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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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반응을 기대했을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사실 나도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덕분에 내 미래, 내 직업에 대한 신념이 더 강해졌고, 앞으로도 너와 함께 한다면 외롭지 않게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 잘 지내자, 친구야.”
따위의 명랑소설 같은 대답을 기대했을까?
“뻔뻔스럽게 네가 그런 말을 나한테 할 수 있어? 너 때문에 내가 느꼈던 박탈감, 그리고 모멸감은 어떻게 보상해 줄 건데? 그렇게 말하면 네가 엄청 잘나 보이지? 응? 착한 사람 코스프레라도 해서 얻는 게 뭔데? 그냥 솔직하게 잘난 척이나 해. 내가 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너는 잘난 사람들 속에서 잘나갈 거라고. 수준 차이 난다고. 잘난 척이나 해.”
라는 모진 말을 듣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도 않았을까?
하긴 눈치가 워낙 없는 아이니 무슨 반응을 기대했을까?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사는 아인데. 그러고 보니 지난번 쇼핑몰 앞에서도 그랬지? 미친 애처럼 자기 할 말만 막 쏟아내고, 상대방의 기분 따위 전혀 생각지도 않던 기집애.
아름의 눈썹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가는 걸 지아는 미처 보지 못했다. 시선을 떨군 채로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난 학교 다닐 때도 자신감이 많이 부족했었어. 뭘 해도 잘 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아예 도전이란 걸 생각도 못 했어. 하지만 네가 그 날 나한테 한번 해 보라고 권했을 때,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고마웠어. 누구도 나한테 도전해보란 말은 하지 않았거든.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하면 얼마나 할 수 있는데 같은 말 뿐이었어. 그래서 용기가 나지 않는데도 할 수 있었던 거 같아. 그리고 그 덕에, 지금 내 안에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 그래서 늘 생각하고 있었어. 너한테 고맙다는 이야기 하고 싶다고. 그런데··· 여기 들어온 이후로 너야 당연히 바빴을 테고, 나 역시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어. 그래서 제대로 인사를 못 하고 지났던 거지. 미안해. 인사가 늦어서. 그리고 고마워.”
어디선가 들었다. 격려가 사람의 성장을 돕는다고. 유치원 홍보 문구였던가? 아무튼, 큰 의미 없이 했던 격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지아 본인은 크게 바뀌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데, 이게 참 민망하기도 하지만 어이없는 이야기다.
무심코 던진 돌에 머리를 맞고 뇌가 활성화되어서 천재가 된 개구리의 인생 역전 스토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아 의기소침해진 한 사람이 그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을 찼을 뿐인, 그래서 누군가가 천재가 되든 로또를 맞든, 상관없이 조금도 극적이지 않은,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비하인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참고로 그 비하인드 스토리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고, 주목도 받지 못하며, 그저 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엑스트라다.
엑스트라도 꿈을 꾼다. 주인공을 꿈꾸고 주목 받기를 꿈꾸며 성공을 희망한다. 하지만 엑스트라는 엑스트라. 지루한 영화보다 더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실패와 좌절, 권태와 무력의 삶 속에서 그 무엇도 반추할 것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름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아직 데뷔까지는 한참이 남았는데, 데뷔를 해도 성공을 하리란 보장이 없건만, 데뷔하기 전까지 연습실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니 그 연습실에서라도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버틸 수 있는데, 지금 아름은 연습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고 두렵다. 짜증나고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슬프다. 아이들의 시선을 받기 무섭고, 불편한 감정 싸움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런 감정에서 누군가의 호의와 감사가 먹힐 리 있나.
“잘됐네.”
그런데 아름은 입을 열었다.
“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네가 잘해서 그런 건데.”
결국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질 리 없음을 알고 체념하는 아름. 스스로를 설득했다. 넌 어른이야. 어른답게 행동해.
“아냐, 정말 너한테 고맙고, 정말 정말 너랑 같이 성공하고 싶어.”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대사라니. 소름끼치도록 느끼하지만 참아낸다.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대꾸해본다.
