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76화 (876/956)

어느 별에서 왔니(2)

-------------- 876/952 --------------

절로 한숨이 나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단유의 모습에 광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그 시건방진 반응은?”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그 지루한 발상과 구태의연한 선민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을는지.”

“뭐?”

“그런 말 하는 사람, 정 대표님이 처음도 아니었고 숱하게, 까지는 아니어도 꼭 자기가 특별한 위치에 오른 것이 자신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신체, 다른 정신,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아요.”

“······.”

“정말로 정 대표님은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정말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남들과 똑같았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3류 지방대 출신에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 겨우 들어가 하루종일 문서 정리나 하면서 몇 십만원짜리 월세 걱정하는 이들과 하루에도 수십 번 수천, 수억의 수익이 결정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내가 같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단지 현재의 지위에 따른 업무의 차이일 뿐, 그 사람과 대표님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다름을 보여주진 못합니다.”

“존재론이니 뭐니, 그런 건 상관없어. 현실적으로, 그런 녀석들이 만약 내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비교할 것도 없지. 지금 이 바닥에서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우리 회사 알지? 시총이 얼만지 알아? 그 정도로 회사를 키워낸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대훈이 그 녀석이 성공해 보겠다고 알량한 수작을 부리는데, 그게 그리 쉬울 거라 생각해? 노. 절대. 왜냐고? 걔는 결코 특별하지 않거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왜 그런 일을 벌이셨나요?”

“같잖아서 그랬다. 분수를 알라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신과 독대한 자리에서 희희덕거리며 자신을 우습게봤던 것에 대한 벌이었다. 감히, 누구를 모욕하려 드는가. 그와 자신의 차이를 알게 해주려는 속셈이었다. 때문에 그에게도 문자를 보내 넌지시 알린 것이고.

알면 어쩔 건데?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말 한마디에 넙죽 엎드려야 하는 신세야, 라는 걸 몸소 느끼게끔 해주고 싶었다.

“겸사겸사, 시은이 걔도 정신 차리라는 의미고.”

기껏해서 들어간 곳이 그런 이름도 없는 회사라니. 수많은 러브콜을 거절한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그녀가 그 회사를 선택한 것은 큰 실수라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받은 자신을 비롯한 유수의 기획사 대표들을 대신해 가르침을 내린 셈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네요. 결국 본인의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신 거잖아요?”

“노력? 노력이라고 했나? 우습군. 진짜 노력은 그런 게 아냐. 진짜 노력이란 건 말이야,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때가 진짜 노력인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증명할 수 없는 한 그들의 노력은 ‘노력’이라 불러선 안 된다는 뜻이야. 대훈이 그놈이 하는 건, 그냥 시간 낭비라고 하는 거야. 시간과 돈과 인생을 낭비하는 거지. 결국 그의 끝이 어떻게 될 거 같아? 몰라? 자네는 모를지 몰라도 나는 알지. 그놈, 결국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질질 짜다가 종국에는 간판 내리고 도망갈 녀석이야. 아니, 간판이라도 내릴 수 있으려나? 쥐새끼처럼 야반도주해서 숨어 살 놈이야. 절대 햇볕 아래서 얼굴 못 들고 살 놈이라고.”

뭐가 저렇게 분에 차서 소리를 지를까. 세상 모든 것들이 자기 뜻대로만 움직여야 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철저히 배제시켜버리겠다는 뜻일까?

“한심하네요.”

단유의 대꾸에 광식이 눈을 부릅떴다.

“애초에 대화로 잘 풀어보자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평범하게는 해결이 나지 않겠군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설령 자네가 돈을 싸들고 와서 내게 바친다 해도 내 마음이 쉽게 바뀌진 않을 거야.”

“대표님께 돈을 바쳐가면 일을 해결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대표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호기심이 생겨서, 그 호기심이나 풀어야 겠습니다.”

“응?”

“대표님은 스스로를 그리 특별하다 여기시는데, 그럼 대표님이 얼마나 특별하신 분인지 궁금해서요.”

“보면 모르나? 지금 보고 있는 자체로도 특별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네도 그저 그런 흔한 사람들 중 한명이란 뜻이겠지.”

단유는 답답함에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다. 무논리를 논리정연한 척 말하는 뻔뻔함, 어쩌면 저 자신은 그게 무논리인지 전혀 인지도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과의 대화가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가? 지금이 바로 그렇다. 논리가 없는 사람은 이성이 없는 사람인 거나 마찬가지.

대화를 시도하기 이전에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몇 가지 시나리오들은 그 순간 폐기했다. 차분하게 대화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협상을 통해 적당히 양보하고 적당히 이득을 보자는 생각은 순진했다. 자기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입장에 선 이가 이렇게 단순 무논리일 줄은 가정하지 못했다. 미친 왕도, 미치긴 했어도 논리적인 편이었는데, 이건 도를 지나친다.

“정 대표님은 노력을 많이 하셨나요?”

“귀가 안 좋은가, 머리가 나쁜 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결과로 보여주는 것이 노력이라고. 난 이제까지 수많은 결과를 만들어냈고 보였네.”

“그 결과를 제가 이제껏 보지 못해서 말이죠.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랬는데, 아무래도 전 그런 행복은 평생 갖지 못할 것 같네요. 그런 의미로 대표님의 노력을 한 번 보고 싶네요.”

“앞으로도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네. 난 끊임없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니까.”

“그런가요? 그렇다면 좋겠군요.”

단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날씨가 쌀쌀하군요.”

주변을 돌아보는 단유의 모습에 광식은 혀를 찼다.

