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2)
-------------- 866/952 --------------
잠깐의 망설임 후,
“안녕?”
아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24년 동안 살면서 했던 인사 중 가장 어색한 인사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 안녕.”
앞으로 24년을 더 살면서도 과연 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색한 인사를 받았다. 아마 지아도 자신처럼 후회하고 있을까?
먼저 인사를 하는 대범함(?)을 보였지만, 이후에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어 쭈뼛대다 세면대로 향하는 아름. 손을 씻는 척이라도 해야 자연스러워 보일까 싶었다. 마주 본 지아의 경직된 표정이 저만 그렇지는 않으리란 생각에 숨기고픈 마음도 있었다.
그때,
“저기.”
지아가 입을 열었다. 거울을 통해 지아를 바라보니,
“무슨 일 있어?”
라고 묻는 지아였다. 예전부터 눈치가 없는 편이었을까? 예전 학교에 다닐 때는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라 해도 무방해서, 같은 동기라는 입장 외엔 딱히 속을 터놓고 말을 나누지 않았기에 어쩌다 말을 나눠도 간단한 인사나 혹은 관계 유지를 위한 일상적인 대화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한 경우라면, 기껏해야 아름의 기획사 오디션 축하를 핑계로 한 술자리에서의 대화가 전부다.
것보다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정도로 친한 사인가? 보통은 그냥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있나보다 하고 지나는 편이 아닌가? 아니면 지아라는 애가 원래 오지랖이 넓은 애였던가?
더구나 지아가 아는지 모르는지 몰라도, 아름에게 지아란 불편한 존재였다.
그 때문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 일 없어. 왜?”
신중하게 생각하고 뱉었던 물음도 아니었고, 더구나 돌아온 반응이 심상치 않다.
“어, 아니, 그냥.”
눈자위가 시뻘건 게 누가 봐도 울었나 싶은 표정이라 무심코 물었던 것이지만, 역시나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에 대답을 얼버무리는 지아. 그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던 아름이 되물었다.
“너는 무슨 일인데?”
사실 지아의 얼굴도 만만찮게 붉게 상기된 얼굴이라,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은 표정. 하지만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는 네가 한번 말해 봐, 라는 심정으로 되물었으니 마치 탄산수처럼 톡톡 쏘는 어투다. 탄산수는, 그래도 청량한 맛이라도 느끼지, 지금 아름의 그것은 몸을 움찔거리며 피하고픈 마음이 들게 한다.
“아무것도.”
“그럼 일 봐.”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아는 세면대에 있는 아름을 지나쳐 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을 역시 세면대 거울을 통해 훔쳐보던 아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냥 지나가라, 속으로 외치든 말든 지아가 고개를 돌렸다.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고마워.”
“응?”
갑작스러운 지아의 말에 아름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지금 나,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거, 전부 네 덕분이라고 생각해.”
말은 솔직히 합시다. 나 때문이 아니라, 김 이사님 때문이지. 속으로만 주워 담는 이야기였다. 아름의 굳게 닫힌 입술을 보며 지아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너한테 제대로 고맙다는 이야기도 못 했었어. 여기서 이렇게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또 한참을 못 할 거 같아서.”
네 말대로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런 인사 받을 기분이 아니거든, 이라는 말도 속으로만 굴리며 삼키는 이야기였다. 아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했는지 지아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
“이거 참. 요즘 세상에 폐렴이라니.”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사망 원인이 폐렴이라더군요.”
“그런가요? 그래도 요즘은 위생이나 청결이 과거와 다르고 약도 좋은 게 많이 나오니까 잘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치료와 예방에 관한 의학기술은 발전했지만, 그렇다고 병이 걸리진 않는 건 아니죠. 게다가 들어보니 60대 이상 노인 분들이 가장 흔하게 걸리는 질병이기도 하고 사망 원인이 되기도 한다니, 이사님도 조심하셔야겠어요.”
“저 아직 60대 아닌데요?”
“건강 주의하시란 이야기였어요. 너무 과로하시는 거 아닌가 해서요.”
“과로랄 게 있습니까? 솔직히 요즘은 너무 널널해서 탈이지. 주말마다 골프장도 다니는 사치를 지금 아니면 언제 누려보나 싶을 정도입니다. 말 나온 김에 같이 라운드 한 번 돌까요?”
“골프를 배우지 않아서요.”
“어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단유 씨는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니까 금방 배울 겁니다.”
“제가 운동 신경이 좋은 건 어떻게 아시고요?”
“딱 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아요? 이 어깨하며··· 아마 단유 씨가 필드에 나오면 여럿 기죽을 겁니다.”
“글쎄요. 그건 그렇고 일단 현재 회사 재정 상태는 어떤가요?”
“재정이랄게 있습니까? 아직은 계속 적자죠. 지난번 회의대로라면 적자 폭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아직 흑자로 가긴 무리죠. 왜요?”
