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78화 (878/956)

어느 별에서 왔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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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깊이 잠들었을 시간. 어떤 이는 유흥주점에서 만취하여 비틀거리고 있을 시간. 어떤 이는 야근이란 명목으로 형광등 아래 붉어진 눈두덩을 비비다 졸음을 쫓겠다며 커피를 찾을 시간.

모두의 시계가 같진 않다.

그리고. 이곳,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 바늘만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생동감이 넘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병실.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외부의 조명도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초점 잃은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다 겨우 눈을 감은 광식의 옆으로 검은 실루엣이 다가왔다.

다가온 실루엣은 가만히 광식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못 느끼는 것인지 눈 감은 상태 그대로인 광식.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아마도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

꿈? 혹은 악몽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단 나아.’

다른 이들은 현실에서 발버둥치며 벗어나려 하지만, 그는 고작해야 머릿속에서 부유하고 있을 뿐이니까.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물론 실제로도 최면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단지 단유의 의지가 작용한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최면과 다르다.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니, 강력한 의지로 깨어나려 한다면 얼마든지 깨어날 수 있다.

‘노력이 필요하지만 말이야.’

그의 환상은 단유가 심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본인이 환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노력이라고 해서 죽을둥 살둥 노력하란 말도 아니다. 단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인지하고 벗어나려 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단유가 예전에 머물렀던 ‘에르케넨’과 같다. ‘인지의 경계선’을 넘지 못해 몇 년이고 머물렀던 공간. 끝없이 펼쳐져 있던 숲의 광경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단지 광식과 단유의 차이라면, 단유에겐 디아트리, 안트, 신테라는 조력자가 있었다는 점이고, 광식에겐 어떤 조력자도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단유는 광식의 조력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를 도울 마음이 없었다. 일단은 그가 과연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특별한 사람임을 증명할 것인지, 그리고 그의 노력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증명될 것인지를 지켜보고자 했다.

‘또 덕분에 회사 일도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고.’

당분간은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도의적인 차원에서 이렇게나마 가끔 찾아와 살펴보기는 하겠지만.

넓고 아늑한 병실. 그러나 꽃 하나 피어있지 않은 삭막함이 공존하는 병실. 그게 광식의 현실이었다.

****

“너, 아까 왜 그랬어?”

“뭐?”

“아까 김 이사 봤을 때, 얼굴 빨개지더라?”

“그게 뭐?”

“이거 이거 수상한데?”

“수상하긴 뭐가? 괜히 또 그런다. 운전이나 해.”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느니 해 놓구선 바로 얼굴 붉히는 꼴이 보기 좋더라?”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그랬는데?”

“왜 그러긴, 그냥 민망해서 그랬지.”

“민망하다? 그게 더 수상한데? 왜 민망할까? 마음에도 없으면 민망할 일도 없지 않을까?”

“그런 게 아니고, 아직 그리 친한 편도 아닌데 갑자기 눈이 맞으니까 서로 민망했던 거지.”

“서로 민망했다는 것 치고, 그쪽은 아무런 표정이 없던데?”

“그건 그쪽 사정인 거고. 내가 원래 숫기가 없잖아?”

“변명이 길어지면 의심스러워지는 법이야.”

“나 참. 이 언니 때문에 못 살겠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

“···무슨 결론?”

“솔직히, 야. 김 이사 정도면 괜찮지 않아? 와꾸도 되고 재력도 되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네. 여자만 없으면 딱인데. 그치?”

“언니, 1절만 해라. 계속하면 나 화낼지도 몰라.”

“정말 관심 없어?”

“없어.”

“그런데 왜 얼굴을 붉···, 알았어, 알았어. 그만 째려봐라. 그냥 기분 좀 내자고 농담 한마디 한 거 가지고 유난은.”

“나 방금 쇼케이스 취소했다? 그렇게 웃을 기분 아니다?”

“아까는 잘만 웃더만?”

“그럼 우냐? 웃어야지.”

“그래, 그건 잘 했다. 힘들 때 웃는 게 일류라며?”

“그럼 오늘 우리 집에서 한잔 할까?”

“왜?”

“왜는? 억지 웃음 팔았는데, 속이라도 달래야지.”

“적당히 마셔.”

“내일 스케줄 없잖아? 그냥 오늘은 우리 집에서 마시고 자자. 응?”

