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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887화 (887/956)

낙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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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럭하는 목소리도, 극적인 화해의 순간도 모두 감춰버렸던 돌풍은 금방 사라졌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놀란 매니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칼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며 바람이 불어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그 바람은 자신이 보낸 것 아니라는 듯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우와, 우와’ 거리다가 옆에 단유가 있다는 것에 생각이 닿았는지,

“이사님은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물었다.

“그냥 바람이 분 건데요.”

단유는 겉에 입은 검은 패딩을 툭툭 쳐서 먼지를 털어냈다. 좀 더 세밀하게 바람을 조절한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바로 옆에 매니저가 붙어 있던 상황이라 단유도 바람의 영향권에 들어야 했다.

“눈도 못 뜰 정도로 센 바람이었는데요? 순간 어디 하나가 찢겨나가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진정하시죠.”

손가락을 세워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는 단유의 여유로운 음성에 매니저는 자신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걸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였지? 갑자기 뭐야?”

“와, 나 살면서 이런 바람 처음이야.”

“난 무슨 강풍기 틀어놓은 줄.”

“강풍기도 이 정도는 아닐걸? 내 머리 엉망이지?”

“너 옷에 먼지 장난 아니다.”

다들 놀라고 정신이 없는 모습이, 매니저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었다.

역시 이상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단유라는 것을 확인한 매니저의 눈은 다음 순번으로 자연히 연습생들을 찾았다.

“어?”

이 난리에 어울리지 않는 또 다른 모습이다.

“쟤들은 뭐야?”

갑작스런 돌풍에 놀란 나머지 서로 껴안았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조금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부딪치던 두 사람인데?

****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리나지 않게 울던 아름이 주변의 산만한 분위기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틀어 주변을 보니 아름과 슬기가 이러던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던 모양. 흐트러진 몰골들과 어수선한 움직임, 그리고 모두가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던지는 시선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마치 산수화처럼 멈춰있는 조용한 경물만 보일 뿐이다.

단서를 찾지 못해 어리둥절할 뿐인 아름은 이내 자신의 품에 있는 슬기를 인지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슬기를 밀어내며 바라보니 눈물에 아이라인이 번진 눈을 꼭 감고 있다가 고개를 들기 힘든지 아래로 떨군다. 그리고 함께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 잡고 있는 어깨에서 미세한 떨림이 계속 이어진다.

문득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거란 생각과 보이면 안 될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슬기야, 누가 보면 우리, 무슨 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다.”

아름의 말에 슬기는 고개를 한 번 털며 소매로 얼굴을 감췄다. 패딩이 워낙 두꺼워서인지 슬기의 얼굴이 한 번에 가려진다.

엉뚱하게도 작은 슬기의 얼굴 크기가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새 눈가의 젖은 자국을 닦아낸 슬기가 눈을 들어 아름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언니.”

무려 석 달 이상이 걸려 나온 사과였다.

“아냐, 나도 언니답지 못했던걸.”

“죄송해요, 언니.”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는 건, 차마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치기어린 잘못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고해하기가 부끄러운 탓이다.

“사람들 쳐다본다. 그만 눈물 닦어. 보는 사람도 많은데.”

그제야 슬기는 아름이 두터운 패딩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가려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시간 많잖아.”

여기서 모든 이야기를 꺼내며 신파극을 찍을 필요는 없다.

“가자, 아이들 기다린다.”

아름은 슬기의 손을 잡고 끌었다.

****

“원래 화해는 극적인 법이죠.”

단유가 아무렇지 않게 매니저의 의문에 답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뭘요?”

“저렇게 될 거란 거 말입니다.”

“예상은 했죠. 서로 대화를 나누면 충분히 화해할 거라고.”

이유는 모른다. 저 둘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하지만 정말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를 의식하는 순간 미세하게 나타나는 머뭇거림.

