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69화 (869/956)

호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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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셔.”

하은은 건조한 어투로 아버지의 병환을 단유에게 알렸다. 정말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은 아닐 테니, 아마도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리라.

“옆에서 돌봐 줄 사람이야 간병인을 고용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무남독녀인데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잖아?”

하은은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라고 해도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고, 지난 10년간 연락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우습지만, 그렇다고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지내자니 마음이 불편하네.”

그래서 하은은 아버지 곁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단유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면 가셔야죠.”

“그래야 하는 거니까?”

“그래야 하는 거죠.”

“응.”

고개를 주억거리는 하은의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눈동자는 취한 듯 아닌 듯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있을까?

“당분간 자주 못 볼지도 모르겠어.”

“아예 안 보고 사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세요? 그리고 어차피 최근에는 집에서도 자주 보기 힘들었는데.”

“그러니까 말이다. 한 집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 힘든 건, 너나 나나 바빠졌다는 뜻도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내가 널 돌봐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지.”

거기까지 이야기한 하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언제 너를 돌봤다고 이런 말을 하나 싶다.”

“왜요? 선생님이 저나 명수를 얼마나 많이 케어해 주셨는데.”

“명수는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솔직히 넌 혼자서도 잘 해왔잖아? 굳이 내가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어요. 어른이 옆에 있고 없고가 얼마나 큰데요.”

“어른이라. 내가 어른 노릇은 제대로 했을까?”

“그럼요. 당연하죠. 선생님은 언제나 선생님이셨던 걸요.”

하은이 단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 생각해보니 ‘선생님’이란 호칭이 이렇게 ‘운명적’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처음에는 그저 과외로 푼돈이나 벌어보자고 시작했던 일이 내 미래를 결정짓게 될 줄이야.”

단유도 하은과 시선을 마주했다. 커다란 눈, 그 옆에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고 가는 주름들. 그 옆으로 귀밑머리에 살짝 새치도 있는 듯 한데 요즘 바빠서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빠듯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 느긋하게 살라고 도움을 줬던 학원 일이 그녀를 더욱 바쁘고 정신없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싫다는 소리는 않고, 오히려 즐기는 모습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런데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가까이서 그녀를 관찰하니, 세월의 흐름과 현실의 고단함이 얼굴에 깊이 묻어난다.

안타깝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 깊이만큼의 세월을 함께 하며 단유는 그녀 역시 행복했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유와 명수가 행복했었던 것처럼.

세 사람은 그렇게 함께 달려왔다. 오랫동안. 그러다 이제 교차로에 접어들었다. 모든 이들이 거쳐가는 교차로였다. 그곳에서 또 각자의 길로 나아간다. 때로는 함께, 때로는 따로.

모두의 길이 같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 교차로에서 헤어짐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을 말하지는 않는다. 길을 달리다보면 또 다른 교차로에서 마주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 다시 반갑다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눈다. 그게 삶이니까, 지금은 그때로 기약하며 배웅해주면 된다.

****

언제 초설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더러 새벽에 만들어진 빙판길에 휘청하는 사람도 생기지만, 그렇다고 출근을 서두르지 않을 순 없었다.

“목도리라도 하고 가.”

“괜찮아요, 아직은.”

“안 돼, 감기 걸려.”

장 깊숙이 넣어뒀던 목도리를 찾아와 건네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선 지아는 발을 콩콩 굴러 신발을 발에 끼워 넣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목도리로 대충 목을 두르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대충 툭툭 쳐서 자연스럽게 만들면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이른 아침 출근이었다. 보통 때라면 화장대 앞에 앉아서 가벼운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어서 좀 더 서둘러야 했다.

‘볼터치라도 할 걸 그랬나?’

대충 바르긴 했지만, 너무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다. 잠을 설친 까닭에 눈가에도 어둑한 그늘이 진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단지 엘리베이터 내 조명이 어두워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지금 당장은 화장을 고칠 시간이 없었다. 금방 1층에 도착해버린 엘리베이터였다.

마을 버스 정류장에는 이른 시간에도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람은 많지만 누구도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언제 버스가 올까, 도로를 향한 고정된 시선들 속에 지아도 끼어들었다. 잠깐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여유는 있는 편이다. 꺼낸 김에 잠금 해제를 하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이미 확인된 메시지에 기록된 시간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지아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얀 입김이 가래떡 뽑히듯이 주르륵 나와 앞에 선 여자의 두꺼운 외투에 부딪히며 사라진다.

비록 그녀의 뜨거운 입김은 금방 사라지고 말지만, 지난 밤 내내 품었던 기대와 희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테다. 물론 걱정도 한가득이지만.

오늘은 드디어 대망의 신곡이 출시되는 날. 비록 전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선공개곡이 음원과 뮤직비디오로 먼저 나오게 되었는데, 선공개곡이 무려 지아가 참여한 곡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지아가 들어온 후로 시작된 작업이라 지아는 앨범이 만들어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지켜보기만 했을까. 무려 그녀가 작사한 곡이 실리기까지 했다. 비록 공동 작사라는 타이틀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그리고 그게 오늘 빛을 보게 되니, 설레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대학 다닐 때도 밤을 새우듯이 연습하며 과제를 준비한 적도 있었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교수와 몇몇 학생들을 앞에 두고 연주하는 것과, 수천 수만의 고객을 대상으로 음원을 내놓는 일이 어찌 비교될까.

