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88화 (888/956)

낙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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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겨울의 의미는 단지 평소보다 춥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춥다고 회사 출근을 미룰 수 없고, 눈이 많이 내린다고 결근하는 경우도 드물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표정으로 아침 지하철에 올라 회사로 나서는 사람들에게 한겨울 차가운 바람은 그저 귀찮은 장애물 정도다.

학생들에겐 다를 수 있다. 다름 아닌 겨울 방학 때문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와 문제집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한시적으로 피할 수 있는 기간이다. 물론 공식적인 겨울 방학과 별개로 대부분은 ‘자율’―이라 쓰고 ‘의무’라고 읽는―보충수업을 듣기 위해 다수의 학생들은 학교로 향한다. 어떤 이들은 학원으로 향하고, 어떤 이들은 아르바이트를 위해 길을 나선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바쁘다.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겨울인지 봄인지도 모르고 지나간다.

D&D 엔터테인먼트도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바쁘다. 방송 활동 종료를 앞둔 시은이었지만, SNS를 비롯 각종 언론 홍보는 여전히 활발히 진행중. 연말연시를 맞아 몰려드는 행사 섭외 덕에 시은은 쉴 틈이 없다. 덩달아 그녀를 지원하기 위한 회사의 인력들도 풀가동되어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 계절과 상관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은 역시 연습생들. 사시사철 덥거나 춥거나 상관없이 최적의 온도 하에서 연습에 매진할 수 있도록 설비된 연습실에서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던 연습생들은 잠시 쉴 틈이 생겨 바닥에 주저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스키장 가봤으면 좋겠다.”

슬기의 가벼운 투정에 지서가 맞장구쳤다.

“나도. 나 한 번도 스키장 못 가봤는데.”

“정말요?”

지서는 팔자 눈썹을 만들고는 처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병상련이라는 듯 손을 맞잡고 구슬픈 눈빛을 교환하던 슬기가 옆에서 쉬고 있던 아름에게 물었다.

“언니는 가봤어요?”

“그냥 몇 번. 친구들이랑 갔었지.”

“재밌어요?”

“하루 종일 보드 타느라 지치는 줄도 모르다가 숙소에 돌아오면 몸살나서 다음날 못 일어나고 그랬어.”

“그래도 한번 타보고 싶다.”

마침 연습실에 들린 매니저가 그 대화를 들었다.

“실소리 말고 연습들이나 해라. 너희들이 지금 놀러 다닐 군번이냐?”

벌떡 일어나 매니저를 맞이하는 가운데, 시화가 물었다.

“군번이 뭔데요?”

“아유, 군번도 모르는 핏덩이들이 놀 생각만 하니까 실력이 안 느는거야. 실력도 안 되는 애들을 데뷔시킬 회사가 어딨어?”

딱히 악의가 없는 빈정거림이었다.

“실장님, 저희 엠티 같은 거 안 가요?”

이제 회사에 들어온지 거의 1년이 다 되가는데,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회식도 했었지만, MT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며 투정하는 보민에게

“데뷔하면 엠티 보내준다.”

매니저는 딱 잘라서 바람들지 말라고 대답했다.

“마치 대학가면 소개팅해도 된다는 이야기랑 비슷하게 들리네요.”

“대학 안 가도 잘만 남자 만나고 다니지 않았냐, 니들?”

“저희 안 그랬는데요?”

지윤의 대답에 매니저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너는 안 그랬을 거 같다.”

“와, 실장님, 대박. 성희롱.”

“성희롱은 무슨. 네 입으로 그랬잖아? 모쏠이라고.”

“실장님!”

“됐고, 요즘 많이 한가하지?”

“아니요?”

“전혀 안 한가한데요?”

“에이, 니들 한가하고 여유가 넘치니까 숙소에서 몰래 햄버거도 사먹고 그러더만.”

“······.”

“먹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몰래 먹을 작정이었으면 제대로 치우기나 할 일이지, 고맙게도 싱크대에 감자 튀김을 그대로 올려놨더라? 다 안먹었으니까 칭찬이라도 해달라고 티내고 싶었던 거야?”