“에휴, 그래, 그래. 오늘은 내가 함 봐준다. 집에 와인 있지?”

“언니는 입만 고급이야.”

“와인 가르쳐 준 건 너야.”

“소주 가르쳐 준 건 언니지.”

“그럼 와인이랑 소주 섞어 마실까?”

“미쳤어.”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운전을 하던 매니저는 시은을 힐끔 보더니 물었다.

“근데 시은아.”

“응?”

“김 이사 싫어?”

“언니!”

“알았어, 알았어. 뭘 또 그렇게 화를 내니? 난 그냥 그 사람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서 그러지.”

저 언니, 오늘 술 들어가면 작정하고 자신을 놀리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그간 지낸 시간이 얼만데. 서로 적당히 놀리고 적당히 위로하면서 함께 한다는 게 좋은 시은이었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붉은 후미등과 하얀 전조등이 교차하며 눈을 찔렀다. 딱딱한 한숨을 짧게 뱉으며 생각하니, 어차피 오늘 밤샐 작정인데 체력도 보충할 겸 잠깐 눈을 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티를 낼 수 없어 그렇지, 근래 가장 피곤한 하루를 보낸 시은이었다.

****

며칠 동안 언론에서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시은의 새 노래에 대해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역시나 미묘한 거리감을 두려는 모습이었다. 홍보팀이 애써 전화를 걸어도 기자들은 하나같이 빈말이나 핑계를 늘어놓으며 시은의 컴백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길 꺼려했다. 그래도 몇몇 소규모 언론의 기자들이 시은의 컴백과 공개된 뮤직비디오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 등을 기사로 엮어 보도했지만, 주요 인터넷 포털에는 제대로 검색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뮤직비디오 공개 후 3일째부터 언론에서 적극적인 기사를 써줬다. 덕분에 홍보팀에서도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변심(?)한 이유는 단지 그들을 뒤에서 은근히 압박하고 있던 광식의 존재감이 옅어진 탓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도 없진 않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시은이라는 가수의 팬덤이었다.

―우리 언니 새 노래 나왔어요.

같은 홍보 문구와 동영상 채널을 링크한 게시글이 팬들의 적극적인 홍보와 맞물려 여기저기 퍼지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동영상 조회수가 높아질 수 있었다.

“팬이란 게 이래서 중요한 거야.”

모니터에 박치기라도 할 듯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바쁘게 화면을 훑어내리는 개발팀장의 말에 매니저는 동의했다.

“당연한 말씀을. 팬이 없으면 어떻게 연예인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냥 좋아하는 팬 말고, 진짜로 시은만을 쫓는 팬을 말하는 거야.”

“사생팬이요?”

“이럴 때는 사생팬도 감사지. 달리 홍보도 하기 전에 채널에 영상 올리자마자 조회수 올라가고 댓글 달리는 거 봤지? 이런 거 보면 정말 시은에 대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라니까. 진짜 홍보팀은 따로 있는 셈이야.”

요즘은 웬만한 홍보팀보다 열혈 팬들의 게시글 하나가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어쩌다 회사 홍보팀 직원이 열혈 팬 코스프레를 하고 글을 올리기도 하지만, 진짜 열혈 팬들의 열정과 아이디어는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홍보팀에 가서 할 순 없는 일. 혹시라도 홍보팀장 하는 꼴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골리려는 생각으로 꺼낼 생각이 아니라면, 그저 이렇게 자기 팀원들과 숙덕거리는 정도로 끝내고 말 일. 그마저도 괜히 사내에서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

“그건 그렇고, 새로 들어오기로 한 애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타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의 위탁 건은 총 3개 기획사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위탁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들은 바로는 12월 혹은 1월 그 사이에 받는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후속 보고가 뒤따르지 않았다. 연습생들을 담당해야 하는 매니저로서는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는데, 개발팀장의 반응이 떨떠름해 보였다. 두툼한 손으로 자신의 귓불을 문지르며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 같아.”

“왜요? 계약 다 한 거 아니었어요?”

“계약은 했는데, 상대측에서 미적지근한 반응이라. 아무래도 이번 일이 조금 영향이 있는 거 같애.”