폭포수처럼 아래로 내리꽂히는 증오나 화염처럼 맹렬한 미움에는 머뭇거림이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저렇게 빨리 풀 수 있었던 거라면 여태 왜 그랬단 말인지.”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란 말이 있잖아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친다는데, 자신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상대를 계속 미워만 한다는 게 오히려 더 힘든 일이겠지요. 게다가, 저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이 세상을 살면서 언제나 좋은 사람과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산다는 것은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사실 동화책에서도 좋은 사람만 나오지 않는다. 독이 든 사과를 건네는 사람도 있고, 두건을 쓰고 거짓된 목소리로 기만하며 기회를 노리는 이도 있다.

하물며 현실은 어떠한가. 마주하기가 조금 껄끄러운 사람도 있고, 조금 싫은 사람도 있다. 저놈과는 한 하늘에 살 수 없다, 할 정도의 사람은 없을지 몰라도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싶지 않다, 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콱 죽어버려라, 저주를 퍼부을 때도 있고 다시 마주치면 죽여버린다, 협박하고픈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관계에서 보통의 대처법은 상대를 피하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관심을 끊거나,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을 피한다.

만약 피할 수 없는 공간에 함께 있게 된다고 해도 서로 못 본 척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방식은 바로 참는 것. 사실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그런 경우라면 굳이 감정의 소모를 걱정할 이유가 적다.

문제는 자주 마주쳐야 할 사람이 싫어지는 경우다.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동료가 가치관이나 업무의 처리방식에서 마음에 들지 않아 싫어지는 경우, 혹은 그의 성격 등이 본인과 상극이라 싫어지는 경우가 문제다.

어려운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 불편한 농담을 쉽게 뱉는 사람, 거슬리는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이 같은 동료라면? 참는다. 그게 어른의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도 아마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대처했던 모양이다. 못 본 척. 혹은 봐도 무시하거나, 참는 것. 그것이 저들이 오늘까지 해왔던 일일 테다.

그런데 단유의 말은 저들이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화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순하죠, 아이들은. 생각이 짧다는 게 아니라, 감정이 연소되는 방식이 단순하다는 겁니다. 복잡한 연산을 거쳐 감정을 소모하는 게 아니라, 순간적이며 휘발적으로 감정을 연소시킵니다. 필요한 건 오직 시동을 거는 일이죠. 그게 지금의 대화였던 거고.”

어린 애들이 씩씩거리며 앙증맞은 주먹으로 서로를 때려도 한 번 울고 나면 싸움은 끝이다. 그리고 화해하고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운동장으로 나가 함께 공놀이를 한다.

“그게 굳이 어린이들의 방식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힘듭니다만?”

“어른의 경우라면 화해를 위한 대화 속에 수많은 계산과 복잡한 어휘들이 포함되어야 하죠. 다양한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복잡한 감정과 불확실한 결과를 예상하거든요.”

그랬던가? 매니저는 어느새 하나가 된 연습생 무리로 시선을 던졌다. 하긴 저들은 나이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른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이들이긴 했다. 그러나 저런 이들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테지. 어른이 되고 나면?

계약이 문제가 되고, 불화가 원인이 되며, 팀은 깨지고, 소속사를 이전하고. 이 바닥에서 흔한 전개다. 그리고 그게 어른의 방식이다.

****

비록 그들이 화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매니저는 스스로의 의무와 책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간 뒤, 매니저는 따로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 나한테 할 이야기 없어?”

“······.”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아름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 날의 일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스스로의 행동을 미화하려하지 않고, 슬기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는 수준에서 이야기를 풀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예전이었으면 두 사람에게 뭐라도 말을 했겠지만, 지금은 서로 화해를 했다고 하니 딱히 제재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알아서 풀었다니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연습생 내에 어떤 형태의 불화도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곧바로 나한테 이야기를 해줬으면 한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네.”

그런다고 과연 앞으로 그런 일들이 잘 이야기되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밖에서 맞고 쪼르르 달려와 고자질을 할 나이의 어린애들도 아니니까.

