 끝에 지아는 혼자 힘으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완성도는 아직 부족하지만 컴퓨터에 저장되는 곡이 하나둘 늘어나다보면 그 부족함도 언젠가는 채워지리라.

창모는 흡족한 표정으로 작업실을 나가는 지아를 바라보다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아의 성장을 봐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일에도 집중을 해야 할 때다.

시은의 새 앨범 작업을 위해 피땀을 쏟았던 후로 한동안 곡 작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충전을 위한 휴식기라는 명분도 있고 창모 만의 루틴으로서 머리에서 지난 작업 당시에 머리를 가득 채웠던 아이디어들과 곡에 대한 단상들을 모두 지워버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충분히 지워버리고 나면 다음은 채우는 시간. 손에 잡히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닥치는 대로 찾아 듣는다. 최근의 유행곡부터 과거의 묻혀진 명곡들까지, 미국의 최신 팝부터 북유럽 무명 가수의 곡까지 그냥 되는대로 듣는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찾아 듣다 보면 자연히 무수한 악상이 뒤섞여 연상된다. 비슷한 전개의 곡부터 엉뚱하리만큼 전혀 다른 장르의 곡들까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창모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느낌으로 추려 새로운 리듬과 멜로디로 발전시킨다. 비슷한 듯 다른 곡. 다른 듯 비슷한 곡.

다음은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꺼내 귀로 들을 수 있게 만든다. 완곡일 필요는 없다. 몇 마디의 멜로디라도 상관없다. 귀로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귀로 듣다 보면 머리로 생각할 때와 다른 이미지가 곡에 겹쳐진다. 구체적인 형상 혹은 모호한 색깔 같은 이미지가 멜로디와 섞여, 전과 다른 새로운 무엇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오롯이 창모만의 유니크함이 섞인 무엇이다. 쉽게 드러나진 않는다. 며칠, 혹은 몇 달이 걸리기도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그 흔적을 쫓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찾을 수 있다.

남은 것은 그것을 하나의 완성된 곡으로 만들어내는 일. 이 역시 단숨에 뚝딱 만들어지진 않는다. 사실 이 과정이 전보다 더 힘들다. 사실 많은 작곡가들이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곡으로 만들 때, 그 곡에 스며드는 익숙함이다. 익숙함은 대부분 새로움을 무의식적으로 배제시키고 편한 방향으로 이끈다. 거기에 굴복해버리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곡, 혹은 아예 표절이라 비난받을 만한 곡이 만들어지고 만다. 때문에 편안함을 버리고 끝없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이 결코 쉬울 리 없으니, 여기서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여기서 자신의 체력과 에너지를 소진하게 된다.

은연중에 그 과정을 머리에 떠올리며 창모는 혀를 찼다. 생각만 해도 지쳐버리고 마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선택한 길인 것을.

“아자!”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고 마우스를 붙잡으려던 창모는 멈칫했다.

‘···우선 커피부터 한잔 할까?’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우선은 카페인을 보충하고 볼 일이다.

****

“어, 오랜만에 뵙네요?”

휴게실에 들른 창모는 거기서 단유와 마주쳤다.

“아, 네. 이사님도 오랜만에 뵙네요. 실장님도. 잘 계셨죠?”

“예. 오늘부터 출근하신 건가요?”

“출근은 이틀 전부터 했는데, 그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던지 정리할 게 많더라고요. 사무실에서 나오질 않았더니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네요.”

“듣기로 오키나와에 갔다 오셨다고 들었는데, 어땠어요?”

“뭐, 나쁘지 않았습니다.”

겨울철 휴양을 위해 동남아나 다른 유명한 곳도 많지만, 너무 멀리 가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대충 가까운 곳으로 다녀왔다는 창모의 말에 매니저는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사에는 별일 없었죠?”

“별일이랄게 있습니까. 매일매일이 똑같이 전쟁터인걸요.”

“하긴 실장님은 연습생들 담당이시니까.”

그 사이 단유가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창모가 괜찮다고 대답하니 단유는 뽑은 커피를 매니저에게 건넸다. 매니저는 ‘환영주’ 대신이라며 건넸고 창모는 주저하다 결국 컵을 받았다. 따뜻하고 구수한 커피향이 코를 자극했다.