“······.”

“아이고, 저 눈들 좀 봐라. 아주 지진이 났다, 지진이 났어. 내 말했지? 몰래 먹어도 들키지만 말라고. 그런데 어째 들키고 그러냐? 그럼 내가 조용히 넘어갈 수가 없잖아? 안 그래? 그래서 특별히 오늘 긴급 체중 검사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아, 실장님!”

연습생들의 귀여운 항의가 매니저에게 먹힐 리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매니저의 모습에 지윤이 투덜거렸다.

“체중 검사한지 며칠 안 됐는데.”

“그래도 내가 양심이 있어서 지금 온거야. 다들 레슨 제대로 받았지? 열심히 땀 흘린 사람은 그래도 무사 통과할테고, 만약 살이 찐 사람이 있으면 몰래 취식한 죄에다 레슨을 게을리 받은 죄까지 추가로 적용할 생각이다.”

“안 먹었는데 살찐 사람은요?”

경빈이 묻자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안 먹고 살이 찐 사람이 있을까?”

“저 원래 살이 잘 찌는 체질이란 말이에요.”

“너랑 나, 우리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댈까? 의심스러운데?”

“한 번 봐주시면 안 돼요?”

“네가 먹었어?”

“아니요?”

“그런데 왜 미리 겁을 내? 혹시 몸무게 재 봤어?”

“그건 아니고요.”

“아니면 됐어. 시화야, 체중계 들고 와라. 지금 당장 검사 하자.”

시화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시화는 몸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백의 시선이 쏟아져도 매니저의 시선 하나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때 그들을 구원하러 온 이가 있었으니,

“여기 계셨네요?”

단유가 등장하자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안녕하세요!”

박력이 넘치는 인사에 오히려 곁에 있던 매니저가 놀랄 정도였다.

“와, 사람 차별하네? 니들?”

정작 인사를 받는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실장님 내려가셨다는 이야기에 사무실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모처럼 연습생 분들도 뵐겸 왔습니다.”

단유의 대답에 보민이 오른손을 번쩍 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사님 자주 오시면 안 돼요?”

“쯧,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 이건 그냥 조금 봐주면 끝간데 없이 기어올라요. 아무튼 무슨 일이십니까?”

“어, 그게··· 혹시 다음 분기건 발표하셨나요?”

“아, 그건 이제 곧 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녀석들 몸무게부터 재고 나서요.”

“아아, 실장님!”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되도않는 애교에 넘어갈까봐? 그러기엔 아침엔 봤던 식은 감자튀김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단유가 보니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매니저와 연습생들이다. 서로를 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괜히 매니저라고 권위적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연습생들이 마냥 어려워만 하는 것도 좋진 않으니 저런 관계 속에서 소통만 잘 이루어진다면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더욱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룰을 위반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반성하고 시정한다면 또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거겠죠?”

“네?”

“봐주시는 게 어떨까요?”

매니저는 잠깐 단유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습생들을 향해 말했다.

“이 녀석들, 정말 안 봐주려고 했는데 이사님 때문에 봐주는거야.”

“이사님, 고맙습니다!”

“야, 니들, 왜 이사님한테 고마워해?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고맙습니다, 실장님.”

“아주 엎드려 절받기구만. 아무튼 말이 나온 김에 발표할게. 통합반 레슨은 이번 달로 마지막이다. 다음 달부터는 액터 클래스와 뮤지션 클래스로 나눠서 커리큘럼을 진행하기로 했다.”

대충 짐작은 했던 연습생들이었다. 전부터 겨울이 끝날 때쯤부터 반이 나뉠 거라 했으니, 매니저의 발표는 그리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리고 너희 역시 이제는 반을 나누게 되고 해당 클래스에 속한 연습생들은 보다 전문적인 레슨을 받으며 데뷔를 준비한다.”

“정말 데뷔하는 거예요?”

