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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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라는 직업은 겉보기에도 볼품없지만, 실제로도 3D 직종 중의 하나라고 해야 한다. 스케줄을 조정하고 아티스트를 관리하는 등의 일을 한다, 고 하지만 실제 업무는 시종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감정 노동에, 육체적으로도 버거운 일들의 연속인 현장에서 가장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직종이다.
시쳇말로 현대판 노예, 라는 비아냥도 있는데 비하의 의미가 다분히 들어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난 처음 이 일을 하면서부터 가진 신념이 있어. 뭐냐면, 매니저란 모름지기 아티스트들에게 버팀목이어야 한다고 봐. 뭐, 솔직히 연예인들의 버팀목이라면 매니저보다는 회사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와 별개로 가장 지근거리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아티스트들을 챙겨주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매니저라고 생각하거든. 그게 사실이고. 어쩔 때는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존재니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매니저의 얼굴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보민이었다. 항상 무섭고 늘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을 느꼈던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어쩐지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이 뭉클해지기까지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난 스스로에게 늘 다짐해. 버팀목이 되자. 버팀목이 되자. 긴 인생을 기준으로 하면, 어쩌면 너에게나, 혹은 나에게나 서로 스쳐가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함께하는 이 순간만큼은 내가 너의 버팀목이 되어주마, 그렇게 생각하며 너희들을 대해왔다.”
매니저의 시선은 보민의 머리 언저리,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버팀목이라는 건 무르면 안 되잖아? 언제 어디서나 늘 곧고 단단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법이잖아? 난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고 싶다.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돼서 니가,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나에게 의지해도 불안하지 않기를 바란다.”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했던 시선이 보민의 눈과 닿았다.
“그러니까, 아직은 나를 믿어라. 아직은 내가 너의 매니저고, 너한테 생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서로 헤어지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내가 너의 매니저니까, 매니저를 믿고 편히 쉬어라.”
“실장님···.”
물기 가득한 보민의 목소리에 매니저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회사로 돌아가야겠다. 우선 회사에 가서 일을 좀 보고, 그 다음에 너희 가족 문제로 돌아가야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너 아니라도 이런 문제는 늘 어디선가 나오는 법이야. 차라리 데뷔 전에 터졌으니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물론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야.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고.”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보민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매니저로서 한 마디 더 하자면, 넌 지금 우리 회사에 있는 연습생들 중에 가장 최선을 다하려했던 아이였다.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안다. 그래서 내심 너를 주목하고 있었고. 만약 이번 일이 무사히 지나고 다시 회사에서 보게 된다면, 부디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마음과 열정 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그렇게만 한다면 넌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럴게요, 실장님.”
“말을 너무 많이 했나보다. 이만 간다. 쉬어.”
“네.”
“나중에 또 올게.”
“네, 실장님.”
“···아, 그리고 나중에 이사님한테도 따로 인사해.”
“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보민을 막은 뒤, 매니저는 병실을 나왔다. 공기마저 적막한 1인실, 혼자 남겨진 보민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입을 틀어막았다.
****
다시 매니저의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조수석에 앉은 단유는 고개만 모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듯 싶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체되기 시작한 도로 위에서 정물화처럼 멈춰 있는 바깥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흠.”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 헛기침을 해보았지만, 미동도 않는 단유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쩐지 그라면 생각없이 바깥을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매니저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느낌상 단유라는 사내는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의 깊고 진한 눈동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북극 어딘가의 빙판을 깨고 지나가는 쇄빙선마냥 느릿하게 도로를 이동하고 있자니 여간 갑갑한 게 아니다. 얼어죽을만큼, 은 아니더라도 꽤 냉랭한 차 안의 분위기도 그렇고.
‘히터라도 틀까?’