“할 얘기는 다 한 건가? 그럼 이제 가보게. 가서 자네 대표에게 전하게. 용서받고 싶으면 직접 와서 말하라고. 밑에 사람 시켜서 이런 수작 부리지 말고. 직접 올 용기도 없는 놈이 무슨 대표라고.”

“여기 꽤 넓어 보이는군요.”

“이 홀이 꽤 넓긴 하지. 그래서 많이들 찾는 곳이고.”

왜 갑자기 화제를 돌리나 싶어 의아해하는 찰나, 단유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디 빠른 시간 안에 뵙길 바라겠습니다.”

“뭐?”

“대표님 말씀처럼 노력하시면 뭐 조만간 다시 뵐 수 있겠죠.”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답잖은 질문이나 던지다가 이렇게 퇴장하는 것인가? 처음에 나타났을 때는 무슨 일이라도 벌이려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단유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떠나려는 모습이었다.

하긴 어느 누가 감히 자신에게 대들 수 있겠는가? 뒷일을 생각하면 절대 자신에게 무례할 수 없다. 뒷일을 생각 못 하고 대들면 대훈의 꼴이 나는 것이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번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차라리 잘 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야 앞으로 누구도 자신에게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니까. 그 본보기를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응?”

그런데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눈 앞에 서 있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잠깐 시선을 비껴 옆을 바라봤는데, 그 짧은 순간 몸을 숨겼다?

아니, 그건 불가능이다. 티 그라운드 근처 어디에도 몸을 숨긴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도 성인 남성의 몸을 숨기기엔 적당하지 못하고, 더구나 주변으로는 언덕 없이 넓게 펼쳐진 녹지만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단유를 놓쳤던 사이에 몸을 숨기다니, 절대 불가능이다.

“어디 갔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야? 야!”

소릴 질러 불러도 누구 하나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차가운 바람이 눈앞에 넓게 펼쳐진 페어웨이를 지나 광식을 덮칠 뿐이었다. 으슬으슬 추운 느낌에 양팔을 몸에 바짝 붙이고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어디로 간거야?’

무슨 마법을 부리지 않은 이상, 이곳에서 몸을 숨길 수는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소리쳐 불러보아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

정처 없이 떠돌던 시은과 그녀의 매니저는 결국 서울 근교까지 차를 몰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서울을 벗어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었고,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생각처럼 딱히 목적지를 정할 수 없었던 탓에 의미 없이 도로를 내달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연락이 와 찾는다는 소리에 매니저는 차를 돌렸고 곧 왔던 길을 거슬러 회사로 향했다.

“무슨 해결책이라도 찾은 거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시은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의도로 말을 꺼내는 매니저를 면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하니 해결책이 있을라고.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아주 모르고 있으면 모를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주워들은 게 있다. 갑자기 돌변해서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 이상, 지금의 상황에서 딱히 해결책이란 게 나올 턱이 없다고 시은은 속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회사 주차장에 다시 차를 집어넣고 내릴 때 즈음, 붉은 노을 가득한 차가운 하늘이 시은의 눈에 가득 담겼다. 평소에도 종종 보던 서울 하늘의 노을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한 느낌이었다. 또는 평화로운 느낌. 세상 모든 일들이 저 붉은 노을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면 오늘처럼 마음 고생할 일은 없을 텐데.

동시에 오늘 예정되었던 쇼케이스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란 질문이 머릿속을 채웠다. 아마도 그 문제 때문에 자신을 불렀을 거란 생각을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때였다.

“어, 또 뵙네요.”

매니저가 먼저 입을 열었고,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있던 시은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단유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계속 주차장에서 저희 기다리신 건 아니죠?”

“네? 하하, 그럴 리가요.”

매니저의 질문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는 몸에 툭툭 털었다. 하얀 서리같은 게 맺혀 있었는지 손으로 털 때마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모습니다.

‘서리?’

스스로 생각하고도 이상하다 여겨 시은은 얼른 머리를 털고 물었다.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

“아, 네. 잠시. 회사 들어가시는 거예요?”

“네, 저희도.”

“그럼 같이 올라가시죠.”

건물 내부로 향하는 문을 열고 몸을 슬쩍 뒤로 물리는 단유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지나갔다.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그 가벼운 행동에 배인 매너가 시은을 미소짓게 했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오른 뒤, 잠깐 어색한 침묵이 돌았지만 단유의 뒤에 서서 그의 등을 바라보는 시은은 개의치 않았다.

‘서늘하네.’

어쩐지 밖을 꽤 오랫동안 돌아다닌 모양이다. 가까이 붙지 않고도 옷에 배인 냉기가 느껴질 정도면 말이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바로 앞에서 대기하던 한 직원이 단유와 그 위에 선 시은을 보고 얼른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단유는 자신을 손가락질 했다가 이내 시은을 향한 말이라는 걸 알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먼저 가세요.”

“고맙습니다.”

또 한번 인사를 건네고 단유를 지나치던 시은은, 무심코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화끈,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다. 시은은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걸음을 빠르게 옮겨 대표가 기다린다는 회의실로 향하고 그 뒤를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갔다.

단유는 그 뒤를 따라가는 대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일단 여기서는 ‘재무이사’가 활약할 일이 없었다. 당분간은 자신의 일을 하며 일이 잘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자신의 호기심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

한편, 단유가 사라지고 난 뒤 남겨진 광식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단유와 맞닥뜨린 곳은 클럽 하우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갑자기 사라진 단유를 찾기보단 먼저 자리를 떠났던 이 대표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걸음을 옮겼는데, 걷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도 클럽 하우스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골프장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티 그라운드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뒤에는 티 그라운드가 있고, 넓게 펼쳐진 페어웨이의 녹지는 눈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즉,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말.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는데, 안 되는 상황이 현실이 되어 광식을 덮쳤다. 차가운 겨울 바람과 함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