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86화 (886/956)

낙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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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찍이서 바라보니 아름과 슬기를 두고 다른 아이들이 자리를 피해주는 모습이다. 매니저 역시 그 광경을 발견했다. 미간이 좁혀지고 깊은 주름이 생긴다.

“별일 없을 겁니다.”

단유가 걱정하지 말란 뜻으로 말을 건넸다. 매니저가 단유를 살피곤 다시 아름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모르는 일입니다. 저 나이대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천변만화하니까요.”

단유는 모르겠지만, 숱한 경험을 가진 매니저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연습실 안에서 다투다 쫓겨난 연습생들을 경험한 적도 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의 대면 장면을 마음 편히 바라보기 어렵다. 진작에 눈치챘어야 하는데.

“아무리 주의 깊게 살핀다 해도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아닐까요?”

거기까지 이야기한 단유는 갑자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반쯤 흙에 묻혀 있던 바래진 병뚜껑을 주워 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는데도 이렇게 발견되지 못한 쓰레기가 있는 것처럼요.”

작아서 눈에 띄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는데, 제대로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단유는 파헤쳐진 바닥을 발끝으로 문질러 평평하게 만들었다.

“아시겠지만, 인간이 접하는 수많은 외부 정보의 대부분은 시각을 통합니다. 그런데 외부 정보라는 게 좀 많나요? 당장 여기서도 우리 눈에 담겨지는 수많은 개체들과 그 개체들의 교차되지 않는 특징들, 혹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현되는 것들까지 포함하면 우리의 뇌는 이미 한계를 초과하는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한계 초과량의 정보로 인해 과부하를 일으킨다거나 하는 일은 없죠. 왜냐하면 우리의 뇌는 시각적으로 수집되는 정보들의 일부만 취사 선택하니까요.”

단유는 손에 든 병뚜껑을 검지와 엄지로 잡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중간 부근에서 반쯤 접힌 자국이 있는 병뚜껑을 마치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던 골동품이라도 되는 듯이 앞뒤로 돌려가며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취사 선택의 메커니즘이 우리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발생시킵니다. 왜냐하면 ‘중요도’를 파악하는 개인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누군가에겐 이 쓰레기가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어 찾아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에겐 길가에 널린 돌멩이와 같은 정도의 중요도로 인식되어, 멀쩡히 보고도 ‘쓰레기’라는 정보로 선택되지 않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런 듯도 싶다 여겨,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는 매니저였다. 아주 가끔 멀쩡히 눈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못 보고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단유의 설명 대로라면, 그건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가 처리하지 않아 생긴 오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엔 어딘가 꺼림칙하다.

“그냥 작아서 안 보였던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작아서 안 보인다면 계속 지켜보고 있어도 안 보여야 하는 거죠. 가령 파리의 겹눈을 이루는 수많은 낱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요. 그건 물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각 기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뇌의 취사 선택이 시각 정보를 차단하는 거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런가.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게 있잖아요. 생각을 바꾸니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는 말. 속뜻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바뀐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세상을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정보 자체가 바뀐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겁니다.”

거기까지 듣다보니 문득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지 처음을 잊어버렸다. 뭐였더라?

“사람 역시 수많은 정보들을 담은 개체입니다. 그 사람의 표정, 눈동자, 어깨의 움직임, 손가락의 무의식적인 떨림 등이 모두 정보화되어 해석될 수 있죠. 그러니 말씀드린 겁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싸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그런 뜻도 있지만, 설령 싸우더라도 그 전에 가서 말리면 된다는 뜻입니다.”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전조가 보이면, 그때 가서 말리면 된다.

“아.”

매니저는 탄성을 뱉었다. 눈앞의 이 사람, 몇 번을 생각해도 비범하다.

****

“안 춥니?”

라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차가운 바람보다 더 차가운 표정으로 앞을 향해 걸어가는 슬기를 바라보며 아름은 생각을 정리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슬기와 말을 섞지 않은 건 슬기가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자신도 자존심에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었다. 만약 말을 나눈다해도 그전에 먼저 슬기가 아름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은 내가 잘못한 게 없어.’

라고 이제껏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솔직히 말하면, 크게 달라진 생각은 없다. 그때 자신이 그렇게 나섰던 것이 결코 보민을 얕보거나 보민의 병을 중히 여기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단지 우선 순위를 따질 때, 그녀에 대한 걱정보다 레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레슨을 다 받고 나서 그녀에 대한 걱정을 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만일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라면 문제였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생각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고집으로 슬기와 마주해선 안 된다. 몰래 주먹을 쥐며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 넣어보는 아름.

“주먹 쥐었는데요?”

단유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 매니저를 힐끔 바라본 후, 고개를 흔들었다.

“손바닥을 펼치면, 그것도 싸움입니까?”

뺨을 올려붙이려는 사전 동작이냐는 물음에 머쓱해진 매니저가 입을 다물고 다시 앞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우리, 나중에 배우반과 가수반으로 나뉘면 이렇게 대화 나눌 기회가 없어질지도 몰라.”

배우 지망인 아름과 반대로 슬기는 가수, 아이돌이 지망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 지금 잠깐 불편해도 나중에 반이 나뉘면 마주칠 일도 적어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고 말이야.”

“그럼 신경 쓰지 마요.”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톡 쏘는 슬기의 대꾸에 아름은, 아주 잠깐, 욱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먼저 화해 분위기를 만들자고 자청한 마당에 스스로 망쳐버리면 안 된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대꾸를 했다는 것을 좋은 신호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반이 나뉘어도 우린 같은 회사에 속한 연습생이고, 한 건물에 계속 있다보면 어떻게든 마주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때마다 서먹하게 시선을 피하며 불편한 감정을 매번 되새기고 싶지도 않고.”