“연습생들 아니더라도, 시은이 활동 때문에 회사가 한동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거든요. 이제 거의 마무리될 시점이긴 한데 그래도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겨울이 끝날 때까진 쭉 이대로 갈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축하합니다. 시은이 컴백 곡이 차트에서 1위 했던 거 아시죠?”

“고맙습니다. 오키나와행 비행기에 탈 때 들었어요. 덕분에 마음 편히 쉴 수 있었죠.”

비록 1위 자리는 하루를 지키지 못하고 떨어졌지만, 그래도 일주일간 탑텐에 들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창모의 올해 수입은한껏 불어날 테지만, 지금 당장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지금 창모에겐 지갑의 두께보다 곧 작업에 들어갈 신곡이 더 신경 쓰였다.

“오키나와는 어떻던가요?”

“글쎄요. 사실 제가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주로 해변가에 롱베드 펼쳐놓고 가만히 누워있는 걸 좋아해서요. 다행히 제가 오키나와에 있는 동안 날씨가 꽤 좋아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하늘과 수평선을 즐기기엔 좋았는데, 그게 감상의 전부네요.”

“사람마다 여행을 즐기는 방식은 다른 법이죠.”

“실장님은 많이 돌아다니시는 편인가 보네요.”

“아뇨. 저도 딱히. 그런데 사실 일이 일이다 보니 가끔 애들 따라 돌아다니면 제대로 구경할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늘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다 일과 별개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주로 제가 놓쳤던 풍경 같은 걸 찾아보려고 하는 편이죠. 오키나와도 몇 번 갔었는데, 기억나는 거라곤 왕복 2차선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서 스케줄에 늦지 않아 좋았던 기억 정도네요.”

“실장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어디 저만 그렇습니까? 다들 고생하시죠. 이사님은 어떠세요?”

옆에 단유가 있는데도 너무 창모랑만 대화를 나눴다는 생각에 말을 건넨 매니저. 마침 커피를 뽑아 매니저에게 건네던 단유는 그 질문에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뭐, 사실 예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3년동안 여행을 다녀서요.”

“3년이나요? 어딜요?”

“그냥 여기저기 발길 닿는대로 다녔습니다.”

“전 세계를요? 배낭여행이었나요?”

“비슷한 거였습니다.”

“이야, 역시 이사님은 뭔가 다르시네요. 어? 그럼 대학은요?”

“여행 다녀와서 갔죠.”

“서울대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확실히 평범하신 분은 아니시네요.”

잠시 매니저와 창모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딱히 그러자 한것도 아닌데 서로 들고 있던 커피잔을 들어 건배했다. 잠깐의 정적 속에 커피를 흐릅 들이키는 소리만 울렸다.

그때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여기서 정모라도 하나요?”

세사람의 시선이 목소리를 쫓으니 그곳에 시은이 히죽 웃으며 서 있었다.

“어? 시은 씨? 어쩐 일이에요?”

매니저가 놀랐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쩐 일이라뇨? 저는 회사에 오면 안 되나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요즘 많이 바쁘지 않나 해서 그러죠.”

“오늘은 다행히도 스케줄이 없네요. 근데 그냥 쉬기는 그렇고 목이나 풀려고 왔어요. 빈 연습실 하나 빌리려고요. 안 되나요?”

말마따나 모처럼의 휴일을 맞이한 시은은, 평소의 스타일리쉬한 옷 대신 펑퍼짐한 하얀 후드티에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입고 있었다. 머리도 스타일링을 받지 않아 대충 모자를 눌러쓴데다 검은 뿔테 안경을 걸쳐 집중하지 않으면 시은인줄도 모르고 지나칠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회사 내에서 그런 시은의 스타일을 두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안 되긴요? 아니, 뭐 제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것도 아니지만. ···체력이 좋으시네요.”

마침 휴가에서 복귀한 창모 때문에 여행 이야기를 하던 차였다며, 웃음을 흘리는 매니저였다. 모처럼의 쉬는 날인데 집에서 쉬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에 물었다는 매니저의 말에 시은은 비쩍 마른 오른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어보였다.

“이 언니가 워낙 좋은 걸 많이 챙겨줘서 체력은 짱짱하네요. 그런데 저도 커피 한 잔 해도 될까요?”

시은의 요구에 마침 머신 앞에 서 있던 단유가 한 걸음 물러서며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아, 여기.”