“그래, 아, 나 시간 다 돼서 먼저 나갈게.”
“어, 그래. 연습 열심히 해.”
“응.”
등을 돌리는 아름.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야 위로받을 수 있을까? 날 위로해줄 사람은 있을까?
유치한 노래 가사에나 나올 법한 망상은 거기까지. 아름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냉혹한 현실은 그녀가 머물 곳이 연습실이라고 말했다. 싫든 좋든, 앞으로의 미래가 암울하든 말든, 희망이라는 허울 좋은 기대가 0%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언니, 있잖아요, 나중에 저희 다 같이 병문안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 거죠?”
표정 관리.
“당연하지.”
아름은 연습생. 이 시대, 수백, 수천의 아이들이 동일한 꿈을 꾸며 그녀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니 비단 그녀만 혼자 괴롭고 혼자 고민하는 것은 아닐 게다. 당장 눈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시화야 아직 어리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른스럽게.’
그것이 지금 아름에게 닥쳐온 고민과 갈등과 분노와 타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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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 이제 진짜 김 이사네요.”
“고맙습니다.”
“제가 더 고맙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실수가 잦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지금까지 하신 것처럼 해 주시면 됩니다.”
대훈의 가식 없는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금까지···, 제가 뭘 했죠?”
“이런저런 운영에 관한 조언들을 많이 주셨잖아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럼 하나 더 건의해도 되나요?”
“벌써 생각해두신 게 있으십니까?”
“연습생들 기숙사 말입니다.”
“아, 그거요? 그건 이미 알아보고 있습니다. 보민이 건으로 저도 많이 식겁했거든요. 다른 아이들도 혹시 전염은 되지 않았는지도 걱정되고. 그래서 당장 병원 예약부터 해놓았죠. 아, 이사님도 함께 가셔야 합니다.”
“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제 정식 이사로서 첫 운영 회의에 참석하시죠. 이전까지는 비공식 참여였지만, 이제는 공식 일정입니다.”
“이제 늦게 출근하면 안 되겠네요.”
“지금까지 저보다 늦게 오신 적이 없으셨던 것 같은데요?”
단유에게 사무실이 생겼다. 아니 정확히는 기존에 사용하던 사무실에 재무 이사라는 문패가 달렸다. 책상에는 택윤이 만들어 준 투명 명패가 놓여 있고 실내에는 축하한다는 글귀가 달린 화분이 줄을 이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명수가 보낸 것도 있었다.
―내가 직접 가야 하는데 아쉽네.
“바쁘신 분이 직접 올 일이 있어?”
―바쁘긴 나보다 내 에이전트가 바쁘지.
“왜?”
―어쩌면 나 이적할지도 모르겠다.
“벌써?”
―날 탐내는 곳이 어디 한 두 군데여야 말이지.
호탕한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너무 욕심부리지 마. 그러다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그 뭐더라? 향상심? 그런 거니까 괜찮아.
“그런 단어도 알아?”
―날 뭘로 보고?
“명수잖아.”
―그렇지. 나 인명수에게는 너와 달리 훌륭한 조력자가 있지.
“상미가 그런 단어도 알아?”
―알더라고. 걔 요즘 공부 많이 해. 인터넷 방송으로 오래 가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한다면서. 하긴 몇 시간이고 입을 털어야 하는데 무식하면 되겠냐?
“그런 거 없이도 지금까지 잘하지 않았나?”
―걔 말로는 앞으로 롱런하려면 경쟁력이란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럴려고 한 대. 나도 잘 몰라. 그냥 요즘 보면 밥 먹고 방송하는 거 아니면 거실에서 책보고 있는 게 전부야.
“철 들었네.”
―너무 늦게 들어서 탈이지.
“알았어, 아무튼 선물 고맙다.”
―겨우 꽃 하나 보낸 거로 생색내기 싫다. 진짜 선물은 나중에 따로 보내주마.
“보낼 것 없이 조만간 내가 갈게.”
―왜?
