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에서 왔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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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도 보고, 반대로 걷기도 하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도 했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광식. 혹시 꿈이라도 꾸는 것인가 싶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춥다. 라운딩을 위해 나선 참이라 얇은 자켓 하나만 걸치고 있었던 게 후회가 되는 시점.
“야! 김단유! 어딨어? 나와!”
광식은 조금 전 함께 있었던 사내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목에 핏대가 서도록 이름을 부르고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자신이 어쩌다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꿈이라면 빨리 깨라고 자기 뺨을 때려보지만 잠깐의 화끈거림만 있을 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리고 달려서 숨이 턱까지 닿도록 달려보면 달라질까. 하지만 언제 이렇게 달렸던 적이 있었으랴. 중, 고등학교 때도 이렇게 열심히 달렸던 적이 있나 싶은데, 결국 1분도 안 돼서 숨이 턱까지 차고, 식은 땀이 솟아나 턱밑으로 흘렀다.
그래도 제자리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
덜덜 떨리는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펴보면,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푸른 녹지와 나무들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다. 만약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후로는 평생 골프장 근처에도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여기요! 아무도 없어요?”
창공으로 퍼져나가는 절실한 애원의 목소리에도 겨울 바람은 아랑곳않고 광식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래도 남부지방이 서울보다는 따뜻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겨울 바람을 맞고 서 있으니 여간 위험한 게 아니다. 이러다간 동상에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두려움이 인다.
어떻게 해야 이 추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광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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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야죠.”
시은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별수 있나요?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 일단은 묵묵히 버티는 수밖에요.”
곧이 곧대로 들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말이기도 했지만, 대훈은 무력한 회사의 대응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대표로서 아무런 반박도,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말이다.
대훈의 침묵에도 시은은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이날 이때까지 무사태평하게 왔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저도 나름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이 자리까지 온 거예요. 솔직히 이보다 더한 것도 보고 듣고 겪었다고요. 이 정도는 뭐, 솔직히 약과죠. 고작해야 잠깐 발목을 붙잡는 것 뿐인데요.”
“그래도 대표로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이런 일 겪게 해서.”
“대표님이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왜요? 들어보니 대표님도 갑자기 당하신 거라면서요? 예고하고 들이닥친 태풍에도 피해가 속출하기 마련인데, 예고도 없이 훅하고 들어오면 당해야죠. 불가항력인데.”
“저희가 미숙한 탓입니다. 애초에 유통사나 기타 다른 곳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약을 제대로 맺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분명 계약 상의 문제도 없진 않다. 누구도 이런 일을 상정하지 못했을 테니 계약서 상에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한 조항을 넣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소속 아티스트가 피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했더라면 이 정도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어쨌든 오늘 쇼케이스는 연기인 거죠?”
“여러 가지 수를 찾아봤지만, 당장에는 어렵네요. 쇼케이스에서 그냥 신곡을 발표하는 수도 쓸 수 있겠지만, 그게 과연 제대로 된 해법이 될 것인지 불확실하다는 의견이 있어서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밀린 거, 좀 더 천천히 해도 돼요.”
지금의 말도 곧이 곧대로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훈은 손을 내저으며 빠른 시간 내에, 이번에 계획되었던 것 이상의 규모로 쇼케이스를 열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노라 약속했다.
자신을 달래기 위해 애쓰는 대표의 모습을 보며 시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속이 상하지만, 사실 대표도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당장 얼굴을 보아하니 며칠 전 보았을 때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싶을 정도로 몇 년은 늙어버린 얼굴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하루 대훈은 몇 년 치 마음고생을 한꺼번에 해버린 느낌이었다. 지금까지도 평온한 하루를 보내왔던 건 아니지만, 오늘은 지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심각했던 하루였다.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면 정말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나마 자신을 믿어주는 직원들과, 투자자―단유, 가수―시은이 괜찮다며 도리어 다독여주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래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대표로서 책임감을 절절히 느끼는 중이었고, 동시에 무력한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하루 내내 무거운 마음이었다.
“좀 더 꼼꼼하게 계약을 살폈어야 하는데, 너무 관행에 치우친 계약을 믿었던 면이 있어요. 분명 제 잘못입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변명이었지만, 대훈은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음에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란 판단이었다.
“일단 현재 계약을 맺은 유통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유통사와 조속히 계약을 맺어 음원이 유통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다른 유통사와 계약을 맺을 경우, 수수료라든지 이런 면에서 다소 불리한 계약을 맺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회사에서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당장은 시은에게 약속했던 음원 발표를 해내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우선 뮤직비디오를 먼저 풀죠?”
동영상 사이트에 자사 채널을 만들고, 그 채널을 통해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전략은 다른 기획사에서도 사용하는 방법이다. 왜 그 방법을 생각 못했으랴. 하지만 자사 채널의 영상은 아무래도 유통사 채널의 영상보다 조회수나 인지도 면에서 많이 부족하기에 이왕이면 다수의 구독자를 가진 유통사 채널로 공개하려 했을 뿐이었다.
“시은 씨가 허락한다면, 그렇게 진행할 겁니다.”
“그게 굳이 허락이 필요한가요? 긴급 상황이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면 될 일이죠.”
