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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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한 잔 받으시죠.”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진다.
“술맛이 좋습니다, 그려.”
“특별히 이 대표님과 잔을 나누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어떤가요?”
“애주가로 소문이 자자하시더니, 역시 정 대표님이십니다. 이런 술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이 대표님이 전통주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수한 겁니다. 보통 제주하면 고소리술이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소리술 말고도 유명한 전통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구한 것이죠.”
“직접 가신 겁니까?”
그럴 리가. 광식이 미쳤다고 술 찾으러 발품을 팔겠는가, 마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술은 직접 양조장에 가서 받지 않으면 구할 수 없거든요.”
물론 술잔을 기울이는 이 대표 역시 광식이 아랫사람을 시켰겠거니 짐작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허, 그럼 정말 귀한 술이군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술이 맛있다는 것이고, 자신은 그저 술잔의 술을 비우면 그만이다.
잔을 비우고 독한 술의 향기를 음미하며 진한 탄성을 흘리는 이 대표의 눈에 푸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골프장이 보인다.
“필드 서기도 전에 취해버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원래 독한 술이 빨리 깬다지 않습니까? 아마 필드에 서실 때 쯤이면 말짱할 겁니다. 그리고 천하의 이 대표님이 술이 약하실 리 있습니까?”
“것도 옛말입니다. 요즘은 체력이 달리는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중년의 비애란 것이지요. 저도 부쩍 느끼는 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술이 중년의 비애를 싹 잊게 해준다네요.”
“오호, 그렇습니까?”
“시중에 많이들 찾는 야관문주나 노봉방주 같은 것들보다 100배는 좋다 합니다.”
“그렇게 좋은 것을 여태 왜 몰랐을까요?”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알음알음으로 구하는 술이라고. 이 술을 만드는 도가가 워낙 영세해서 판매량을 늘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술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소량만 생산하는 이유도 있고요.”
“아, 그런가요? 역시 어디나 소수의 특별함이란 게 있나 봅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흔해 빠진 것들 속에서 특별한 것은 찾기가 어려운걸요. 항상 특별한 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지요.”
“그 소수에 저도 포함됩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십니다? 하하. 한잔 더 하시죠.”
술이 담긴 백자기를 들어올리는 광식의 미소 역시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아무튼 어려운 부탁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구 부탁인데 안 들어드립니까? 이럴 때 도와야 다음에 저도 정 대표님 도움을 받죠.”
“말씀만 하세요. 제가 힘 닿는 데까지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런 귀한 술까지 맛 볼 수 있게 해주시면서 뭘 더 바랄까 싶지만, 염치 불구하고 다음에는 제가 먼저 손을 벌리겠습니다.”
“그럼요. 말씀만 하세요, 말씀만.”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술집도 아니고 골프장 내 클럽하우스에서 저리 만담을 나누며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니, 회사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대훈이 괜히 가여워지는 기분이다.
‘이 대표’로 지칭되는 정광식의 앞에 앉은 이가 아마도 유통사 대표일 테다. 유통사 대표와 매니지먼트사 대표가 만나 나누는 이야기치고는 참 실없다. 하긴 평일 대낮에 골프장에서 무슨 심각한 이야기라도 나누겠는가?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클럽하우스 내 조용한 밀실에서 저리 이야기를 나누니 최소한 지금의 모습이 남들에게 보일 모습은 아니란 걸 아는 모양이다.
단유는 쯧, 짧게 혀를 차며 시선을 거뒀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핸드폰에 실행해두었던 해킹 프로그램도 종료시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팔방 푸른 녹지가 과연 겨울의 한가운데인 지금의 계절에 어울리나 싶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모습이다.
듣기로 겨울엔 비수기라는데, 굳이 골프를 치기 위해 여기 제주도까지 와서 유흥을 즐기는 모습도 탐탁지 않은 풍경이다. 저들이 합작하여 만들어놓은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으리라.
이 또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유흥인 걸까? 하긴 돈 없는 사람이 골프 치려고 회사일도 팽개치고 골프장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주변에는 아직 필드에 나선 이가 보이지 않는 상황. 단유는 동네 마실 나온 백수 마냥 유유히 필드 위를 걸었다. 새벽에 살짝 얼었다가 녹은 잔디가 주는 약간의 저항감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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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있던 ‘급식이’들은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어떻게 된 일이냐며 달려들었다.