“준비라고 했다? 실력이 안 되는데 어떻게 데뷔를 시켜줘?”

그렇게 면박을 준 매니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다다음 주부터 희망 클래스를 접수한다.”

“회사에서 정해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정하기 전에 우선 너희들의 희망 지원도 반영하고자 하는 거야. 물론 아무리봐도 가수의 소질이 보이지 않는데 뮤지션 클래스를 지원한다고 하면 회사는 합당한 절차에 따라 클래스 평가를 실시하여 반을 조정할 생각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럴 사람은 그리 없을 거라고 본다. 지난 월평에서 두 클래스에 대한 평가를 간접적으로 했으니 자신이 어디에 소질이 있는지 헷갈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니까.”

연습생들은 매니저가 발표한 내용에 생각이 많아진 얼굴들이었다. 분명 처음 통합반을 만들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월평들을 거치며 자신이 어디에 소질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재능이 부족했던지를 스스로 실감할 수 있었기에 회사 측의 제안을 그리 간단히 여길 수 없었다.

당장에 슬기만 해도 처음엔 배우 클래스를 지원할 생각이었지만, 월평들을 거치며 자신이 안무 습득력이 좋고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은 바, 지금의 선택이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었다.

연습생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결정은 2주 후에 하겠노라 전달한 매니저는 단유와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이사님, 저희 밥 사주시면 안 되요?”

연습실을 나서기 전, 단유를 향한 시화의 외침에 매니저가 고리눈을 뜨며 시선을 던졌고, 움츠려든 시화를 향해 단유는 미소를 보였다.

“원래는 그럴까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밥 사드린다고 했다간 실장님께 미움 받을까봐서요. 다음에 기회가 되는대로 사드리겠습니다.”

“약속하시는 거죠?”

“그럼요. 날짜, 시간, 경비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됩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매니저와 함께 연습실을 나와 윗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분기 커리큘럼 예산 기획안을 실장님이 작성하셨다고 하길래요. 거기에 대해 잠깐 상의할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딱히 문제라고 한다면, 초과분이 허용치를 넘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 그렇습니까?”

“연습생들에게 애정을 많이 가지고 계시다는 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만, 회사의 현 예산으로는 모두 감당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기도 했고요, 차후 연습생들의 정산에 있어서도 문제 소지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정산···이요.”

정산 문제는 민감하다. 어쨌든 회사는 영리를 추구하는 단체고,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지출을 줄여야 하는 법이다. 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연습생들의 기량 향상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차후 연습생들의 정산에는 크게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어차피 표준계약서에 따라 정산 될텐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여태까지 그런 이유로 예산 집행이 미뤄진 경험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매니저였다.

“표준 계약서에는 정산의 의무만 있지, 어느 정도의 투자금을 허용하고 언제까지 정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으니까요. 회사가 마냥 투자금 회수 기간을 늘려버리게 되면 아티스트들이 힘들어지잖아요.”

“흠.”

“여태까지의 관례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언제나 효율적인 예산 집행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느 한쪽이 유리하거나 혹은 어느 한쪽이 불리함을 참아야 하는 경우는 없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정할 수 있습니까? 당장 데뷔 후에 어느 정도의 수익을 거둘지도 측정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도 데뷔 후 인기를 끌지 못하면 말짱 황이다. 그런 이유로 파산하는 기획사가 한 둘인가. 반대로 적은 투자에도 대 성공을 거두는 케이스가 없지 않다. 하지만 그건 문자 그대로 만의 하나인 경우. 그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예산을 집행하는 회사는 없다.

“불확실성은 예산 관리의 가장 큰 적이죠. 하지만 그걸 미리 추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게 예산을 관리하는 부서의 몫이고 제 일인 거죠.”

매니저는 손을 격하게 흔들었다. 뭔가 어려워지려는 타이밍이라 다급히 말리는 모양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서···.”

“제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죠. 그 후에 시간이 맞으면 같이 점심이라도 하고요.”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단유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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