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83화 (883/956)

어느 별에서 왔니(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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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입은 강가의 드문드문 피어난 갈대들을 보며 걷노라니 절로 옛 기억이 피어오른다.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지만, 이 강의 지류가 보육원과 가까워 가끔 선생님들의 인도 아래 아이들과 같이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여기보다 훨씬 적은 수량의 폭이 좁은 강이었던데다, 지금 걷는 길처럼 보행자의 편의를 돕기 위한 길이 마련되지 않았던 때라 이곳과 비교할 순 없었지만 그때도 단유는 이렇게 강을 옆에 끼고 걸으며 주변을 구경했었다.

당시 함께 왔던 개구쟁이들은 수심 낮은 강으로 뛰어들어 우거진 수초 사이를 헤치며 뭐라도 잡아보겠다고 첨벙첨벙 뛰어다니다 옷이 홀딱 젖기도 했다. 성격 얌전한 여자아이들은 강변 바위 위에 앉아 물장구를 치며 서늘한 바람을 만끽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구경하거나 조약돌로 공기놀이를 했다. 이들보다 더 어린 아이들은 흥에 겨워 소리 지르며 형, 누나들을 쫓아 다니기 바빴고, 선생님들은 강둑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이따금 조심하라며 한마디 내뱉는 게 전부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단유는 그때도 겉돌았던 모양이다. 머리 끝까지 젖어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얼굴로 같이 놀자던 명수의 제안에도 단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대신 주변을 설렁설렁 걸으며 구경하고 다녔으니, 선생님들이 ‘애어른’이라 놀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모습이었다.

선생님이,

“단유야,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애들이랑 같이 놀아.”

라고 해도,

“괜찮아요. 충분해요.”

라고 답했던 단유였다.

지금 생각하면,

뭐 딱히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집단화된 분위기나 감성의 흐름을 굳이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고, 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주변을 관찰하며 사유하는 시간을 즐기는 게 더 좋았다. 쉽게 들뜨지 않는 성격도 한몫했지만, 주변의 지형이나 혹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더 즐거운 단유였다.

이를테면, 지금 걷는 이런 둘레길을 만든 이유가 근래의 지역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지역 관광 명소 활성화 정책의 일환일 텐데, 과연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전에 들은 바로 지자체마다 둘레길 만들기에 열을 올린 적이 있다고 들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게 일상인 도시인들에게 흙길의 로망을 일으키는 둘레길은 좋은 관광지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관리 부실이나 홍보 부족으로 찾는 사람이 적어 잡초만 무성히 자라거나 둘레길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한다. 허공에 사라지는 예산은 둘째고 자칫 둘레길이 우범지역화 될 수도 있다하니 파생되는 위험도 적지 않다.

그러니 지금과 같이 예산을 들여 캠페인이라는 형태의 홍보와 참여를 주도하는 것이겠지만, 둘레길이라는 형태의 관광지를 활성화하려면 편의성이 도모되어야 한다. 요컨대 이곳까지 오는 여행객들을 위한 주차장이라든가, 둘레길 코스 중간마다 적당한 안내판과 쉴 수 있는 쉼터 혹은 식당 등이 준비되어야 하겠다.

그런데 당장 처음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리면, 분명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렵진 않지만, 주차장소가 미비하여 공터에 차를 대는데 안전이라든가 관리적인 면에서 지적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살펴본 바, 강가와 산이 인접한 땅에 둘레길을 내어 경치를 구경할 수 있도록 기획한 바는 좋지만, 자칫 잘못 발을 디뎌 구를 수도 있는 지형이 있음에도 그에 대한 안전 대비가 부족하다는 게 보인다. 예산 부족, 혹은 안전 불감증, 혹은 둘 다?

물론 그런 비판적인 생각만 하며 걷는 건 아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과 함께 걸을 때면, 그들을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태인강의 강줄기를 따라 만들어진 둘레길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쓰레기랄 것도 없어 딱히 집을 일이 없으니 헐렁한 비닐 봉지를 아예 곱게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걷는 이들도 있었고, 핸드폰으로 주변을 찍거나 함께 온 사람들을 찍어주는 모습도 종종 보이니 그들의 산만한 자유로움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매니저는 회사 직원들과 함께 걸으면서도 이따금씩 앞서 걷는 아이들을 살피는 부지런함이 엿보이고, 둘레길 초입에서 투덜대던 직원들 중에는 여전히 인상을 펴지 못하고 있지만, 가끔씩 쓰레기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허리를 굽혀 줍는 근면함도 보인다.

