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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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유는 모인 이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간 회사를 다니며 자주 보던 인물도 있고, 낯설다 싶을 정도로 옅은 인상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이사회 정기 회의 때와 달리 사내 ‘간부’로 통칭되는 이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뭔가 열띤 토론이라도 벌어져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맞닥뜨린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간부진들은, 사실 기대했던 것보단 멋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하면서 경력을 쌓은 이들이지만, 급박한 상황에 대응하는 임기응변은 조금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우선 대관 시간 변경이 되는지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을 변경한다고 뭐가 되겠습니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그래도 우선 시간을 벌고 그 다음 해결책을 찾아봐야죠.”
“지금 그 해결책을 찾자고 모인 거 아닙니까?”
어쩌면 그동안 하루 8시간 이상을 들여 하던 일이라는 게 이제껏 해왔던 루틴과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는 것이라 창의성을 발휘해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시도가 없었던 탓일 수도 있고,
“유통사에 강한 항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당연한 소리는 하나마나입니다. 그리고 항의를 한다고 들어줄 것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럼 팀장님은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사사건건 반대만 하지 마시고 의견을 내보세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만 하시니 그럽니다.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 우리만 정상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겠습니까?”
말처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 정상적인 방법만 찾으려다 보니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회의에 나온 이상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는지 이것저것 의견들이 나오지만 신통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겠죠.”
대훈의 넋두리 같은 고백에 다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제가 힘이 없는 것이고.”
여러 번 언급된 바 있지만, 연예계는 소위 인맥이라는 것이 꽤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에서는 어떤 창작품―상품도 단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탓이다. 곡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작곡가, 작사가, 프로듀서를 비롯해, 수많은 세션과 엔지니어들이 참여하고 더 나아가 연예기획사와 유통사, 방송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연계되어 발표되는 현실이다. 가수 뿐 아니라 배우도 마찬가지. 감독, 조연출, 미술, 조명, 음향 등 셀 수 없이 많은 인원들이 참여하여 드라마든 영화든 만들어내게 되니 결국 인맥 없이는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다.
그렇기에 산업이다. 생산과 가공, 유통과 판매가 규격화된 프로세스에 따라 이루어지는 산업이다. 게다가 과거와 달리, 전통적인 제조업, 중화학 쪽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자본이 몰리고 수익이 발생하는 산업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다른 분야가 그렇듯, 산업이란 구조에서 계급화된 권력이 탄생하고, 타 업종의 권력자들이 누렸던 권력이 현재 연예계에도 종횡한다. 법과 규율, 규범 위에 선 이들.
그리고 예부터 전해오던 관습인 양, 그들은 과거의 권력자들이 그래왔던 것과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아래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무슨 미덕이라도 되는 듯이 가볍게 무시한다. 애초에 규칙이란 힘이 없는 사람이 지켜야 한다는 듯.
더 나아가 그들은 규칙과 무관하게, 그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래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억압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비록 사회가 고도화되며 그러한 행위가 뭇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어떤 경우에는 지탄을 받아 지위와 권위가 추락하는 일이 벌어지기에 조금씩이나마 자제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들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묵언의 수도승처럼 입을 다문다. 자랑할 일이 아니니 가해자도 말을 아끼지만, 피해자 역시 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해 피해를 감수한다.
왜?
“힘이 없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힘을 기르려 하고, 성공하려 한다. 성공의 과실이 달콤하니까? 아니다.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업계에서 성공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서 성공, 아니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은 실력과 노력 이상으로 인맥이 중요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뛰어난 사업 수완도 필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일개 매니저에서 일약 기획사 대표로 거듭난 대훈은, 인맥이 아주 없진 않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도 많고, 방송국에 들어가면 얼굴 마주하고 인사를 나눌 이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중에 ‘권력’을 가진 이는 없다. 권력자들, 힘 있는 사람들이 서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그곳에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대훈으로서는, 지금의 상황에 무력할 뿐이다.
회의는,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의 조심스러웠던 혹은 신중했던 분위기와 달리 종반에 다다를수록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마케팅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총무부라도 나서서 돈이라도 풀어야 합니까?”
“언론 대응은 홍보팀에서 담당하는 것 아니었나요?”
“경영지원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진행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법무팀에서 이 부분은 협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단유가 낄 곳은 없었다. 아직 일을 잘 모른다는 핑계도 핑계지만, 이미 대화의 주제는 누구의 책임소재를 물을 것인지,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해 나갈 것인지로 부서별 싸움이 되어 있었다.
회사는 창의적인 아티스트들을 케어하고 매니지먼트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지만, 소속 직원들까지 창의적일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단유도 대충 회의의 분위기는 읽을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대충 회의를 마치자는 뜻이겠구나, 라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열을 올리고는 있지만, 정말 열을 올리고 있다기보다는 상사들에게, 대표에게 우리가 이만큼 노력하고 있습니다, 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 같은 퍼포먼스로 느껴졌다. 그 또한 오랜 직장 생활에서 생겨난 노하우인 걸까?
“일단은 지금 이야기 나온 대로 정리해 봅시다.”
회의 진행을 맡았던 경영지원팀장이 그렇게 마무리지었다. 나온 이야기라.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고 대훈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그저 사람 좋고 농담하길 좋아하는, 그리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이지만, 오늘의 그는 꽤나 무력해 보였다. 단지 무능력하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누구라도 이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면, 저런 얼굴로 기력을 잃고 말 것이다. 문제는 언제 다시 전과 같은 에너지를 회복할 것인가, 그 언제까지의 텀이 얼마나 짧을 것인가가 관건일 테다.
