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에서 왔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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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사님 차다.”
“어디?”
“저기.”
“이사님 차인 건 어떻게 알아? 이사님 차 안 타고 다니신다던데?”
“가끔 타고 다니시거든. 우리 회사에 저렇게 부티나는 차 타고 다니는 사람 김 이사님 뿐이니까.”
보민의 눈썰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보던 슬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다, 얼른 들어가자.”
“오늘 너무 추운데? 볼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아.”
“나도. 어떻게 볼에 살 트겠어. 들어가서 로션 발라야겠다.”
잰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여 회사 로비로 들어간 보민과 슬기는 로비 데스크의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 겨우 닫히기 직전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는데.
“아, 안녕하세요.”
“일찍 나왔네?”
마침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이가 있었으니 바로 매니저였다.
“다른 애들은?”
“오고 있을 거예요. 저희만 조금 일찍 나와서.”
“왜?”
차마 편의점에 들러 삼각 김밥 하나 사서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한 개 15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김밥을 반으로 나눴으니 일인당 75㎉를 섭취한 셈이다. 그 정도면 봐줄 만하지 않느냐고 말할 법도 하지만, 그래도 매니저에게 아침부터 몰래 김밥 먹느라고 일찍 나왔어요, 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냥 일찍 나와서 천천히 걸을 겸 해서요.”
“천천히? 방금 로비에서는 너무 열심히 뛰던데?”
궁지에 몰린 두 연습생을 구원한 것은 엘리베이터 도착음이었다.
―띵.
“어, 저희 내릴게요.”
“그럼 나랑 같이 가려고 했어? 얼른 연습실 가서 청소하고 있어.”
“네.”
“조금 있다가 내려갈 테니까, 그때 보자. 그때까지 변명 좀 생각해 놓고.”
“네?”
스르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앞에 두고 당황해하는 두 연습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매니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쟤들이 일찍 나온 이유를 모를까. 과거 숱하게 겪었던 일이었다. 연습생들 중에 간혹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마는 이들이 저렇게 귀여운(?) 일탈을 저지르고는 모르쇠로 발뺌하지만, 모를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모른척 해주지만, 겨울은 특별 단속(?) 기간. 오늘은 저 둘을 위해서 특별히 체중계를 가지고 내려가야겠다.
‘아, 연습실에 뒀던가?’
그냥 맨몸으로 내려가도 상관없겠다.
****
“그럼 앞으로는 여기를 통해서 유통되는 겁니까?”
“네. 일단 지금 상황에서 저희에게 가장 우호적인 조건을 제시한 유통사입니다. 이제까지는 인디 계열이나 비주류 기획 음반의 유통을 담당했었지만, 내년부터 사업 확장을 꾀하고 있는 와중에 저희와 선이 닿은 겁니다. 기존의 사업 영역을 볼 때는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따로 알아본 바로 최근 투자분을 늘려 공격적인 영업을 시행할 준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시은의 앨범 유통을 통해 이득을 보겠다는 거겠죠?”
“아무래도 시은이니까요. 시은의 네임 밸류를 이용해 영업망을 넓혀 보겠다는 속셈인데, 딱히 문제 삼을 건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같이 성장하는 동업자로 관계를 구축해도 좋을 테고요.”
“없는 살림에 욕심만 내는 것은 아니겠죠?”
“중국계 투자자를 업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확히 공개하질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를 기대해도 좋을 듯 합니다.”
“좋아요. 그건 그쪽 사정이니까 우리가 더 깊이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우선은 시은이 새 앨범의 유통에 문제가 없다는 것만 확인하면 되니까.”
“그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 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일단 손해 보상 청구를 진행하기는 하는데, 결론만 말씀드리면 지루한 싸움이 될 거란 예상입니다. 저희 측에서 상정한 손해액에 대한 태클도 만만치 않을 거고, 그들이 말하는 뻔한 핑계도 재판부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쪽 법무팀의 힘이 센 탓이겠지. 공정한 법치는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니까.
