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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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음흉하다 여겼던 여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대신 핍박에 그늘진 투사의 얼굴이다. 기회만 생기면 벌떡 일어나 주먹 쥐고 달려들 것만 같은 표정. 그러나 지금은 그 마음에도 상처를 입었는지 숨죽이고 있는 모습.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단유를 바라보지만, 이내 시선을 피한다.
“오늘 저녁에 고기 먹는 거예요?”
순수하게 웃는 시화의 한 마디에 아이들이 핀잔을 던진다.
“다이어트 해야지.”
“너 그러다 실장님한테 들키면?”
“뭐 어때요? 이사님이 ‘굳이’ 사주시겠다는데 안 먹을 수 없잖아요?”
벌써 고기는 확정인 듯 대답하는 본새가 밉지 않다. 시화는, 16살이라는 자신의 나이가 무기임을 아는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이쪽 세계에서 어리다는 건 꽤나 큰 장점, 이라는 걸 들었다. 어리고 예쁘면 만사 오케이, 까지는 아니지만 거기에 기획사의 체계적인 트레이닝 속에서 스킬을 쌓으면 대훈이 말했던 ‘스타’의 탄생이다.
문득 오래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젊고 예쁘고 열정이 넘치던 아이들이 땀방울을 흘리던 모습. 지금, 이곳처럼 쾌적한 환경은커녕 비오면 눅눅하고 어질어질해질 정도의 냄새가 복도를 가득 메우던 그곳에서도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꿈을 키우고 있었다. 지금 그 아이들은 다들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때의 그녀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쩌면, 그날의 기억, 그날의 추억, 그날의 모습들 때문에 단유는 지금의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피식, 또 웃음을 지으니 아이들은 오해했다.
“오케이, 오늘 고기 뷔폐 가즈아!”
김치찌개 백반집보다는 고기 뷔폐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연습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단유를 보며 아름은 목구멍이 매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검은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간질거리는 느낌이랄까. 혹은 속에서 생긴 검은 악의가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불쾌하고 불편해, 아름은 시선을 돌렸다.
그가 나간 후에야 아름은 다시 시선을 돌려 연습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는 바람에 아름은 순간 움찔했지만, 들어온 이는 단유가 아닌 트레이너다.
아이들이 트레이너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니,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들떠 있어?”
라고 받아주는 트레이너.
“이사님이 밥 사준다고 하셨어요.”
“이사님? 누구? 김 이사님?”
“네.”
트레이너는 질투 난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그래서 좋아?”
“네!”
“그래? 그래도 우선은 연습해야지. 이왕 하는 김에 오늘 빡시게 한 번 해보자. 땀을 잔뜩 빼놓아야 밥맛도 좋아지겠지.”
아이들의 투정 섞인 탄식에도 트레이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당히 아이들의 기분을 맞춰 줄 줄 아는 트레이너와 그에 맞춰 기운내 보자고 파이팅을 외치는 아이들. 며칠 전, 연습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깡그리 잊었던가, 아니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태도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름의 시선은 여전히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슨이 시작된 뒤로는 단 한번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도 그의 그림자를 지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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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단유는 영국으로 향했다. 패티는 오랜만에 만난 명수와 상미를 보며 반갑다고 난리법석을 떨었고, 새로 묵게 될 집이 좋아서인지 넓은 거실을 신나게 뛰어다니고 곳곳에 오줌을 뿌려댔다. 덕분에 상미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명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갑다며 패티의 뒤처리를 도맡았다.
“선생님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되었네. 다음에는 꼭 오겠대.”
“어쩔 수 없지.”
최근 하은이 다소 변한 느낌이 들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어 명수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쁜 쪽으로 변한 것도 아니고, 단유가 입사를 결정한 뒤로 이것저것 공부를 핑계로 바빠진 탓도 있는 데다가, 원래 하은이 바쁘기도 했던 탓에 서로 얼굴 볼 시간이 적어진 탓도 있다, 고 단유는 판단했다. 탓, 탓, 탓.
그러고 보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평소처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가 어렵다는 느낌이다. 외부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는 그렇게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소 감정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가족이니까.’
