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63화 (863/956)

추억(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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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민의 눈동자가 침대 곁에 앉은 단유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어깨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는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선도 확인하는 보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의 보민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단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말하기 불편하면 안 해도 돼요.”

“네?”

“꼭 지금 당장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

“그래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죠?”

보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만 기다려줄래요?”

단유의 반응에 보민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상황을 이해하려 하기도 전에 단유는 자리에서 벗어나 병실을 나가고, 그 뒷모습을 쫓는 그녀의 시선처럼 사람들의 시선도 단유를 따라갔다. 그 후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해 죽겠지만, 차마 묻지 못하겠다는 눈치로 보민을 살피려 드는 사람들. 보민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볼륨을 최대한으로 낮춘 탓에 목소리는 없이 입만 뻥긋거리는 TV 속 CF모델이 과장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들며 보민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병실을 나서자마자 마침 복도에서 병실로 들어오려던 매니저와 마주쳤다.

“어? 왜 나오셨어요?”

“들어가 계세요. 전 밑에 내려가서 병실을 옮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올게요.”

“병실을요?”

“빨리 안정을 찾고 퇴원하려면 아무래도 사람이 적은 곳에서 쉬는 게 좋지 않겠어요?”

단유는 그렇게만 말을 남기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매니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병실로 들어갔다. 깨어있던 보민이 매니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에 매니저는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죄송한 일을 왜 했어.”

“화 많이 나셨죠?”

매니저는 순간적으로 버럭 목소리를 높이려다 이내 이곳에 자신들만 있지 않다는 걸 깨달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화낼 일이···. 에휴, 솔직히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아프면 아프다고 했어야지, 왜 여태 말을 안 했어?”

“어제까지는 그냥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밤에 너무 아파서, 도저히 참기가 힘들어서···.”

처음에는 그저 레슨 때 배우는 안무나 발성 연습이 힘들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고. 그래도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오기를 부렸던 것일까? 참고 참다 결국 새벽에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신고 전화를 했다는 보민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119부터 부른 거야?”

“···네.”

“잘 했다.”

보민이 취한 조치는 아쉬움은 있지만 비난할 순 없었다. 끝이 늘어지는 매니저의 대꾸에 보민은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뭘 계속 죄송하대. 근데 너, 핸드폰은 어디 둔 거야?”

아침부터 얼마나 전화를 했었는지 아냐며 핸드폰을 흔들어대니 보민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모르겠어요. 아마 집에 떨어뜨리고 온 거 같은데.”

조금 전에 깨자마자 핸드폰을 찾았는데 옆에 보이질 않더란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혼자 고민하다 피곤에 못 이겨 다시 잠이 들었다고.

“어휴. 근데 너 엄마한테는 연락했어? 아, 핸드폰 없다고 했지.”

매니저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연락처 말해봐. 내가 대신 연락해 줄게.”

“그게···.”

“뭐?”

“아니, 그게 아니고요, 사실은요···.”

우물쭈물대며 대답을 쉬이 하지 못하는 보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매니저는 얕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조금 전 단유와 나눴던 대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장 보민의 표정만 봐도 뭔가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단유가 병실을 옮기겠다고 했으니, 그때 조용히 물어도 될 일이라 판단한 매니저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지금 몸은 어때?”

“괜찮아요. 아까 약 먹고 잤더니 조금 좋아졌어요.”

“···정말 할 말이 없네. 매니저란 사람이 몇 안 되는 연습생 케어도 못했다고 한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겠다.”

“죄송해요.”

“너한테 사과받자고 한 소리는 아니고. 아무튼 일단 이사님이 병실 옮겨 주신다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이야기하자. 그때까지 좀 쉬고 있어.”

“네.”

“움직일 수 있어요?”

단유의 물음에 보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걸려 있는 링거대로 향했다.

“제가 들어드리면 괜찮죠?”

“아뇨, 제가 들게요.”

“그럴래요? 그럼 따로 챙길 건 없어요?”

이미 협탁 아래 서랍장에서 보민의 사복을 챙겨 든 단유는 더 챙길 게 없나 살폈지만, 따로 챙길 것도 없이 급하게 병원으로 온 보민이라 짐은 그게 전부였다.