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에 놓인 자료를 넘겼다.
“어쨌든 그 부분은 변호사님이 잘 해결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큰 건들은 모두 정리된 건가요?”
“네. 세부적인 문제들은 해당 부서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회의가 정리되는 시점에서 대훈은 훑어보던 회의 자료들을 손 아래에 깔고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보았다.
“쉽지 않은 출발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시작이 되었습니다. 대표로서 이제껏 고생한 회사 구성원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일전에, 대표로서 못난 꼴을 보인 것 같아 죄송하고, 여러분들에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대표가 된 것 같아 많이 반성합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보여준 열정과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저 역시 최선을 다해 당당한 대표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시행착오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정말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앞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우리 회사를 깔보지 못하게, 당당해지는 것이 다음 해 우리 회사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회의를 마무리하고 일어설 때, 대훈이 단유에게 다가왔다. 잠깐만 남아달라는 부탁에 단유는 주위를 슬쩍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퇴장한 후, 넓은 회의실에 단 둘만 남자, 대훈이 입을 열었다.
“김 이사님.”
“네?”
“고맙습니다.”
“뭐가요?”
“믿어주셔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사실은 김 이사님에게 가장 죄송합니다. 절 믿어주셔서 여기까지 밀어주셨는데 제가 그 믿음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단유는 돌연 사과하는 대훈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이 담겨 있는 눈빛이긴 했는데, 또 다른 한편으로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사실 속으로야 대훈에게 조금 실망한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것이 그에 대한 단유의 평가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애초부터 대훈이란 사람에게 뭔가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단지 그에게 대표 자리를 제안했던 것은 그의 이상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조금 부족한 모습을 보이거나 미숙하더라도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막말로 전문 경영가 출신도 아니고, 경영이란 걸 제대로 배운 사람도 아니니 그가 흔히 쓰는 표현처럼 밑바닥부터 하나씩 배우며 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단유의 생각일 뿐. 단유는 모르는지 몰라도, 대훈은 지난번 일이 터졌을 때 가졌던 회의에서 단유가 퇴장하기 직전 자신을 보던 눈빛을 가슴에 두고 있었다.
대표가 되었다고 갑자기 신분이 상승했다는 체감도 없을뿐더러, 여전히 그는 매니저 때 배운 습성이 남아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고, 특히 단유는 아랫사람도 아니니 평소에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살피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폈던 그날 단유의 눈빛이 대훈의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제가 그날은 정신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그래도 그래선 안 됐는데 추태를 부렸습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고요, 더구나 그 상황에서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대표라는 자리, 처음부터 쉽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참 어렵네요. 자질 부족이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생각엔 잘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더 잘할 수도 있는데 못했다고 자신을 탓하는 건 나쁘지 않습니다만, 과도하게 자책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네, 그렇죠.”
“어쨌거나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는 앞으로가 중요하니까, 앞으로 잘하시면 될 겁니다.”
“그럴 겁니다. 그리고 김 이사님께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 참.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컴백 스케줄이 늘기 시작하며 시은은 이전처럼 느슨하게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컴백 방송부터 시작해서 라디오 및 연말 행사 등에 불려다니기 시작하니 금방 체력이 소진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번 컴백은 이제까지의 연예계 생활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불평이나 불만은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방송국에서나 이동 중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잘되길 바란다며 말을 건네지만 그 뒤에 숨은 감정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으니 시은은 열심히 웃고 열심히 인사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 덕에 늦은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돼서 그대로 침대에 눕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잠이 곧바로 들지 않는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일까? 수면제라도 먹어야 할까?
하지만 다행히 이럴 때 사용하는 민간요법이 있다.
위스키 한잔. 뜨거운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흘러 온 몸의 온기를 집중시키고 나면 탈력감에 금방 정신을 잃는다. 너무 많이 마셔서 다음 날 스케줄에 지장을 주지도 않으니 금상첨화다.
“술독 오르면 어쩌려고.”
