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85화 (885/956)

낙서(1)

-------------- 885/952 --------------

“고맙습니다. 이사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추운 줄도 몰랐네요. 신기하게.”

입술로 호선을 그리며 웃음을 흘리고는 앞으로 걸어가는 아름. 단유는 슬쩍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강이 보일 뿐이겠지만,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막이 있어 그쪽에서부터 불어오는 강바람은 차단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단유 쪽에서 바람을 일으켜 강바람과 맞부딪치도록 하여 상쇄시키는 중이다.

‘설마 눈치챘으려고.’

그저 머리가 심하게 흩날려 엉망이 되고 싶지 않았던 작은 바람으로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때, 매니저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매니저. 단유가 그에게로 고개를 틀자, 단유의 덤덤한 시선에 점차 눈꺼풀이 떨리고, 허리 옆에 갈데없이 놓여있던 손이 절로 앞으로 모인다. 불안함과 상관없이 상관에게 복종하는 부하직원의 습관적 공손함이 몸에 배어있다.

“그냥 이야기 조금 했어요.”

“무슨 이야긴지 알 수 있습니까?”

단유는 시선을 돌려 앞서 걸어가는 연습생들을 보며 대답했다.

“그냥 이 길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길이요?”

“네. 저는 단지 길을 낸 것만으로는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게 고맙다네요.”

“그게 무슨?”

단유는 효율적으로 이야기를 축약시켜 전달하는 법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까 보니까 아름 씨가 다른 연습생들과 섞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아름이가요?”

“티를 내진 않지만 꽤 외로워 보이길래 옆에서 같이 걸어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 아,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그냥 조용히 걸을까 하다가, 그래도 명색이 이사잖아요? 그래서 이 둘레길에 빗대어 조언을 해 줬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저 조언만 했을까, 의심스러운 가운데 단유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일단은 고맙다고 하던데.”

“네?”

“실장님도 아시겠지만, 여기, 이런 둘레길은 굉장히 많잖아요. 하지만 그런 길 중에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쳐 관광객이 찾도록 만들어진 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죠. 여기 이 길을 만드는 데 들인 돈과 시간, 인력들을 생각하면 거의 로또같은 셈이죠.”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저는 연예계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바늘 구멍보다 좁은 성공 아니겠습니까? 그런 성공을 위해서 연습생들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것이고, 회사도 불확실한 성공을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죠.”

매니저는 단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당장에 매니저의 머릿속에서는 한 명의 연습생을 데뷔시키기까지 들이는 돈의 구체적 금액이 연상되니 말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놀랄 정도의 금액이 한 사람에게 투입되니,

“회사로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네. 신중하다 못해 예민해지는 거죠. 실패는 곧 어마어마한 손해로 돌아오니까요.”

때문에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회사는 최대한 실패 가능성을 높이는 변수를 줄이려 한다. 매월, 매주, 혹은 매일 트렌드 분석에 열을 올리거나 아티스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는 일 등이 그렇다. 연습생들에 대한 SNS 통제나 휴대폰 사용 자제, 혹은 합숙과 같은 식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일도 그에 연관이 있다.

“어쨌든 이사로서 저 역시 회사의 성공을 추구해야 하는 의무를 가졌으니,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불안 요소들은 해결하도록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의무, 입니까?”

“네. 그게 제가 회사에서 임원직을 맡으며 받은 의무이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름 씨에게도 그 사실을 이해시키고 싶었고 이야기를 했는데··· 아름 씨가 알겠다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그러니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겠죠. 데뷔하려면.”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기 말입니다.”

“네.”

“아까 아름이 외로워 보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네.”

“그래서 아름이를 위로해주려고 가셨다고···.”

“위로가 아니라 외로워 보이지 않게 보이려고 한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예요. 여기 주변에 보는 눈들이 많잖아요. 게다가 저기는 시은 씨의 팬클럽 회원들도 있고요. 만일 저기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회사 연습생들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비쳐진다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라도 곁에서 함께 걷는다면 보기에 별 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어, 그게···.”

매니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단유가 앞에서 설명한 바가 맞다면, B반에서 아름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정황으로 보이는 거였는데, 거기서 단유는 아름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름에게 말한 단유의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그리고 아름은 단유의 말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이해했다는 거지?

“거기다 회사의 입장도 잘 이해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생각하는 것도 꽤 성숙한 것 같고요. 자신이 데뷔를 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오늘과 같은 모습을 잘 보이지 않겠죠.”

생각해보니, 단유의 이런 모습을 오늘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몇 번 그와 동행했었던 이전의 일들을 떠올리면, 단유는 그런 사람이었지, 하고 납득하게 된다.

“어쨌든 이사님 덕분에 모르고 지나칠 뻔한 걸 알게 되었네요. 확실히 이사님은 관찰력이 좋으신 분 같습니다.”

“그런가요? 특별히 주의해서 관찰해야 했던 일은 아니었는데.”

매니저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돌려 지적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원래 제가 했어야 할 일인데, 이사님께 폐를 끼쳤네요.”

“누가 하든 상관이 있습니까? 누구라도 먼저 본 사람이 나서면 그만인걸요.”

“하하, 그렇군요. 전에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사님은 평범하신 분이 아닙니다.”

일부러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마무리짓는 매니저의 말에 단유는 눈썹 끝을 문질렀다.

‘도대체 나의 어디가 평범하지 않게 보인다는 거지?’

살짝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

단유와 매니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름은 각오를 다지고 슬기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 언니?”