“제가 챙기겠습니다.”

매니저가 서둘러 단유의 손에 들려 있던 옷들을 뺏듯이 품고는 안내를 위해 자리한 간호사의 뒤를 따라갔다. 단유는 보민의 곁에서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걸었고, 세 사람은 곧 1인실로 자리를 옮겼다.

특실처럼 넓거나 하진 않지만, 값싼 호텔의 1인실 분위기가 나는 공간이라 매니저는 이곳저곳을 살피며 가볍게 탄성을 뱉었다.

“보민이 너 좋겠다. 이런 특급 대우도 받고.”

웃자고 한 말에 보민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얘는 뭐가 죄송이야. 너, 진짜 우리 회사 잘 들어온 거야. 다른 회사였어봐. 이렇게 아프다고 매니저랑 이사님이 찾아와서 병실 옮겨 주고 할 거 같아?”

“알아요.”

“알긴. 일단 누워. 그리고 여기서 지낼 동안 필요한 것들 좀 사와야겠다. 너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지?”

“네.”

“일단 있어. 괜찮아, 그래도 돼, 지금은. 이사님도 여기 계세요. 아래 편의점에 가서 사오겠습니다.”

“같이 가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법인 카드도 있는데요, 뭘.”

매니저는 단유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보민을 바라보았다. 보민이 얼른 고개를 숙이자 손을 슬쩍 들어 보이고는 곧 병실을 나갔다. 매니저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보민의 시선은 쭉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네? 아니, 그게···실장님 저런 모습은 처음 봐서요.”

평소 엄하게만 느꼈던 매니저가 마치 갓 들어온 신입사원마냥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생소해 보였던 탓도 있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단유와 단둘이 조용한 공간에 남았다는 게 어색해서였다. 단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며 보민은 슬쩍 눈동자를 굴려 단유의 시선을 피했다.

‘1인실이라도 바닥은 6인실과 비슷하구나.’

“의사 선생님께 여쭸더니 폐렴이라더군요.”

“아, 네.”

폐렴이라니. 솔직히 처음에 의사로부터 병명을 들었을 때, 보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보민은 기껏해야 좀 심한 감기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이 너무 심하고 머리가 핑핑 도는데다 온몸이 덜덜 떨려서 도저히 잠도 잘 수가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이라 119를 부르게 되었던 것인데, 그게 폐렴이라는 병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래도 보민 씨가 사는 곳에서 병균이 옮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해보진 않았으니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가 거주하던 빌라 주변과 내부의 계단 및 복도를 살폈던 기억을 돌아보면 위생이나 청결과는 멀다는 인상이었다. 이와 보민의 병력을 연결해보면, 아무래도 주위 환경에서 병의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사는 데요? 혹시 제 방에 들어가셨어요?”

보민이 급 부끄러움을 느끼던 찰나, 단유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역시나 연락이 되지 않았던 탓에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구나, 생각하니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몰래 처리하려 했던 것인데, 어쩌다 이렇게 일이 커져버렸는지 모를 일이라, 보민은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그 부분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당면한 문제부터 처리하도록 하죠.”

‘문제’라고 하니 보민은 덜컥 겁을 먹었는지 움찔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단유의 입에서 나온 건 아까부터 언급되었던 ‘가족’에 대한 이야기.

“보민 씨가 비록 성인이라도 가족이 있는데 통보 없이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기엔 문제가 있다는 판단입니다. 병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려간 틈에 알아보니까, 보민 씨가 보호자 연락처로 남긴 전화번호가 가족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더군요.”

“그건 제가 정신이 없어서···.”

“하긴 응급실로 올 때 정신이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전혀 의도가 없었다는 말인가요?”

“······.”

“보민 씨의 의도대로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병원 측에서 아직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상태였더군요. 원래 정상적이라면 연락처를 받는 즉시 보호자에게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왜 그랬는지···. 뭐, 어쨌든 그건 병원의 문제고 저희는 또 다른 사안이니까.”

단유의 추궁에 결국 보민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러니까,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다?”