매니저의 걱정에 시은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술독 오른 적 없으니까 걱정말고 언니도 얼른 들어가. 오늘 수고 많았어.”
“무조건 딱 한잔 만이다. 알지?”
시은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보이고는 등을 밀어 집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 긴 한숨과 함께 주방에 붙은 아일랜드 식탁으로 향한다. 언제라도 마실 수 있게 준비된 위스키의 뚜껑을 따고 유리잔에 콸콸 붓는다. 한잔이라고만 했지, 한잔의 양이 얼만지는 정하지 않았으니까.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스툴에 앉아 따라놓은 위스키를 입에 가져다댄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위스키가 입술을 녹이고 혀를 녹인 후 목을 거쳐 가슴을 지난다. 그러면 절로 뜨거운 열기가 묻어난 공기가 입밖으로 빠져 나온다.
“하아.”
그 속에 하루의 묵은 스트레스가 함께 묻어나길 바란다.
앞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보았다. 여기저기에서 들어온 메시지들을 확인해보고, SNS에 올라온 댓글들도 대충 훑어본다. 역시나 좋은 것만 있지는 않으니 ‘지가 뭘 안다고 이렇게 싸지르나’ 싶은 글도 있다. 맨정신에 보면 그저 불쾌할 따름이겠지만, 지금은 그저 안주거리다. 취한 채로 잠들고 깨면 기억나지 않을 글들이니 문제 없다.
문득 생각나 전화 수신 목록을 살폈다. 방송이나 스케줄이 많은 날에는 핸드폰을 거의 매니저에게 맡겨두고 보지를 않으니 그날 무슨 전화가 왔는지, 어떤 메시지가 와 있는지를 모른다. 중요한 전화나 메시지라면 매니저가 알아서 알려주니까 별 문제가 될 건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살피니 오늘 하루동안 단 한 통의 전화도 걸려온 게 없었다.
드물게 이런 날이 있다. 누구에게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 날. 지인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으면 괜히 외롭다는 감상에 젖는다. 그토록 바쁘게, 정신없이 스케줄을 소화하는 결과가 단지 이런 외로움이라면 왜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가?
음악이 좋아서? 노래를 좋아하니까?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사랑하니까?
“쯧.”
혀를 차며 핸드폰 액정이 바닥을 향하도록 엎어 놓고는 위스키 한 모금을 머금어본다. 이런 쓸데없는 감정도 모두 독한 위스키에 녹여 사라지게 만드는 게 답이다.
그러다 또 문득 생각나 핸드폰을 들어올려 목록을 손으로 훑었다. 그리고 이내 찾던 전화번호를 찾아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언니? 나. 응. 집이야. 스케줄 끝났지. 자고 있었어? 그치? 안 자고 있는 줄 알았어. 바빠? 괜찮아? 아니, 그냥. 오랜만에 언니 목소리나 듣고 싶어서.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알잖아? 수다 떨고 싶을때마다 언니 이용하는 거. 언니 목소리 들으면 괜히 유쾌해지는 기분이거든. 놀리는 거 아니고. 진심으로. 언니는 정말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사람인 거 같아.”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린 채로 통화를 이어나가던 시은은 빈 손으로 위스키 잔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위스키를 바라보며 대화는 계속 이어나간다.
“아니, 안 힘들어. 그때는 조금 마음이 쓰이긴 했는데, 내가 마음 쓴다고 뭐 달라져? 그리고 지금 회사에서도 해결하려고 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내가 괜히 화를 내기도 그렇더라고. 응. 다행이지. 이번에 보니까 우리 회사 꽤 괜찮은 거 같아. 응···. 언니도 우리 회사 올래? 언니가 좋아하는 김 이사도 있으니까.”
무심코 언급하고 나니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까운 위치에서 눈이 맞았던 그때의 얼굴. ‘눈이 맞았다’는 표현이 어딘지 낯부끄러워지는 느낌. 얼굴에 열이 오른다.
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