가족에게까지 냉정하게 굴 수는 없지 않은가? 다소 못나 보이고, 다소 잘못된 면이 있다 해도, 이해하려 노력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굳이 애를 쓸 필요도 없다. 그냥 그렇게 돼버린다.
명수에게도 그런 마음이다. 설령 그가 조금 상식이 부족하고, 다소 다혈질적이고 단순한 면이 있지만 충분히 수용 가능한 범위다.
“이게 풀코스 대접이었어?”
“여기서 파는 핫도그가 일품이거든. 넌 운 좋은 줄 알아. 어떤 사람은 줄서서 기다리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대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기 맥주랑 같이 마시면 돼.”
경기장 인근의 작은 스낵바에 단유를 데리고 간 명수는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금방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아시아에서 온 스트라이커는 득점 랭킹 2위에 걸맞게 수많은 골을 넣어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냈기에 지역 내 그의 인기는 과연 적지 않았다. 악수를 건네는 이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사인을 해 주는 모습을 보며 단유는 명수의 색다른 면을 본 듯했다. 아니, 조금은 낯선 느낌이랄까?
보육원 운동장에서 뻥축구나 하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원내 식당에 들어가는 바람에 선생님께 혼이 나던 모습을 기억하는 단유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금의 광경에 괜히 뭉클한 기분까지 들었다.
과연 누가 지금의 명수를 상상했을까.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고 말하고 다니긴 했지만, 막상 머릿속에서만 떠올리던 장면을 현실에서 목도하니 괜히 울컥하기까지 한다.
“너, 지금 자랑하려고 여기 데리고 온 거지?”
“티 나?”
“응. 많이.”
“아쉽네. 선생님도 왔었으면 좋을 텐데.”
손에 묻은 소스를 쭉쭉 빨면서 대답하는 명수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단유도 손에 들린 남은 핫도그를 마저 먹어치웠다. 줄서서 포기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것 같진 않고,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해도 금방 절판될 정도로 적은 양을 만드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맛있긴 했다.
****
한때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정말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지만, 지금은 꽤나 오래전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혹자는 말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회사에 나가 몇 시간씩 일하고 밥 먹고 다시 일하고 돌아오는 하루의 일상이 지루하다고.
그럴 리가.
직장 상사의 괴롭힘, 배려 없는 동료들에 대한 이득 없는 감정 싸움에 지쳐간다고. 밥 먹듯 야근하고 물 마시듯 술 마시고, 때로는 불필요한 신체 접촉으로 법정 싸움까지 고민해야 할 정도가 된다고.
그럴 리가.
나중에,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 따위 할 여유가 없다.
여유? 그런 거 줘도 안 할란다. 지금은 그냥 알림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혹시나 싶어 저장해둔 핸드폰 알림을 끄고, 화장실에 들어가 광속으로 세안과 화장을 마친 후, 부리나케 집을 나서는 일련의 과정이 즐거울 따름이다.
출근길 마을 버스, 지하철에서 부대끼는 일도 썩 나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개인의 감정과 별개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많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나 도대체 오밤중에 뭘 했는지 의심스러운 구취에 코를 막고 싶을 때도 있고, 앞뒤좌우로 몸을 비벼대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그 순간만 지나면 된다. 크지 않은 빌딩, 하지만 내부에는 아무에게나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잘 꾸며진 로비를 지나며 걸음은 상쾌해지고, 엘리베이터를 거쳐 작업실로 들어가면 밤샘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눈자위가 거무죽죽한 상사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흔든다.
“왔어?”
“밤 새셨어요?”
“이제 이 짓도 오늘이 끝이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은 일러. 이제 갓 시작했는데 손에 익지 않으면 오히려 느려. 그리고 사실 아직은 혼자 하는 게 편하고.”
물론 말은 저렇게 해도 배려해주는 것임을 지아도 모르진 않는다. 그래서 지아는 빨리 배우고 익혀서 돕고 싶고, 나중에는 혼자서도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2절 부분의 가사 수정 좀 했는데 봐주실래요?”