시화가 먼저 아름의 접근을 눈치챘다. 그러더니 슬쩍 슬기의 눈치를 살핀다.

슬기는 아름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리고, 다른 아이들, 보민과 시율, 경빈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말을 걸지 않는다. 말을 걸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구분하긴 어렵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름에게 어떻게 하느냐, 가 아니라 아름이 그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다.

아닌 말로, 이런 상황 낯설지 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중, 여고, 그리고 대학 때도 드물지 않게 보기도 했고 겪기도 했던 상황이다. 그때와 다른 건, 어렸을 적의 아름은 지금 보민이나 시율이 같은 아이들의 처지였던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점과 지금의 아름은 당시보다 나이도 더 먹었고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유치한 편가르기인지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우려되는 점도 있다. 그 유치한 편가르기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지만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다. 단유의 말처럼,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길에 오른 마당이다. 내부에 적을 만들면서 성공할 수 있을 만만한 길이 아니다.

“많이들 주웠어?”

일단은 그렇게 시작하자. 평범하게. 그리고 언니답게.

“우와, 언니는 벌써 다 채운 거예요?”

그래도 룸메이트라는 점 때문인지 시화가 받아주었다. 불쑥 고맙다는 말이 튀어나오려다 만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근데 시화 넌 많이 추워? 얼굴이 빨갛다?”

“그러니까요. 여기 경치가 좋긴 한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부네요. 모자 안 썼으면 머리가 엉망이 될 뻔했어요. 그쵸, 언니?”

시화가 일부러 슬기네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이럴 줄 알고 모자를 준비했나 봐.”

보민이 시화의 말을 받아준다. 아름이 보민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 망설이는 듯 보이다가 이내 입을 연다.

“여기 쓰레기가 별로 없어서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인가 싶었는데, 언니 거 보니까 또 그렇지는 않나 보네요.”

아름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많이 주울 줄은 몰랐는데. 아마 지금은 겨울이라 사람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 가을에는 저기 저 숲에 단풍이 들면서 꽤 보기 좋았을 것 같아. 그래서 사람도 많이 찾았을 거고.”

“아, 네.”

일부러 말을 길게 늘였는데, 중간에 슬기가 시선을 한번 주니 보민의 대답이 짧아진다.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텀을 주면 대화가 어렵다. 일상적인 대화를 계속하여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형성되지 않게 해야 한다.

“아까 지나면서 들었는데 곧 코스가 끝나면 점심 도시락을 줄 예정이라더라. 혹시 배고픈 사람 있어?”

“저도 이제 좀 쉬고 싶어요. 추운 데 계속 걸었더니 힘들어.”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힘든 척 해 보이는 시화.

“도시락이래요?”

조용히 있던 채린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응. 식당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식당이 있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은 없을 테니까.”

“우리 회사에서 준비한 거예요?”

“그런 거 같아. 아까 실장님이 팬클럽 쪽이랑 다 같이 먹을 분량의 도시락을 준비했다고 하셨던 거 같거든.”

아름의 말에 이번에도 시화가 냉큼 답한다.

“지금은 도시락이라도 감지덕지죠. 먹을 수만 있다면. 근데 설마 여기서도 풀떼기만 먹는 건 아니겠죠?”

“누가 들으면 풀만 먹고 사는 줄 알겠다?”

“저 지금 일주일 째 샐러드만 먹고 있거든요?”

“너는 실장님한테 라면 몰래 먹는 거 걸려서 그렇잖아? 그러게 왜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어?”

“아니, 설마 그때 실장님이 오실 줄은 몰랐죠.”

“너 한 명 때문에 일부러 도시락을 주문하진 않았을 거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와, 오랜만에 밥 다운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인가!”

대충 분위기가 느슨해진 틈이다. 그럼 이제 제대로 붙어야 한다.

“근데 있잖아.”

아이들의 시선이 아름에게로 몰린다. 그 와중에 슬기는 여전히 앞만 보고 걷는 중.

“나 잠깐 슬기랑 이야기하게 자리 좀 내줄래?”

슬기를 데리고 자리를 이동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언니’라는 자신의 위치를 동생들에게 각인시킬 겸, 아이들에게 ‘비켜’달라고 부탁하는 형태로 선전포고하는, 고도의 전략.

아이들의 눈에 동요가 보인다. 그리고 모른 척 걷던 슬기도 어깨를 움찔한다.

조금 전 대화를 나누며 모두와 눈을 마주쳤던 탓에 지금 아름의 시선이 그녀들을 훑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에 흔들리는 모습. 선택권이라고 해봐야,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비켜준다’는 선택지 뿐이다.

슬기만큼의 감정으로 아름을 대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시화가 바로 곁에 선 보민의 팔을 가만히 붙잡는다. 보민이 시화의 표정을 살피고 슬기의 표정을 살피더니, 입술을 야무지게 다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윤 언니한테 가 있을게요.”

슬기가 보민을 향해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지만, 보민은 되려 슬기를 다독이듯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사실 그녀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꽤 불편했다. 그녀가 아팠던 사이 친한 슬기와 맏언니 사이에 다툼이 발생했고, 그 사유도 자신이 원인이라하니 여간 불편했던 게 아니다.

다만 그녀가 돌아온 후 보니, 아름은 전보다 더 소극적인 모습으로 연습실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니 먼저 다가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방치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아름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와 뭔가 상황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면 또 얘기는 달라지는 법이다.

보민이 그렇게 나오니, 다른 아이들도 보민을 따랐다. 앞서 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슬기. 무슨 자존심 때문인지 아름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슬기야.”

아름이 먼저 그녀를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