캠페인이라는 목적에 걸맞게, 또는 너무 그 목적에만 치중하여 계속 둘레길 주변만 살피느라 걷는 내내 아래만 쳐다보는 아름을 보면 원래 저렇게 사회성이 부족했던 사람이었던 걸까 생각하는 계기도 되고, 아름의 곁에 있던 시화를 불러 자신이 이끌던 무리 속에 합류시켜 하하호호 웃는 슬기의 모습을 보며 저런 면이 있었구나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인평시에 머물렀을 적 기억도 떠올려보고, 태인강의 경치도 구경하고, 이런저런 사람들의 모습도 구경하느라 단유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혼자 말없이 걷고 있는 단유가 신경 쓰인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이사님, 혹시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라고 말을 붙여도,

“아뇨, 괜찮습니다.”

라고 답하는 단유였다.

****

“저기요.”

“네?”

연습생들끼리 걸어가던 중에 시은의 팬클럽이라며 온 한 여성이 다가와 불렀다.

“혹시 시은 언니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분 맞죠? 뒤에서 춤 추시던 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웠던 시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율의 시인에 박수가 뒤따른다.

“와, 맞구나. 유독 눈에 띄길래 괜찮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춤선도 예쁘고 인형들고 웃는 씬에서 되게 귀엽다 생각했어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데뷔 아직이죠?”

“네.”

“언제해요?”

“아직 몰라요.”

“그래요? 아무튼 제가 많이 응원할게요. 시은 언니가 최애지만 그쪽 분도 응원 많이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저기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돼요?”

시율은 잠시 난감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매니저가 바라보고 있는데 대화를 나누기엔 거리가 떨어져 있어 쉽게 허락을 구할 위치가 아니었다.

“연습생은 사진 찍으면 안 돼요?”

“아니, 그게 저도 잘···.”

“그렇구나. 뭐, 다음에 기회되면 같이 찍어요.”

난감해하는 시율을 이해하는지 여성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약간의 아쉬운 마음에 시율은 다시 매니저를 바라보았지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매니저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좋겠다, 시율아.”

근처에 걷던 보민이 다가와 시율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밀쳤다.

“벌써 팬 생긴거야?”

“아뇨,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뮤직비디오 나온 거 알아봤다고 그런 거에요.”

“우와, 역시 시은 선배 뮤직비디오라 다르긴 다르구나. 벌써 알아보는 사람도 생기고.”

“시은 선배 팬클럽 사람들이니까 몇 번씩 봤겠죠. 그래서 눈에 익은 걸 수도 있고.”

“그래도 넌 뮤직비디오에 출연이라도 했으니까. 나중에 데뷔하고 나서도 과거영상이라며 계속 나오지 않겠어? 난 그런 것도 없는데.”

“언니도 안 아팠으면 나왔을 건데. 많이 아쉽죠?”

“아쉽지. 아쉽지만 어쩌겠어?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다음 기회가 있다면 말이야.”

“언니는 충분히 잘 할 거예요.”

“다 같이 잘해야지. 나 혼자 데뷔할 것도 아닌데.”

“맞아요. 우리 다 같이 힘내서 잘해봐요.”

작은 두 주먹을 불끈쥐고 파이팅을 외치는 시율의 모습에 보민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어?”

잠시 걸음이 느려진 틈에 따라붙은 슬기가 따라와 말을 붙였다. 시율이 돌아보니 슬기를 비롯해 채린과 경빈이, 그리고 언제 뭉쳤는지 시화까지도 와 있었다.

“아, 조금 전에 저기 시은 선배 팬 분 중에 한 분이 시율이 알아보고 왔잖아. 같이 사진 찍자고.”

“정말? 와, 대박. 근데 나도 나왔는데 왜 나는 못 알아보시지?”

“그때의 넌 리즈였지.”

“지금은 아니고?”

“응. 아냐.”

“우리 절교할까?”

“맘대로. 그래도 난 절대 거짓말 못하거든.”