그게 뭐 대수라고, 털털하게 반응하는 시은에게 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중의 호응이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수는 노래로 승부를 하는 거죠. 노래가 좋다면, 언제가 되었던 호응은 생길 거예요.”
“그러면 좋겠지만, 좋은 노래라고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어쩌면 시은이 작은 기획사로 들어가는 바람에 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건 시은에게도 마이너스지만, 대훈에게도 엄청난 마이너스가 될 수 있었다.
“대표님이 이렇게 약한 소리하면 어떡하나요? 저한테 자신감을 불어넣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매니저 때부터 없는 소리는 잘 못 하는 성격이어서요.”
“그런가요? 그래도 전 믿어요. 전에 대표님과 처음 만났을 때, 대표님이 보여주신 철학과 신념을. 그 때문에 이 회사에 들어오기로 결심했던 거니까.”
“이거 참. 오히려 거꾸로 시은 씨한테 위로를 받는군요.”
“위로랄 것도 없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니까.”
“오히려 저보다 시은 씨의 멘탈이 더 튼튼한 것 같네요. 배울 점이 많습니다.”
“멘탈이요? 그렇지 않아요. 저 알고 보면 연약한 여자랍니다.”
시은의 우스개소리에 대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억지로 밝은 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분노하기보다는 밝을 수 있다는 게 시은의 장점이고 강점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이기에 이 연예계에서 앞으로도 쭉 장수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은 씨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시은은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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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둑해진 서울 하늘과 달리, 푸른 하늘 아래서 숨을 헐떡이는 광식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어떻게든 벗어나 보겠다고 약해빠진 하체를 놀려 달리다 걷고, 걷다가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그런데 몸을 움직인 만큼 무릎이 후들거렸고, 흘러내린 땀으로 옷이 푹 젖을 정도였다. 땀이 날 정도로 움직인 덕에 추위는 겨우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고 생각할 때쯤, 땀이 식으며 전보다 더한 추위에 휩싸인다.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겨울 바람에 볼이 얼얼하고, 눈꺼풀이 통제력을 잃고 미친 듯 떨렸다. 거울로 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입술이 파래지지 않았을까, 싶다.
주저앉아서 울고 싶다가도, 이 사태를 부른 ‘단유’를 저주한다.
그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증거도, 뭣도 없지만 어쩐지 그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느낌이다.
“야, 이 개새끼야!”
너무 소리를 질렀던 탓인지 목이 쉬어 쇳소리가 섞여 나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와 봐, 이 개새끼야!”
돌아오는 건 매정한 바람 뿐이었다. 그것도 좀 전보다 더 차가운 바람.
“그래, 이 새끼야. 해달라는 거, 해줄 테니까 나와보라고!”
굳이 ‘그 녀석’이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아무나 나와보라고. 속으로 절실히 바라며 외쳤지만, 역시나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쭉 뻗은 다리가 후들거려 붙잡고 있어도 흔들림이 멈춰지지 않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중얼거리는 광식의 입꼬리에서 침이 흘러나오지만,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다.
문득, 그가 사라지기 전에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노력하라고 했던가.”
그는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지 보고 싶다고 말했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노력이라고? 지금 그 어떤 노력을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시 일어나 달려야 하나?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려서, 밤이 되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달려야 하나?
또 광식은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도 떠올렸다.
―결과를 보이지 않으면 노력이 아니다, 라고 했던 말.
‘미친···.’
지금 어떤 결과를 보여야 한단 말인가? 걷고 뛰고 지랄 발광을 해도 제자리인데. 지금까지 몇 시간을 달리고 또 달렸는데 어떤 노력을 더 하란 말인가?
“난 특별한 사람이야.”
과연 특별한 사람이라 보통 사람은 평생 겪을 일 없는 일을 겪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단호하게 말하리라. 자신은 절대 특별하고 싶지 않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어?’
근데 이상하다. 못해도 수 시간을 여기서 달리고 굴렀던 것 같은데, 여전히 같은 하늘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제자리인 것 같고, 구름에 가려있는 태양도 그대로인 듯 하다.
다시 말해, 이곳에서는 지금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다.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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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정 대표를 찾아 나선 이 대표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와 헤어졌던 그 장소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 대표.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니, 초점 잃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정 대표!’, 하고 불렀지만 여전히 멍한 눈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광식이었다. 섬찟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라왔던 캐디 둘이 수군거리며 바라보다가 입을 다무는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두면 반드시 말이 말을 타고 서울까지 순식간에 퍼질지도 모르겠다.
“119불러요, 어서!”
엉뚱한 데 휘말렸다는 생각과 함께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머릿속에서 찾기 시작했다.
정 대표가 입원했다는 소식은 알음알음 퍼졌다. 그냥 아파서 입원한 일이라면 별 소문도 되지 않을 일이지만, ‘정 대표가 미쳐버렸다’라는 소문이 함께 곁들여져 돌기 시작하자 파문이 크게 일기 시작했다.
소문의 출처는 정확하지 않지만, 여러 사람의 입에서 반복되며 나온 소문은 거의 사실인 것처럼 여겨졌고, 수일이 지나도록 방문객을 받지 않는다든지,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입소문을 단속하고 있다든지 하는 정황들이 드러나며 소문은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 지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최근 연예계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의 정황을 대충 알고 있던 이들은 그 말에 동의하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해, 라는 말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