마침 연습실에 내려와 있던 매니저는 그들을 어떤 식으로 진정시켜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스스로가 이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의 직무를 다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위에서 처리할 테니까, 너희들은 신경 쓰지 말고 연습에 집중한다. 내년부터 다시 반이 새로 배정되는 건 들었지?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배우반, 가수반으로 나눠서 연습하게 될 테니까 지금 배우는 건, 지금이 아니면 못 배울 것들이야. 나중에 기초가 부족하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면 힘든 건 너희들 본인일 테니까 게으름 피우지 말길 바란다. 알겠지?”
“네.”
“대답이 왜 이렇게 작아! 알았어, 몰랐어?”
“네!”
“모르겠다고?”
“아니요, 알겠습니다.”
“그럼 잡담 그만하고 선생님 오실 때까지 각자 연습들 하고 있어.”
이 아이들에게 이런 저런 구체적 사정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야기해봐야 더 많은 말들만 만들어지고 도움이 될 일은 전혀 없으니까. 모르는 게 약인 상황이다.
‘벌써부터 더러움을 아는 것도 좋진 않겠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들 알게 될 이 바닥의 어두운 면이다. 한참 밝게 커야 할 아이들이니 적당히 정보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도 본인의 업무다.
“어수선하죠?”
주어가 생략된 물음이었지만, 무슨 질문인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죠. 아이들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특히 자기가 처음 출연한 뮤직비디오인데.”
매니저의 답변에 트레이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무팀을 맡고 있는 트레이너를 찾아가 다음 레슨 때 조금 더 빡시게 아이들을 잡아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나선 매니저였지만, 이미 그렇게하고 있다며, 더 잡았다가는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손을 젓는 트레이너였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요?”
“음, 경우는 다르지만 없진 않았죠.”
“어떤 경운데요?”
“발매 예정이었던 음반이 기술적인 문제로 발매 연기가 된다거나, 쇼케이스 당일 아티스트에게 큰 사고가 생겨서 발표 시기를 늦춰야 했거나, 뭐 그런 일들이죠.”
“지금과 같은 경우는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적어도 제가 매니저로 있는 동안은, 네, 없었네요.”
“거 참. 황당하네요, 정말.”
“그러니까요. 사실 우리도 우리지만, 위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습니다.”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회의를 끝낸 개발팀장이 사무실에 내려와 직원들을 소집해 다급히 대책안을 강구해 보라고 주문을 넣는 경우라면, 분명 간부 회의 때 적절한 대안책이 제시되지 못했음이라 판단해도 될 것이다.
“그래도 완전히 앨범이 못 나오거나 하진 않겠죠? 그래도 시은인데?”
“시은이란 네임밸류는 팬들이 만들어 준거니까요. 아무래도 팬들이 요청하면 나오긴 할 겁니다만, 그런 식의 여론전으로 앨범이 나오는 건 회사 입장에선 좋지 않죠. 무능력한 회사라는 이미지만 부각될 테고 앞으로 우리 회사를 통해 데뷔하게 될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위에서도 그걸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매니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더 큰 문제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다. 결국 이 사태는 회사의 힘으로 극복해내야만 한다. 사실 이미 회사의 이미지에 큰 손실이 가해진 상황이나 마찬가지. 일반 대중에게야 있는 듯 없는 듯한 이미지겠지만, 업계에서 ‘낙인’이 찍혀버리면 아무래도 앞으로의 행보에 큰 지장이 생길 터였다.
그리고 회사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긴다는 건, 곧 회사에 소속된 모두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간다는 것이니 매니저나 트레이너나 모두 걱정하는 부분이다.
“시은이는 어쩌고 있대요? 혹시 들은 거 있어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모처에서 일단 쉬고 있다는 연락이 있었답니다.”
“왜 회사로 안 오고?”
“회사에 있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또 회사 사람들에게 눈치 주고 싶지 않아 배려하는 것일 수도 있고.”