회의를 끝내고 회의실을 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기왕 회사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었던 때의 각오를 떠올리면 정말로 재무 이사라는 직위에 한정된 일만 하기 위해 입사를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 적어도 지금과 같은 회사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재량권을 뛰어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 보신주의가 단유의 철칙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량을 가늠하자면, 과연 그 재량의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이번에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다. 과연 이 곳,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재량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지 말이다. 과거, 에토신스에서처럼 그냥 지켜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곳과 달리 이곳은 자신이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곳 아닌가?
‘미친왕과 대거리했던 것보단 낫겠지.’
그런 생각을 잠깐 떠올리며 단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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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시은을 보고 인사를 건넨 후 돌아선 단유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주변을 살폈다. 보통은 회사를 나가서 마법을 사용하는 편이지만, 급할 때는 주차장 안쪽 CCTV가 닿지 않는 곳에서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 급한 경우가 여태 많지 않아서 잘 이용은 안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무래도 시간 싸움이 될 거란 판단에 주차장에 내려왔던 것인데 우연히 시은을 보고 말았다. 모른척 지나가기엔 마침 그녀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곳이 단유가 마법을 사용하려 했던 곳에서 멀지 않아 그냥 모습을 감추기보단 인사를 하며 동태를 살피는 쪽이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어쨌든 뒤로 돌아서서 걷고 있으니 곧 시동이 걸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바닥을 거칠게 찢는 듯한 타이어의 비명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인형을 빼앗긴 아이가 화를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부리는 듯한 소리가 끼익끼익 거리며 이어지다 멀어졌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기다려보다가 이윽고 정적이 찾아든 주차장. 단유는 구석으로 가서 마법을 사용했다. 우선은 집으로 가서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단유가 떠난 뒤, 단유가 서 있던 자리에 쌓여 있던 먼지가 미풍에 살짝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즉시 방으로 돌아온 단유는 컴퓨터를 켜고 로딩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회의 중 한 사람이 그런 발언을 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지금 당장 대처할 길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고, 정상적인 대처 방안이 없다는 이야기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내놓을 답변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소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되어야 해결될 수 있을 거란 실마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발언을 하면서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는 비정상적인 여러 가지 수단을 떠올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소 불법적이고, 다소 비합리적이며, 이후 들켰을 경우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수단 같은 것들. 뇌물이라든가, 협박이라든가, 폭력이라든가.
하지만 그들이 상정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비합법적, 비정상적 수단과 단유가 동원할 수 있는 비상식적 수단은 차원 자체가 다르다.
‘이걸 쓸 줄은 몰랐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때로는 너무 시간이 넘쳐 나는데 할 게 없을 때, 그저 반쯤 장난삼아 만들어놓았던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CCTV의 해킹은 활용도가 높아 자주(?) 이용했었지만, 이 프로그램은 그리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만들어두기만 했었다. 프로그램 제작의 노하우를 쌓기 위해 경험 삼아 만들어두었던 그것은 바로 원격 모바일 해킹. 따로 핸드폰에 해킹 프로그램을 심어놓지 않아도 얼마든지 해킹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이걸 만들어 보겠다고 마음 먹었던 이유는 CCTV가 너무 쉽게 뚫리는 보안 시스템에 어이가 없었던 탓이다.
각종 전자 기술들로 첨단화되어 가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보안에 허점 투성이인 사회 현실을 바라보며 혹시 이것도 되나 싶어 만들어 본 프로그램이었다. 가끔 뉴스에서도 나오는 모바일 해킹이니, 금융사 해킹이니 하는 것들을 보며 도대체 얼마나 허술하기에 그런가 싶어 직접 만들어 본, 호기심의 산물이었다. 테스트 대상은 자신의 핸드폰이었지만, 쉽게 해킹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로는 이용한 적이 없었다.
방법도 간단했다. 상대의 전화번호만 알면 된다. 그러면 해당 통신사의 서버를 거쳐 상대의 핸드폰 단말기까지 다이렉트로 해킹이 가능했다. 이후로 단유는 혹시 이런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핸드폰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킹당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곧바로 해킹을 막는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폰에 설치를 해 둔 상태였다.
완벽하진 않다. 세상에 천재는 수두룩하고, 단유가 만든 것, 혹은 그 이상의 기술로 해킹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아무튼, 그때 만들어 두었던 프로그램을 찾아 실행시키고 오래전에 받아두었던 광식의 명함을 찾아 그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곧 프로그램이 작동하여 상대의 핸드폰에 접속이 가능해졌다. 우선 메시지부터 시작해서, 그의 SNS 기록이라든가, 통화기록이라든가 여타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내고 저장했다.
워낙 좋은 인터넷 세상에 살고 있어서인지, 찾는 것도 금방이었고 찾은 자료들을 다운받는 것도 금방이었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미 대통령의 핸드폰 통화기록도 수십 초 내로 찾아서 그가 오늘 아침부터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어떤 외교 전략을 세우고 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걸 알아 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만.
“쯧.”
최근 몇 개의 전화번호들 중에 중복되는 것이 발견되었고, 몇 개의 메시지들에서 의미심장한 내용들을 찾아냈다. 필터링을 거쳐 알아낸 몇 가지 정보들을 통해 분명 이 사태의 배후에 그가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가능했다.
적어도 대훈의 확신은 사실이라고 판명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