“이번 일도 있고, 아무래도 대표님께 건의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연습생들이 따로 머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건의하는 거야 단유 씨니까 뭘 해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단유씨도 입장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정확히 무엇에 대한 입장, 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단유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회사에 적을 두지 않고 있는 건 단순히 대표에게 주어진 권한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지로서의 선택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굳이 그런 의지를 천명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생각보다 대훈은 대표로서 자리 매김을 잘 했고, 회사는 대훈의 진두지휘 아래 잘 굴러가는 중이다. 설령 단유가 정말 이사직을 맡는다고 해도 사내 정치 따위로 어지러워질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내 정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회사 내 자금의 흐름이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죠. 만약 투자자가 여럿이거나 결정권이 분산되어 있었다면 문제의 소지가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은 단유씨의 일방 투자에, 일인 대표 체제로 운영되니 그런 문제는 지금 단계에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나중이 문제겠죠. 하지만 그것도 지금 어떻게 시스템을 자리매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어쩌면 단유 씨가 투자 이사로서 자리를 잡으면 더 안전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사회의 중심을 단유 씨가 잡는 거죠.”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 앉은 공 이사의 뒤로 넓은 책상과 그 위에 올려진 공 이사의 명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저런 걸 써서 책상에 올려둬야 하나요?”
“왜요? 싫으세요?”
“조금 창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은 세련된 명판도 많아요. 단유 씨 명판은 제가 만들어 드리죠.”
“뭐, 일단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하신 겁니까?”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 회사에 애정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단유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대훈에게 투자를 결심할 때도 회사에 간섭하지 않겠다거나, 자리를 만들지 않겠다고 한 데에는 표명한 바와 같이 대훈의 권한과 권위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뜻도 있지만 속내에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고, 책임감이란 불편한 의미로는 구속의 의미도 있었다.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돕는 것이야 여유가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상대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음을 상정하며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불편하고 불안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단유와 명수를 도와주었던 재훈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두 사람을 돕기로 한 것은 다시 돌이켜 봐도 분명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멀어졌던 것은, 당시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고, 재훈이 두 아이에 대한―숨겨둔 자식이니 뭐니 하는―소문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도 언뜻 듣긴 했지만, 어릴 적의 단유는 그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불행한 가족사를 가졌던 단유에게 그 일은 트라우마처럼 마음 속에 새겨졌다.
딱히 재훈을 증오하거나 미워하진 않았다.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도 나름 깔끔하게 헤어졌으니.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던 명수는 그 이별을 받아들이는 데 한참이 걸렸고, 겉으로 티를 내는 대신 더욱 축구에 몰입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 했음을 단유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물론 재훈이 결정한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진다. 무언가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을.
따지면 단유도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을 여럿 겪었고, 어떨 때는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책임감이라는 게 얼마나 무겁고 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능력과 별개였다. 세상 누구도 무서워할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한 힘과 능력을 소유한 단유지만, 책임감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량에 따른 것이 아니겠냐고.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도까지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한 사람의 최선이 다른 사람에게도 최선이 될 수 있을까? 재훈이 최선을 다했다면, 단유나 명수는 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일까?
더 불편한 상황을 가정하자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육원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아이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과연 최선을 다했을 테니 이해하면 그만인 걸까?
때로 최선을 다해 책임을 수행했다는 말은 자기 위안에 불과할 수 있음이다.
그래서 단유는 되도록 책임을 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버겁다고 느끼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것이 완벽히 책임을 다한 결과로 나타나지 못할 때 마주쳐야 할 불편한 상황을 단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피할 수 있으면 피했다.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급 실장직을 추천해도 고사했고, 이후에도 무슨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마다했다.
최근의 일이라면, 학원 임시 강사로 도움을 줄 때, 전임 강사로 제안받았지만 거절했었고, 회사에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대훈과 택윤의 지속적인 제안도 거절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록 데리고 온 건 명수였지만, 보다 많은 시간 함께 했기에 호빵에게도 책임감을 많이 느끼던 단유였지만, 호빵의 마지막 순간 단유는 과연 자신이 그 작고 가여운 생물에게 책임을 다했던 것인지, 많은 시간 함께 있어 주지 못하고 걸핏하면 동물병원에 맡겨야 했던 일이 미안했다.
또 있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던 에밀리아,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녀를 지켜주겠노라 약속했고 물론 그 약속을 어느 정도 지켰다고 생각은 하지만, 결과적으로 단유는 자신이 약속했던 책임을 모두 이행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첫사랑이었던 그 사람. 지금은 과연 그것이 첫사랑이긴 했는지, 그녀가 단유에게 보여준 것만큼이나 같은 감정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별이었고,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는 과연 최선을 다했던 것인지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런저런 과거들을 돌이켜 보건대 단유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고, 책임을 질 자신이 없었고, 책임감에 맞게 행동할 그릇도 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회사의 이사가 되는 것이 뭐 그리 큰일이라고, 고작해야 자신이 투자한 돈 때문에 이사 자리에 앉는 것 뿐이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회사 내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애초에 그런 책임감마저 느끼지 못하는 이라면 자리에 앉을 자격조차 없다.
해서 단유는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해왔다. 책임은 의무고, 그 의무를 충실히 다할 자신이 있는지, 충실히 할 뿐 아니라 결과로서도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택윤은 진중한 어조로 반응했다.
“들어보니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저 역시 재무 이사란 자리, 가볍게 본 것은 아니지만, 단유 씨처럼 그렇게 오래 고민하지는 않고 너무 쉽게 넙죽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네요.”
“아닙니다. 이사님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는걸요.”
“처음 맡았던 감사란 자리도 버거운 줄 알면서도 넙죽 받은 데다, 이사회 결정이지만 재무 이사란 자리도 냉큼 차지한 절 보면서 많이 욕했겠는데요?”
“전혀요.”
“아무튼 그런 각오가 있으니 걱정은커녕 오히려 기대가 되는 게 제 속마음입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팔걸이를 툭툭 치는 택윤의 모습에 단유는 그저 쑥스럽다는 듯 눈썹을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