뭐 그 속내야 제3자가 어찌 알겠는가. 당장 머릿속에는 자기 일자리에 대한 고민과 연습생들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데 시은의 불편한 심경까지 헤아릴 여력은 없다.
“아무튼, 저는 다시 사무실로 가봐야겠습니다. 아무쪼록 연습생들 레슨은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일인데요.”
‘일’이니까 하는 거다. 지금은 ‘일’에라도 집중해야 할 때다. 놀고 먹으면서 돈 벌 생각인 사람은 적어도 이 회사에는 없으니, 매니저 역시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래도 잠깐 휴게실에 들러 커피 한잔 뽑아 마시는 건 괜찮지 않을까?’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괜히 피곤해지는 기분이라, 커피라도 마시며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
****
정광식과 유통사 이 대표가 술자리를 끝내고 클럽 하우스를 빠져나온 건 대략 1시간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불긋한 얼굴을 하고 필드로 나오니 과연 광식의 말대로 독한 술이 빨리 깨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주도를 지나는 차가운 해풍의 영향 때문인지 술기운이 많이 가셨다.
“라운딩 도는 데는 지장이 없겠습니다.”
“이 대표님 실력을 제가 아는데 그러십니까? 티를 꽂기도 전에 엄살이 심하십니다.”
“엄살이라뇨. 아직 정 대표님 따라가려면 한참 모자랍니다.”
“뭐, 오늘은 즐기러 온 거니까 서로 부담 없이 즐기죠.”
“부담 없이 싹슬이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하하, 제가 ‘니어’ 약한 거 아시잖습니까? 오히려 이 대표님이 봐주시면 고맙겠네요.”
“하하하, 대표님 엄살이 더 심하십니다 그려.”
하하호호 웃는 두 사람의 걸음은 곧 불청객의 등장으로 멈췄다.
“응?”
눈에 익은 사내가 해를 등지고 섰다. 잠깐의 분석 후, 광식은 상대가 예전에 만났었던 단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유의 인사에 이 대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 여기는···.”
단유는 이 대표에게 시선을 주며 인사를 건넸다.
“D&D 엔터의 재무이사 김단유라고 합니다.”
단유는 분명하게 신분을 알리는 동시에 여기에 온 목적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D&D?”
귀에 익은 회사의 이름에 이 대표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난 무슨 배우나 되는 인 줄 알았더니, 이사‘씩이나’ 되는 분이셨군요. 꽤 젊어 보이시는데.”
다소 낮춰보는 듯한 어투. 이유는 그가 밝힌 소속이 막 작업에 들어갔던 회사인데다, 그런 회사의 ‘이사’라면 당연히 ‘급’이 비교가 안 되게 낮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급과 비교할 때 말이다.
“여기 어쩐 일인가?”
불쾌한 얼굴이 된 광식이 입을 열자, 단유가 물었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요.”
“이유?”
“네.”
“다짜고짜 무슨 말인가?”
“아실 텐데요.”
“······.”
잠깐 단유와 광식 사이에 말 없는 시선이 오갔다. 그리고 광식이 시선을 비틀어 이 대표를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불청객 때문에 불편하게 만들어서.”
“대표님이 부른 것도 아닌데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봐요.”
이 대표는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캐디를 바라보았다. ‘여기 시큐릿 좀 불러주게’라고 지시하는 이 대표의 말을 광식이 막았다.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예전에 잠깐 말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의 호혜를 기대하며 온 것 같습니다. 제가 처리할 테니 신경쓰지 마십쇼.”
이 대표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단유를 힐끗 바라본 뒤, 짧게 혀를 차고는 ‘술도 깰 겸 잠시 하우스에서 쉬고 있을게요’라고 답했다. ‘금방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이 대표를 보내고 캐디들까지 물린 후, 광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건가?”
“어떻게, 는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니 우선 대화를 나누죠.”
“대화?”
“말씀드렸듯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죠. 왜 그런 일을 벌이신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거든요.”
“내가 벌였다는 증거라도 있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진 않으신 모양이네요.”
입을 다문 광식의 눈이 꿈틀거리며 빛을 뿜었다. 어둡고 음습한, 그리고 광포한 맹수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