고작 그런 이유냐는 매니저의 물음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친오빠가 이쪽 계통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기획사와 좋지 않은 일로 법정 소송까지 갔던 모양이고, 이후로 집에서 연예계와 담을 쌓았다고 합니다···만, 보민 씨는 오빠가 연예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연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군요. 그래서 몰래 데뷔의 꿈을 키우며 지내다 마침 저희 회사 오디션이 눈에 띄어 도전하게 되었고, 붙었다는 것이죠.”

병원 본관 옆에 마련된 쉼터에 나와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두 손바닥을 비비며 단유의 말을 곱씹던 매니저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하아. 그런데 계약은 어떻게···.”

“부모님 대신 오빠가 사인을 대신 해줬다는 모양입니다.”

잠시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있던 매니저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한 번 일이 터지려니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모양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하는 걸까? 일단 계약 진행을 맡았던 신인개발팀의 담당자부터 시작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팀장까지도 시말서 혹은 그 이상의 징계가 불가피해 보인다.

도대체 지금이 8, 90년대 주먹구구로 일을 처리하던 때도 아니고, 다른 여느 보통 소형 기획사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던 회사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계약은, 무효인 거네요.”

매니저는 복잡해진 머리를 움켜쥐고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회사에서 진중하게 토의를 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법무팀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죠?”

“그렇네요. 하, 정말 이사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뭐, 그건 그렇고 이참에 실장님께도 조언을 구할 일이 생겼습니다.”

“조언이요?”

“연습생들의 거주 문제 말인데요.”

처음에는 연습생들을 속박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연습생들의 강제 합숙을 반대했었다. 정확히는 대훈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고 의견을 냈고, 단유는 거기에 동조했을 따름이지만, 지금 살펴보면 단순히 연습생들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의미보다, 그들에게 최선의 환경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합숙을 추진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당연히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다른 회사들이 연습생들을 한곳에 두고 관리하는 게 아니죠. 연습생들에게야 합숙이 마치 감옥 같고 답답하게 느껴질지언정,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나 회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오가는 게 불편한 연습생들에게는 오히려 가까운 곳에 합숙소를 두고 회사를 오가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관리 면에서도 두말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고요.”

역시 ‘효율’을 따지자면 그게 정답일 테다.

“알겠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자신에게 연습생들의 처우를 결정할 권한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돈이 들어갈 문제라면 투자자로서 대표에게 의견을 제시할 순 있을 것이다.

회사 차원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니 다시 대화의 화제는 보민에게로 돌아갔다. 매니저는 고개를 올려 보민이 머물고 있을 층의 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있는 연습생들 중 가장 욕심이 많은 친구를 꼽으라면 전 저 친구를 꼽았을 겁니다. 정말 성실하고 끝없이 노력하는 친구라 비록 면전에서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많이 아끼던 아이였어요.”

“그런가요?”

“하지만···.”

아마도 지금 상황에서는 더 이상 회사와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매니저는 구두 뒷굽으로 바닥을 거칠게 비볐다. 갈려진 담배꽁초가 모래와 함께 밀려났다.

“도대체 연예인 그깟게 뭐라고 가족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몸이 망가지도록 하는지.”

중얼거리는 매니저의 목소리. 하지만 그 이유는 단유보다 매니저 스스로가 더 잘 안다. 단순히 돈과 명예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젊음을 불태울 수 있는 자리. 그래서 어리고 젊은 아이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어쩌면 매미의 그것보다 더 짧을지도 모를 인생의 전성기를 꿈꾸며.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신은 그런 꿈을 꾸는 아이들을 이용해 먹고 사는 직업. 그들의 꿈이 자신에겐 그저 밥벌이 수단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냉정하게 그들을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의 꿈을 평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꿈을 꾸는 대신, 현실을 살아가니까.

“바보들이에요, 바보들.”

하지만 그 바보들과 부대끼다 보면 가끔 현실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의 꿈에 동화되어 그들을 응원하기도 한다. 아주 가끔.

매니저는 고갤 들어 시퍼런 하늘을 바라보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매니저의 한탄을 들어주던 단유. 문득 그가 바로 모두가 지향해야 할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견 느슨해 보여도 주변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는 사람. 허망한 꿈을 꾸거나 동화되는 대신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 오늘 매니저가 본 단유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설픈 넋두리에도 별 감흥 없어 보이는 얼굴까지 완벽하게 현실지향적,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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