“이번 일이 왜요? 애들 가르치는 거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전혀 없는 게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괜히 문제 있는 소속사에서 훈련을 받는 게 꺼림칙하달까? 그런 반응인 거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그 사람들이 언제 우리 기획사 이름 보고 결정했답니까? 저희 회사 소속 트레이너들을 보고 결정한 거잖아요?”

“순진한 소리하고 자빠졌네. 위태위태하게 휘청대는 회사에 사람을 보낼 마음이 들겠어?”

“휘청거리다뇨? 다 해결된 거 아닙니까?”

“우리는 괜찮지. 그런데 밖에서 보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랑 다른 모양인가 봐.”

이래서 회사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다. 대형 기획사에게 찍혔다는 소문이 돌면, 앞으로의 활동에도 영향이 미치는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별수 있나.

“위에선 뭐라고 하는데요?”

“뭐라긴? 어쩔 수 없다 하지. 지들이 보내기 싫다는데 어쩌겠어? 위탁 부담금이 줄어들어서 조금 손해가 있겠지만, 그거 가지고 뭐라할 순 없잖아? 이제 시작인데. 1기생을 잘 배출시켜서 다음을 노려야지. 다음이 있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딴 생각 말고 지금 연습생들이나 관리 잘해.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불안한데, 연습생들까지 말썽 일으키면 답없다. 알지?”

매니저는 문제 없다고 답했다. 다행히도 연습생들은 모두가 회사의 지시에 고분고분하다. 회사가 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음을 알 테니 그들도 딴생각 않고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안심하지 마. 그 나이대 아이들, 어디로 튈지 몰라.”

경력으로 따지면 매니저보다 아득히 윗줄인 개발팀장이었다. 그의 경험에서 나온 충고를 마냥 무시할 순 없으니, 매니저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말이 나온 김에 아이들이 레슨을 잘 받고 있는지 보겠다며 돌아서는 매니저에게 팀장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애들 몸무게도 잘 확인해. 겨울에 관리 잘못하면 힘든 거 알지?”

“압니다, 저도. 짬밥이 몇 갠데.”

“니 짬밥을 나랑 비교하냐?”

매니저의 피식거리는 웃음에 화답하듯 팀장도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나가서 일 봐.”

****

―최근 평년보다 따뜻한 겨울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만, 밤새 가파르게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현재 서울은 영하 4.5도, 체감 온도는 무려 영하 9.2도에 달하는데요. 오늘 오후는 더 떨어질 전망이라는 예보가 있어 아침 출근길부터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TV 꺼.”

단유의 나직한 목소리에 TV가 저절로 꺼졌다. 그리고 찾아온 정적. 단유는 거실을 휭 둘러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이 너무 넓어.’

며칠 전부터 이 집에 혼자 머물게 된 단유는 텅 빈 소파와 허전한 거실이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옛말처럼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더니, 졸린 눈으로 거실에 나와 소파에서 엉기적대다 출근길에 오르던 하은의 존재감이 여간 큰 게 아니었다. 서로 바빠져서 집에서도 자주 마주칠 시간이 없었다 하더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크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명수가 영국으로 떠났을 때도 이 정도로 빈자리를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하은의 존재감이 워낙 컸던 탓이었나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을 옮길 계획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우리 집’이고 언제고 돌아올 명수와 하은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지켜두고 싶었다. 그들이 돌아올 공간이 있어야 돌아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이기도 했다.

‘적응해야지, 뭐.’

단유는 고개를 흔들며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왔다. 구두코를 땅에 찧으며 신을 신던 단유는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혀를 찼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나올 필요도 없잖아?’

현관을 나서는 것도, 일부러 구두를 소리 내어 신는 것도 습관이 된 탓이다. 단유가 직장에 나가는 것을 반기던 하은을 위해, ‘나 일 나가요’라는 말을 대신해 그런 식으로 소리를 내어 출근 전인 하은이 들을 수 있도록 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은도 없는 마당이니, 굳이 이런 쇼를 벌일 필요가 없다. 그냥 현관 안에서 신발만 신고 바로 마법을 사용해도 무방할 테니 말이다.

차가운 바람이 현관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단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지나갔다. ‘멍청하게 서서 뭐하냐?’ 꾸짖는 듯했다. 단유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발을 내딛었다. 이왕 나온 걸음인데 기분 전환 삼아 오늘은 운전이나 하며 천천히 출근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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