“패티 데리고 가야지.”
―아, 에이젼시 이용해서 그냥 보내지 않고?
“겸사겸사 얼굴도 볼 겸 가는 거지.”
―잘 생각했어. 한 번 와. 이왕이면 선생님이랑 같이 와도 좋고. 너 오면 내가 풀코스로 대접할게.
“전에 갈 때는 풀코스가 아니었어?”
―나 요즘 잘 나가는 거 몰라? 득점 랭킹 2위야, 2위. 보너스가 장난 아니라고. 이제 풀코스 한번 쏘는 정도는 괜찮을 정도로 부자라고.
“알았다. 기대할게.”
명수의 허세 짙은 입담으로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친 단유는 좁지 않은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에 세워져 있는 전신 거울로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새로 취임한 재무이사 김단유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래 이사님 아니셨어요?”
“오늘자로 취임한 김단유라고 합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이사님, 오신 김에 여기 싸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싸인이요?”
“팬이에요.”
“안녕하세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이사님, 혹시 같이 사진 찍어도 되나요?”
“사진이요?”
“이사님 취임 기념 사진이에요. ···저기 좀 웃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왜 직접 오셨어요? 저희가 가서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앞으로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특히 여기 총무팀과는 자주 볼 것 같으니까.”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하하.”
홀로 각 부서를 돌며 인사를 건네는 단유의 이색적인 모습을 직원들은 환영했다. 특히 여직원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에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여러 부서를 돌며 인사를 한 후, 끝으로 향한 곳은 2층의 연습실. 사실 연습생들과 재무 이사가 부딪힐 일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단유는 그런 직무상의 관계가 아니라 앞으로 사내에서 함께 하게 될 가족으로서 그들을 대우하고자, 그리고 대우받고자 인사를 결정했다.
이제까지의 인사 과정에서 발생한 소소한 해프닝들을 고려하면, 조금 우려되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지만.
“우와, 이사님!”
연습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뭔가를 적고 있던 지서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 소리에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연습생들의 시선이 모두 문쪽으로 쏠렸고, 막 문을 열고 들어섰던 단유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새로 재무이사로 취임한 김단유라고 합니다. 앞으로 같은 사내 식구로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새로요? 그럼 전에는 뭐였는데요?”
“뭐, 전에는 그냥···아무것도 아니었죠.”
“다들 이사님이라고 했잖아요?”
“그러게요.”
“뭐, 아무튼, 그럼 진짜 이사님인 거예요?”
“네.”
“재무 이사는 어떤 거 하는데요? 재무니까 돈?”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증권거래법 및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대한 법률에 따라 적법한 투자판단과 유가증권 가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면 이해해줄까?
“비슷해요.”
이럴 땐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것도 괜찮겠다싶어 단유는 답을 얼버무렸다.
“아, 그래서 지난 번에도 저희 연습복도 사주셨구나. 이거.”
“그거랑은 좀 다른 일이지만, 뭐, 네.”
“그럼 혹시 말인데요, 앞으로도 밥 사달라고 하면 밥 사주시나요?”
“밥이요?”
“네.”
가만히 지켜보니 지금 딸기 파르페를 좋아하지만 바닐라 아이스 라떼를 선택했던 지서라는 이름의 아이는 재무 이사가 단순히 밥 사주고 옷 사주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밥 이야기를 한 것은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속셈이란 것도 딱히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귀여운 애교 정도라,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만 맞는다면, 네. 그러죠.”
“우와! 그럼 오늘도 돼요?”
“음, 시간이 얼마 남지 않긴 했네요. 그러죠. 취임 첫 업무로 연습생 여러분께 밥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단유의 대꾸에 다른 연습생들도 모두 환호를 질렀다. 단유는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던 와중, 구석에서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과 눈이 마주쳤다.
‘응?’
전에 보았을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느낌이었다. 속내를 감추고 표정을 잘 연출하던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아름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어둡고 불안해서, 금방이라도 균열이 갈 것 같다. 아니면 이미 균열이 생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