“와, 최보민. 그렇게 안 봤는데. 근데 경빈이랑 시화도 나왔는데. 그치?”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때 난 시화가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경빈의 칭찬에 시화가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정말요?”

“응. 얼굴도 조그많게 나오고, 아, 그때 너 헤어 되게 잘 어울렸었어. 옷이랑. 무슨 인형 보는 줄.”

“근데 그거 알아요? 그때 입었던 옷이요, 여기 어깨가 안 올라가는 옷이었거든요? 그래가지고 되게 힘들었어요. 그때 제가 막 이런 춤 춰야 하는데, 어깨가 안 올라가서 이상하다고 그러니까 감독님이 올라가는데까지만 해, 이래가지고 막 했는데 나중에 모니터 보니까 무슨 오징어 꿈틀거리는 것처럼 이러는 거 있죠? 근데 웃기다고 괜찮다고 막 이러는데, 티는 안 냈지만 되게 슬펐거든요? 나중에 그거 나오면 사람들이 막 웃을 거 같고 그래가지고.”

“그런 장면 있었어? 나는 못 본 거 같은데?”

보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시화가 발을 한 번 구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나중에 뮤직비디오 나오고 나서 보니까 없는 거예요. 알고보니까 그거 편집됐돼요. 그걸 알고 나니까 또 괜히 슬퍼지는 거예요. 차라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좋게 생각해. 나중에 그게 니 흑역사 영상이라고 소개되는 것보단 낫잖아?”

슬기가 시화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슬기는 그때가 리즈였는데 데뷔하고 흑역사되는 거 아냐?”

“야, 최보민! 계속 그러기야?”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멀찍이서 걷던 아름에게까지 들렸다. 그러나 아름은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걸으며 가끔씩 삐져나온 풀들을 발로 툭툭 건들였다. 반탄력도 없이 흔들릴 뿐이라 의미없는 행동이었지만.

“뭐해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아름이 고개를 들어올리니 언제 왔는지 단유가 옆에 서 있었다.

“어?”

정말 놀랐다는 듯 아름이 걸음을 멈추자, 단유도 함께 멈추며 물었다.

“왜요?”

“네? 아뇨, 그게···. 왜···.”

“아, 제가 혼자 걷고 있으니까 다른 분들이 괜히 부담스러웠던지 계속 말을 걸려고 하더라고요. 혼자 두면 안된다고 생각하는지.”

“······.”

“마침 아름 씨도 혼자 걷고 있길래 다행이다 싶어서요. 조용히 걷고 싶었거든요.”

아름은 얼굴을 붉히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걷고 싶은데 왜 내 옆으로 온 거지? 뭔가 이상한 논리다 싶어 물었다.

“근데 왜 저한테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방금 말한 것처럼, 조용히 걷고 싶었다고요.”

“그 말씀은 제가 이사님한테 아무 말도 안 걸 거라는 건가요?”

“것도 있지만, 일단 아름 씨 옆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단유의 대답에 아름은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뱉은 한 문장에 모든 걸 들킨 것만 같은 느낌. 동시에 수치심. 떨어지는 자존심.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진다.

“······.”

멈춰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이상함을 직감한 매니저가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단유는 매니저를 바라보며 입을 열려던 찰나,

“여기 쓰레기 때문에요.”

용케도 멈춰있던 그곳 근처에 쓰레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름은 허리를 굽혀 쓰레기를 주워 올렸다. 오물이 덕지덕지 붙은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와 제 색깔이 뭐였던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버린 구겨진 알루미늄 캔이 아름의 봉지 속으로 들어갔다. 금방 차버린 비닐 봉지.

형식상 몇 개 주워담은 매니저의 그것과 비교되는 양이다.

“넌 그만 주워도 되겠다.”

매니저가 한 마디하니, 아름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그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매니저가 아름을 보다가 단유를 올려다보니, 단유가 ‘나중에’ 라고 소리없이 말을 건네고는 다시 아름의 곁으로 따라가 걷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괜한 불안감을 느끼며 뒤로 돌아섰다.

“무슨 일이래요?”

함께 걷던 직원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매니저는 어깨를 으쓱이다 직원의 비닐 봉지 역시 거의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 쓰레기가 많은가봐요.”

그렇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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