“나도 잘못했다.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의도치 않게 방관한 셈이니 내 잘못도 있다. 미안하다.”

여기서 굳이 매니저가 사과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이들에게 사과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매니저는 사과했다. 당황하는 표정으로 되려 사과하려 드는 아이들을 말리며 매니저는 말을 이었다.

“나도 이번 일로 많이 깨달았다. 단지 너희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만이 아니고, 단지 너희가 데뷔하는 날까지 끌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데 말이야.”

물론 매니저가 이제껏 강압적으로 아이들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방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 아이들을 좀 더 세심하게 살피고 보살피는 애정이 필요한 일이다.

그 마음을 스스로 다지는 의미에서 사과를 하는 매니저였다.

“함께 지내다 보면 싸울 수도 있지. 가족끼리도 싸우는 데, 하물며 남이잖아? 하지만 그래서는 여기서 생활하기 힘들지. 말로만 언니 동생하는 남이 아니라, 정말 친언니, 친동생 같은 가족이어야 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전우가 되어야 하는 거야. 알겠지?”

마지막으로 당부의 한마디도 남기고 매니저는 둘을 다시 숙소로 돌려보냈다.

****

“많이 혼났어요?”

“아니, 안 혼났어.”

“정말요? 다행이다.”

“그래도 잘 됐어요. 두 사람 화해해서.”

“우리 막내가 꽤 마음 고생이 심했나 보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마음 고생은요···. 저보다 언니들이 더 힘들었겠죠.”

“우리 막내는 어떻게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깊을까? 네가 언니들보다 낫다.”

“그럼 화해 기념으로 오늘 파티하는 거 어때요?”

“무슨 파티?”

“이런 날 파티를 해야죠.”

“어떻게?”

“보쌈 시킬까요?”

“뭐야? 그냥 보쌈 먹고 싶다는 핑계잖아?”

“그게 그거죠. 싫어요?”

“돈 있어?”

“저 막내잖아요?”

“와, 막내를 이런 데서 써먹네?”

“그동안 여러 사람 힘들게 했으니까, 사죄의 뜻으로 내가 쏠게.”

“우와! 아름 언니 짱!”

“근데 들키면 어떻게 해?”

“지금 막 실장님 돌아가셨으니까 다시 오지는 않지 않을까요?”

“그래도 모르지. 그리고 갑자기 내일 몸무게라도 잰다고 하면?”

“에이, 오늘 그렇게 오래 걷기 했는데 설마 보쌈 먹는다고 살이 찌겠어요? 플러스 마이너스로 쌤쌤.”

“그건 네 생각이고.”

“다른 사람은 어떤데?”

“저는 콜! 아름 언니가 쏜다는데 어떻게 안 먹을 수 있어요?”

“일단 전화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전화하지?”

“전화 할 필요 없어요. 직접가서 받아오면 되죠.”

“우와, 시율이 네가?”

“이럴 때 제가 솔선수범해야죠.”

“네가 뭔데?”

“언니들이 사오겠다고 하기 전에 지들이 먼저 나서서 사오겠다고 해야 할 텐데, 가만히 있잖아요?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제 탓이니까 제가 나서야죠.”

“어, 저도 같이 갈게요.”

“채린이 넌 시율이 간다니까 그냥 따라가려는 거잖아?”

“뭔 상관이니? 자, 여기 카드.”

“감사합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날 저녁 파자마 차림으로 엉덩이를 씰룩이며 춤추는 지윤과 옆에서 보쌈 뼈다귀를 마이크 삼아 노래 한 곡조 뽑아내는 보민의 모습에 웃다가 벽에 뒷머리를 박고 아픈 척 하는 슬기, 그런 슬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시화, 괜찮냐며 걱정하는 시율, 그리고 괜찮다고 손을 내젓는 지서와 왜 언니가 괜찮냐며 타박하는 경빈과 이런 분위기와 별개로 젓가락을 놓지 않는 채린,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며 미소를 짓는 아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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