생각난 김에 물었다. 괜찮습니다, 라는 단유의 대답에 매니저는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틀어도 괜찮다는 말인지, 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눈치껏 행동하는 게 몸에 배인 사람이라도 나이 어린 상사의, 게다가 그 나이 또래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내의 속내를 짐작하는 게 쉽지 않다.
사실 상사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 화제가 떨어질 일은 많지 않았다. 회사 내의 업무를 화제로 올려도 한 두시간은 쉬지 않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본인들이 업으로 삼고 있는 연예계라는 곳이 틈나면 말이 나오는 오거리 장터같은 마당아닌가? 때지 않아도 연기가 나고, 발없는 말이 천리가 우습다고 퍼져나가는 동네 아닌가?
그런데 옆에 앉은, 연예인 뺨칠 정도, 라며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지만 정작 본인은 외모를 꾸미는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이는, 하지만 사내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자수성가로 돈을 엄청나게 벌어 회사 설립에 도움을 줬다니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후광에 눈이 멀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어느 깊은 산속 절간에 모셔진 오래된 불상처럼 세사에 관심이 많지 않아 보이는 사내와는 업무적으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애초에 관심이 없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억지로 해볼 마음에 보민을 만나러 오는 길에 이것 저것 이야기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워낙 교점이 없어 업무상으로도 나눌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 이미 다룰만한 주제―신규 음반에 대한 회사의 기대, 연습생들에 대한 ―는 다 다뤘고, 그래서 지금은 소재가 고갈이 된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길은, 꽤 썰렁했다. 5년 이상 타고 다녔던 자동차 안이 불편할만큼.
“히터 좀 틀겠습니다.”
“그러세요.”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추위를 타네요. 하하.”
실제로도 긴장이 다소 풀리긴 했다.
“사실 오는 동안 굉장히 마음을 졸였거든요.”
대답이 없다.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계속 말은 이어간다. 그래야 차 안의 정적도 사라질 것이다.
“제가 관리했던 애는 아니고, 이전 회사에 있을 때 있던 아이 이야긴데요, 걔가 좀 좋지 않은 일을 겪었거든요.”
평소에는 좀처럼 꺼낼 일 없는 과거의 기억 중 하나.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해요. 오죽 힘들면 자기 손으로 그럴 생각을 했을까. 그 어린 애가 소맷단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고 하니, 차라리 못 본 게 다행이다 싶은 때도 있었어요. 제가 보기와 다르게 그런 걸 쉽게 잊지 못하는 편이라.”
그런 일이 또 벌어진게 아닐까, 라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매니저의 목소리는 내용만큼 어둡진 않았다.
“오래전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그 친구, 지금 비록 연예계에 있지는 않지만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 사건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요즘 말로 추억 보정? 그런 것처럼 당시에 받았던 충격도 희미해지더라고요.”
간단한 대답만 하며 말을 받던 단유가 고개를 돌려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교통 정체에 걸려 느림보 운행을 하던 중이라 그런지 핸들을 잡고 있는 매니저의 모습에서 느슨한 기운이 느껴진다.
역시 그런걸까.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일 뿐. 말로는 아프다, 공감한다, 하지만 실제 자신의 고통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것이며, 타인의 것에 상처받거나 두려워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그런 이유일 테다. 귀가길 정체된 도로 위에서 진심을 담은 것처럼 나눌만한 대화의 소재로 삼기에. 반면 단유에겐 그런 경험도, 그런 고통도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고.
추억 보정? 처음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짐작이 갔다. 시간이 약, 이라는 의도를 담아 꺼낸 말일 테다. 하지만 과연 그 고통에 힘들어했던, 지금은 잘 산다는 그 사람에게도 그것이 과연 추억일까?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탓인지 단유는 예전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때문인지 사람들이 말하는 추억이라는 것이 단유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옛 기억 속의 맛을 곱씹는 재미를 느껴본 적도 없었고, 언제나 단유에겐 현재와 미래 뿐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단유에게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고, 오래 씹다 책상 아래 어딘가에 붙여놓았다가 다시 떼내어 씹을 정도의 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도 그럴진대, 타인의 과거 따위가 오래 씹어 맛이 날 리 없다.