“전 상관없거든요. 그리고 언니가 뭐라고 하든, 전 언니가 불편해요.”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데?”

“그냥 이대로 지내요. 각자, 자기 할 것만 하면서 지내자고요. 별 문제 없었잖아요? 아무도 뭐라 하지도 않고.”

자기 할 것만 하자고? 순간 발끈해서,

“그래서 넌 유치하게 편가르기나 하면서 나 왕따 만들고 싶었던 거야? 어린애들처럼?”

이라고 따질 뻔했다. 아름은 반대쪽으로 고갤 돌리고 천천히 숨을 뱉었다. 길고 느리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요?”

저건 위험 신호가 아니냐는 매니저의 질문에 단유는 담담하게 답했다.

“정답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겠죠.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다면 말이에요. 그러니 대화를 나누다 보면 화가 나기도 할 겁니다.”

단유가 사전에 싸움을 막을 수 있으니, 일단은 두 사람이 대화로 풀 수 있게 시간을 주자고 했지만 매니저는 여간 조마조마한 게 아니었다. 회사 안이었다면 두 사람을 회의실이나 연습실에 가둬두고 지금처럼 대화로 풀어보라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은 열린 공간 아닌가. 추운데 식은땀 나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매니저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너나 나나 어린애 아니잖아?”

“그래서요?”

“너랑 나 때문에 신경 쓰는 아이들도 불편해지잖아.”

“불편할 거 하나 없었거든요? 조금 전까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그리고 실장님이나 다른 회사 사람들이 과연 우리 두 사람, 이러는 거 알면 어떻게 되겠어? 그런 것도 생각해 봐.”

“그래서 어쩌자는 거예요?”

“우리 두 사람 사이 문제, 되도록 좋게 해결하자고.”

“어떻게요?”

“나부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때 일,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여태 앞만 보고 대답하던 슬기가 목이 부러질까 염려될 정도로 고개를 돌리고 아름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여겨질 정도로 매섭다.

“인정할 건 인정할게. 너한테 대했던 행동, 비록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내가 똑같이 그렇게 한 건 내가 잘못한 거야. 그건 언니답지 못한 행동이었고 그건 잘못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너한테 연습실 나가지 말라고 했던 건, 단지 네가 싫다거나 보민이 걱정되지 않아서는 아니었어. 나도 보민이 많이 걱정했어. 하지만 난 맏언니로서 다른 사람들도 신경 써야만 했고, 그런 의미에서 레슨에 집중하지 못하는 연습실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쉬는 시간마다 나가는 게 다른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 핑계 대지 말죠? 그냥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꼬장부린 거잖아요?”

“그런 거 아냐. 정말로. 내가 널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어?”

“모르죠, 그건. 언니 속을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그 속을 이야기하는 거야. 네가 싫었던 게 아니라고. 네 행동, 네가 보민이 걱정하는 마음 다 알아. 하지만 그때 우리는 월평을 앞두고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고 레슨에 일분 일초 집중해도 모자랄 시기였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날은 어느 때보다 어수선했고 선생님도 레슨 들어와서 정신 못차리냐고 한 소리 하기까지 했었지. 그런 상황에서 나까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래도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아니!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의 문제에요, 그건. 언니는 보민이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했잖아요. 평소에도 그랬어요, 언니는. 다른 사람 일에 관심 없다는 듯 행동하고. 그래놓고 갑자기 연습실 분위기를 잡겠다고요? 아무한테나 가서 말해봐요. 다들 핑계라고 생각할 걸요?”

“오해야. 평소의 난 그저 집중이 필요했을 뿐이야.”

“흥, 누구는 필요하지 않나?”

“솔직히 말하면, 난 너를 비롯해 우리 연습실에 있는 아이들 중 가장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똑같은 시간, 똑같이 노력해도 가장 실력이 떨어져.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 이런 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고, 연습한 적도 없으니까. 게다가 재능도 없고. 한때는 배우 지망인 내가 왜 가수들이나 하는 노래나 춤을 연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회사에서 괜히 시키는 건 아닐 거란 생각도 들고, 만약 여기서 포기해버리면 이제껏 노력한 게 아깝잖아? 그래서 더 집중하고 노력해야만 했어. 그 때문에 남들 쉴 때도 더 집중하고 더 많이 연습하려고 했던 것 뿐이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슬기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들에게도 ‘저 언니는 실력도 안 되면서’ 라는 말을 종종 해왔다.

“누구는 노력 안 해요? 보민이 아프기 전까지, 보민이랑 제가 연습실에 제일 오래까지 남아서 연습했거든요?”

“알아. 아니까 너나 보민이를 싫어하지 않았다는 소리야.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잘 아는데 왜 내가 널, 보민이를 싫어하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슬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북받치는 감정을 느꼈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왜 그랬어요? 싫지 않다면서 왜 저한테 그랬어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제껏 사람들이 자신들을 의식할까봐 주의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있었는데 순간 이성을 잃은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 슬기의 눈에는 오직 마주보고 있는 아름만 보일 뿐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보고 있던 아름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똑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미안해.”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전까지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끼는 동생들, 이라고. 그런 동생이 오해를 한 것이, 이렇게 마음 아프게 만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어이구, 갑자기 무슨 바람이···.”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여서 매니저는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매니저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차갑고 따가운 돌풍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다들 몰랐다. 그 바람이 아름과 슬기만 피해 불었다는 사실을.

‘별일 없을 거라니깐.’

주의 깊게 살피며 바라보고 있으면 사전에 막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쓰고 있던 모자가 멀리 날아갈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에 다들 깜짝 놀라고 있을 때, 그 돌풍의 한가운데 두 사람이 고조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를 안고 토닥이는 장면은 오직 단유만 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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