회사 차원에서야 투자비용과 회수에 대한 문제로 고민할지도 모르겠지만, 지아에겐 그저 지난 시간의 노력과 수고가 들어간 곡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다 정도다. 하지만 역시 모두가 오늘 일의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비슷할 것이다.

조금 낙관적으로 보는 면도 있다면, 역시 이 곡의 주인이 바로 시은이라는 점. 무려 시은의 곡이니 결과를 희망적으로 보는 측면이 많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했던가? 시은이라면 정말 완전히 망하지 않은 이상 충분히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이라고 다들 말했다.

처음 참여한 곡인데 대박이 난다면?

앞뒤좌우 밀치고 밀리는 가운데에서도 오늘 나올 곡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이 없어 하마터면 내리는 역을 놓칠 뻔 했던 지아는 막 출발하려는 버스 안에서 ‘잠시만요’를 다급히 외치며 사람들을 헤집은 뒤에야 겨우 내릴 수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니 썰렁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미 로비에서부터 출근하는 여러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지만, 최근 심부름을 여기저기 다니는 동안 얼굴을 익힌 이들도 있어 가벼운 목례 정도로 아는 척을 했다. 보아하니 그들 역시 오늘의 이벤트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일찍 왔네.”

홀쭉한 창모가 힘없이 손을 들어 반겼다.

“또 밤새셨어요?”

“넌 잠이 오든?”

“아뇨, 저도 잘 못 잤어요.”

“너도 그런데 나는 어떻겠어? 몰라, 일단 오늘 오후 6시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려면 편히 잠들기는 글렀다.”

“커피 뽑아다 드려요?”

“그래주면 고맙고.”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작업실을 나와 휴게실로 향한 지아는 휴게실에서 예상 못했던 사람과 마주했다.

“어? 이사님?”

“일찍 오셨네요.”

오랜만에 마주치는 단유였다. 지난 번 재무 이사로 취임했다면 인사를 온 뒤로는 한 번도 회사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사로 취임하기 전에는 가끔 휴게실이나 복도에서 마주치기도 했었는데, 재무 이사가 된 뒤로는 사무실 바깥을 나오질 않는 건지, 요 며칠 부산하게 돌아다녔음에도 그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그 전에는 정식 이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이 없어서 그렇게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정식 이사가 된 뒤로 부쩍 일이 많아져서 휴게실에 올 짬도 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마침 얼굴을 마주한 김에 인사를 해야지, 지아는 마음 먹었다.

“주세요, 제가 뽑아 드릴게요.”

“괜찮아요. 어차피 선생님 커피 뽑는 김에 하면 되니까.”

“네.”

단유가 들고 있던 잔을 받아 먼저 커피머신 아래에 두었다.

“오늘 지아 씨가 쓴 곡이 나온다면서요?”

“아, 네.”

“기대가 많이 되시겠네요.”

“기대는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

“겸손하면 안 될 타이밍인데.”

“네?”

“지아 씨가 쓴 곡이지만, 결국 시은 씨의 곡이잖아요. 잘 안 되면 시은 씨 탓이 되버리니까, 안 되면 안 된다고요.”

“아, 그렇네요. ···잘 되···겠죠?”

“잘 되야죠.”

머신에서 거친 그라인딩 소음이 울려퍼지며 대화가 잠시 멎었다. 성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울부짖던 머신이 뚝 울음을 그치더니 이내 쪼르르 뜨거운 커피가 노즐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내 주변을 가득 메우는 원두 커피의 향. 잔에 차오르는 크레마가 보기 좋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잔을 받고 돌아서려는 단유를 황급히 불렀다.

“저기, 이사님.”

“네?”

“어, 저기, 고맙습니다.”

“뭐가요?”

커피를 먼저 마실 수 있게 배려해준 건 지아인데 왜 그쪽이 인사를 하지, 하는 눈치였다.

“이사님 덕분에 이런 좋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잖아요. 게다가 제가 쓴 가사를 시은 씨가 불러주는 영광도 얻고요. 이게 다 이사님 덕분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붙잡고 말하는 도중에 지아의 머릿속에 예전 쇼핑몰 앞에서 벌였던 추태가 떠올라 부끄러워져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예전에는 죄송했어요.”

‘예전’이란 두루뭉술한 표현에도 단유는 찰떡같이 알아듣는 모양새다.

“이미 끝난 일인데요, 뭐.”

단유는 별로 할말이 없다는 투였다. 지아는, 문득, 그가 예전 일로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분명 자신이 잘못한 일이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지아.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 지아가 슬며시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려는 찰나, 단유가 입을 열었다.

“지난 번에 오셨을 때도 사과하러 오셨던 거고, 그때 이미 사과를 받겠다고 했으니 그건 끝난 일이에요. 이렇게 거듭 사과할 일도 아니고. 그런데 이렇게 또 사과를 하시면 제가 지난번 사과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믿거나 혹은 지난번 사과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과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네요.”

조금 전까지 들떠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저는 정말로 지아 씨에게 아무런 감정 없습니다.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도 없고요, 저희 사이의 문제는 지아 씨가 회사로 찾아왔을 때 이미 풀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하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들어보니까 요즘 지아 씨가 일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하더군요. 작곡이라는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고 그러고, 회사 일에도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만 내세우는 사람보다는 행동과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 더 끌리는 법이잖아요? 그러니 따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예전 일을 상기시키며 과한 사과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단유는 커피잔을 살짝 들어보이며 ‘잘 마실게요’라고 대답하고는 먼저 카페테리아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지아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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