“고맙습니다.”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한발 물러선 단유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는 시은. 눈이 마주친 단유가 물었다.

“눈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아, 이거요? 네. 도수가 좀 높은 안경이죠. 아, 저 안경 쓴 모습은 처음 보시나요?”

“네.”

“많이 못났어요?”

“아뇨. 안경을 쓴다고 얼굴이 갑자기 변하진 않잖아요.”

“인상이 변하죠.”

“걱정하실 정도로 인상이 흉하진 않습니다.”

“그래요? 예뻐요?”

“뭐, 네.”

“대답이 어정쩡한데? 속으로는 못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예쁘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그럼 이사님의 기준에서 저는 별로 안 예쁜 편인가요?”

답이 궁해진 단유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다 시선을 피했다. 피한다고 고개를 돌렸더니 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매니저와 눈이 마주쳤다. 창모 역시 비슷한 시선.

“두 사람, 뭡니까? 방금 그 대화는?”

광대가 도드라질 정도로 입꼬리를 올리며 묻는 창모의 질문에 단유는 정색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두 분, 대화가 거시기하네요. 그쵸?”

“네? 아, 저는 뭐, 노 코멘트 할랍니다.”

매니저는 차마 이사인 단유에게 농을 던지지는 못하겠다는 듯, 하지만 그 역시 창모와 다르지 않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에이, 왜 그러세요. 그냥 한 이야긴데 두 분이 그렇게 나오면 저 되게 민망해지거든요?”

정말로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힌 시은의 말에도 창모와 매니저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투덜대는 시은에게도 구원자가 생겼다.

“뭐하니, 너. 금방 내려온다며? 어, 이사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실장님도 여기 계셨네. 조금 전에 사무실 들렀더니 안 계셔가지고 기다리다 왔는데.”

“나? 왜?”

“저희 로드 새로 붙여주신다면서요? 혹시 정해졌는지 여쭤보려고요.”

“아, 그건 지금 조정 중이야. 정해지면 말해줄게. 한 사람이 급한 사정으로 퇴사한다고 해서 다시 조정해야 돼.”

“근데, 여기서 다들 뭐하세요?”

“뭐하긴, 여기 휴게실이잖아? 잠깐 커피 마시면서 쉬려고 그랬지.”

“언니도 커피 한잔 줄까?”

“됐어. 난 그냥 차나 타서 마실래. 오전에 믹스커피를 너무 마셔서 그런가 입이 텁텁하네. 커피 뽑았으면 가자.”

“그럼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예, 예.”

매니저의 대답을 들으며 시은은 자신의 전담 매니저와 함께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찾아 온 정적.

단유는 자신에게로 몰린 시선에 뻘쭘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두 사람, 수상한데요?”

“수상하긴요.”

단유의 대답에도 매니저는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는 듯, 창모를 향해 되물었다.

“방금 그 대화 정말 수상하지 않았어요?”

“수상했어요.”

창모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누가 들어도 방금 그 대화는 수상했어요. 뭐랄까, 마치 썸타는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대화랄까?”

“그런 거 없습니다.”

단유가 단호하게 부정하나 두 사람은 음흉하다 싶을 웃음을 그리며 물었다.

“시은 씨 외모가 썩 나쁜 편은 아니니까. 안경으로 가려지진 않겠죠.”

“그럼요. 게다가 만인의 연인이라지만,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연애를 한다해도 이상하진 않죠.”

“상대가 회사의 중책을 맡은 20대 남성이라면 어울리기도 하겠죠.”

“덩치도 좋고요.”

단유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적당히 즐기셨으면 이제 각자 업무를 보도록 하죠. 실장님은 예산안 다시 검토해 주시고요.”

“아, 그럼요, 그럼요. 일은 열심히 해야죠. 일도, 연애도 열심히 해야죠. 그럼 실장님, 저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나중에 시간 되시면 같이 술 한잔 하실래요? 꽤 즐거운 안주거리도 있는데 아마 기분 좋은 술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그렇네요. 적당한 때에 한 번 뭉치죠.”

창모가 먼저 휴게실을 나간 후, 매니저도 웃으며 단유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이팅입니다.”

비록 놀림감이 된 것 같지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 곳 사람들과 가까워졌다는 기분도 들었으니까.

다만 오해는 사양하고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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