적어도 단유에게 어딘가 미화시킬 만한 과거라는 게 있었다면 또 다른 입장이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아무튼 말이죠, 보민이가 무사해서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별 반응없는 단유의 심심한 태도가 결국 매니저의 입담을 시들게 만들었다.
앞으로 바라보니, 붉은 후미등들이 눈꼬리를 치켜 세운 것 마냥 불을 켜고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둑해진 하늘. 어느새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정말요? 괜찮대요?”
연습생들에게 둘러싸인 신인개발팀 직원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도 조금 전에 연락을 받은지라 정확히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큰병은 아니라니까 걱정 안해도 된다셔. 조금 쉬다가 나올 거니까. 아, 그리고 실장님이 한 말씀 더 하셨는데, 보민이 핑계로 연습 게을리했다간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셨어.”
“으윽, 무섭다.”
시화가 두 팔로 시율을 감싸며 무섭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말로 무섭냐면, 그렇지는 않은지 그저 애교스러울 따름이다.
“아무튼 그러니까 다시 연습에 집중들 해. 아까 들어보니까 너희들 오늘 하루 종일 엉망이더라고 하더라.”
오죽하면 트레이너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냐며, 만약에 나중에 실장님이 오셨다가 이야기를 듣게 되면 화를 많이 내실 거라는 추측까지 비쳐보인다.
“아름이 네가 애들 잘 이끌어야지.”
아이들의 시선이 뒤편에 서 있던 아름에게로 몰린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아무튼 맏언니잖아? 잘 좀 해.”
“네.”
기운 빠진 아름의 목소리가 단지 지적은 받은 탓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직원은 수고하라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남기고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게 된 연습실.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을 빙둘러 연습실을 나가버리는 아름과, 그 모습을 못 본 척 딴청을 피우는 슬기의 태도에 어린 연습생은 물론이고 지윤이나 지서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쉽게 입을 열기 어려웠다.
채린은 언제나 그렇듯 시율 옆에 붙어 말없이 의지하는 중이지만, 시화나 경빈은 어디에도 가지 못해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결국 둘이 눈이 마주쳤고, 둘은 무언의 합의하에 시율에게로 향했다. 어느 편도 들 수 없다면 결국 중립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
시율도 눈치를 챘는지, 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보며 보일듯말 듯 입꼬리를 올려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채린이 붙잡고 있는 쪽 반대손을 들어 시화의 손을 잡고 끌었다.
“여기서 좀 쉬어.”
“네, 언니.”
잠시 말 없이 둘러앉아 누군가가 말을 먼저 꺼내기를 기다리는 네 사람.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기민하게 반응하여 받아줄 자신은 있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의도치않은 눈치 싸움이 벌어진 가운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시율이었다.
“저녁 뭐 먹지?”
생뚱맞게 저녁?
“아, 맞다. 밥 시간 다 됐네요?”
“사람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그러자 경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 다이어트 하려고 했는데.”
시율이 옅게 웃으며 경빈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랬어.”
“그럴까요? 언니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내일부터 해야지.”
“언제부터 그렇게 내 말을 잘 들었대?”
“원래 제가 언니 말은 잘 들어요.”
“그랬니? 여태 몰랐네.”
“앞으로 차차 알아가면 돼죠.”
채린이 경빈과 시율을 번갈아보다 한 마디 했다.
“두 사람, 여태 어색한 사이였던 거예요?”
“어색하긴. 내가 경빈이 얼마나 아끼는데.”
“정말요? 저도요.”
눈꼴시려 죽겠다는 얼굴로 채린이 얼굴을 한번 찌푸리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화제를 돌렸다.
“우리 병문안 가봐야 하지 않아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 시율은 턱 아래를 검지로 살살 긁으며 고심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