“또? 괜찮다니까. 이미 시은 씨도 오케이 했잖아. 그래도 가져왔으니까 한 번 보자. 그래도 수정은 오늘까지야. 오후에 녹음하고 나면 더 이상은 수정 안 돼. 보자···, ‘긴 하루가 쌓인 인생이 얼마나 귀한지, 그리움이 쌓인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거야?”
“네.”
“정서적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좀 더 간결했으면 좋겠는걸?”
“그래요?”
“원래 뭐든 계속 바꾸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핸드폰 테마 같은 것도 계속 예쁘고 멋진 것만 찾아서 바꾸다가 결국 순정으로 돌아가잖아? 가사도 비슷해. 처음의 영감대로 나온 노랫말이 제일 입에 들어맞고 정서적으로도 일관성을 가지지. 하지만 계속 수정을 하다 보면 거기만 유독 튀거나 해서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생겨. 그렇다고 이게 나쁘다는 소리는 아냐. 잘 어울리기도 해.”
“시간 좀 남았으니까 좀 더 생각해봐도 되죠?”
“생각은 얼마든지.”
일을 배우는 것도 재밌고, 작곡이란 분야에서 창의성을 발현해가는 과정도 즐겁다. 가사를 쓴다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특히 노래를 부르게 될 시은의 칭찬에 한껏 들뜬 상태다. 하루 하루가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지아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아침 저녁으로 마주치는 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너무나 좋다.
아직도 가벼운 잔소리는 여전하시다. 옷이 그게 뭐니, 화장을 하는 거니 마는 거니, 돈은 제대로 모으고 있니.
그래도 그런 잔소리는 예전의 것에 비하면 칭찬이나 다름없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아의 자존감이 낮아졌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어쩌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흥얼거리며 펜을 굴리던 지아는 문득 며칠 전 마주쳤던 아름을 떠올렸다. 아름에게서 익숙한 표정을 본 탓이었는데, 그래도 그때 자세히 뜯어볼 요량으로 쳐다본 게 아니어서 정확히 장담할 순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지금 힘든 시기를 거치는 중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그런 힘든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곁에서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비록 옆에 누가 있으면 귀찮고 짜증나고 답답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어주는 것이 정말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임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지아였다.
‘에이, 무슨 상상이야.’
자신도 자신이지만, 아름을 비롯한 연습생들도 하루 종일 구슬땀을 흘리며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고 레슨을 받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간다. 몸과 마음이 힘들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일 것이다. 힘들어보였던 것은.
아름은 학교에서 인기 스타였고, 밝은 아이였고, 긍정적이었으며, 빛이 나는 친구였다. 한때 자신이 표독스럽게 굴기도 했지만, 그때도 싫은 내색 않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자신이 경험했던 것처럼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싫어한다? 그랬으면 연습생으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힘들어 하는 이유를 자신의 과거에 빗대어 찾으면 안 될 것이다.
‘잘 이겨내겠지.’
힘든 시기를 극복하면, 그녀에게는 스타의 길이 열릴 것이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만인의 연인 같은 연예인이 되어 부와 명예를 누리리라. 자신과는 결이 다른 인생을 살게 되리라.
다시 펜을 돌리며 앞에 놓인 가사지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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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종착역이 어디쯤이라고 생각하냐, 고 묻는 말에 단유는 고갤 갸웃거렸다.
“글쎄요? 갑자기 그렇게 물으시면···.”
“평소에 그런 생각 안 해봤어? 하긴 넌 아직 젊으니까.”
“선생님도 아직 젊으시거든요?”
“나보고 젊다는 사람은 이제 너밖에 없을 거다. 이 나이되도록 시집도 안 가고 있는 여잘보고 젊다 말하는 사람은. 아, 한 명 더 있구나. 우리 아빠.”
‘아빠’란 단어를 뱉은 후, 잔에 담긴 노란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넣는 하은을 보며 단유는 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은과 그토록 오래 살면서 그녀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몇 번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그에 대한 화제를 피했었고, 피한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가 가족이다, 라는 유대감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단유나 명수도 먼저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번, 명수의 결혼식 때 하은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거론했다. 무슨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