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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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은 지윤을 제치고 나서려 했다. 그러나 의외로 지윤의 힘이 강해 떨쳐내기 어려웠다.
“놔! 이거 못 놔?”
울상이 된 지윤은, 그래도 아름을 붙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언니, 참아요. 네?”
지윤이 아름을 철벽 방어하는 사이, 시율도 슬기를 막는데 온 힘을 쏟았다. 사실 시율은 지윤처럼 슬기를 막는 데 힘을 쓸 필요는 없었다. 슬기는 올 테면 오란 식으로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아름을 흘겨볼 뿐이었으니까. 먼저 아름에게로 달려들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팽팽한 긴장감에 시율은 그저 전전긍긍하며 부디 ‘사고’가 나지 않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다행이랄까, 어느새 다음 레슨 시간이 된 탓에 도착한 트레이너의 등장으로 상황은 반전되었다. 문이 달칵 열리자마자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고, 이어 모습을 드러낸 트레이너는 어수선한 연습실 안의 상황을 보다 물었다.
“뭐니?”
“······.”
“니들, 싸웠어?”
“아닌데요.”
지윤이 얼른 대답했다. 트레이너의 눈을 피해 아름의 등을 톡톡 두드려 그녀를 뒤로 물리려 했고, 아름은 못 이긴 척 끌려갔다. 트레이너는 눈을 껌뻑이며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살피다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럴 때는 연습실이 방음이 잘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보민이 걱정하는 중이었어요.”
여태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던 지서가 한 마디 했다.
“보민이? 아직 안 왔어?”
“네.”
“오늘 안 올 모양이네.”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해? 다들. 얼른 수업 준비해야지?”
“네.”
그런 와중에도 슬기는 아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비틀리자, 아름이 발끈하려 했지만 그때까지도 옆에 붙어 있던 지윤이 재차 아름을 말렸다. 지윤이 드러내 보이는 애절한 눈빛을 보며 아름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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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복잡해지겠는데요?”
일이 커지거나 복잡해지는 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 특히 상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달려온 매니저는 더더욱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니, 매니저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손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를 걸기 전에 다시 한번 단유의 눈치를 살피는 매니저. 정말 전화 할까요, 라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일이 복잡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보민 양에게 어떤 위험한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단유의 말에 결국 수긍하고 마는 매니저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경찰의 입회하에 구급대원까지 불렀더니 조용한 동네에 갑작스런 소란이 궁금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래? 사고 났나?”
아래층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위에까지 들려왔다. 당연히 매니저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특히 조금 전 현 상황을 팀장에게 보고하고 들은 비난에 안절부절 가만히 서 있기 힘든 모습이었다. 반면 단유는 태연한 얼굴로 가끔 휴대폰을 살피면서 여유로운 모습.
매니저는 그게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의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라고 생각했다. 아닌 말로 일이 있든 없든 매니저는 회사로부터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작게는 시말서, 크게는 징계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허나 단유는 그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위치.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막 도착한 구급대원들 사이에 술렁이는 분위기.
“어, 저기요.”
그리고 한 구급대원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게 다가갔다.
“저기 이 집, 오늘 새벽에 저희가 왔었던 곳인데요.”
“네?”
귀가 번적 뜨인 매니저가 놀란 얼굴로 구급대원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막 상황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 새벽에 여기 201호로 신고 전화가 와서 출동한 기록이 있다는데요?”
“무슨 일로 말입니까?”
“잠시만요.”
구급대원은 뒤로 돌아보더니 통화를 하고 있던 다른 구급대원을 바라보았다. 상황실과 통화 중인 모양인데, 그가 잠시 손을 들어 기다려달란 제스처를 한 뒤 잠시 통화에 귀를 기울이나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자세한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 저희가 신고자의 신고로 도착해 곧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다고 합니다.”
“병원이요?”
“우선 그 병원에서 신고자가 퇴원을 했는지부터 알아보시는 게 좋겠는데요. 만약 신고자가 아직 퇴원을 하지 않았다면, 이 집은 아직 빈집일 테니까요.”
일이 복잡하다 못해 꼬인다는 생각에 매니저는 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느 병원인데요?”
이 집 주인인 보민과의 관계를 설명한 매니저는 곧 그녀를 이송했다는 병원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고, 병원에 연락한 결과 그녀가 아직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 지체하지 않고 두 사람은 병원으로 출발했다.
****
“하나, 둘, 셋, 넷. 아니, 아니. 줄 맞춰야지, 채린아.”
“죄송합니다.”
“다들 왜 이러지? 오늘 다들 정신이 없는 것 같은데?”
트레이너의 한 소리에 다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치를 살핀다.
“너희들 뭔가 착각하나 본데, 시간 별로 없어. 월평까지 4주 남았다고 이렇게 여유만만인 거면 너희 잘못 생각한 거야. 이러다 무대 위에서 개망신당하는 수가 있어.”
“······.”
“지금 배우는 거,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근데 기본도 제대로 안 되는 데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어떻게 무대를 꾸며? 지난 번에 무대에 다 서봤잖아? 이렇게 연습실에서 나랑 마주보고 연습하는 거랑, 무대 위에 서는 거랑 같던? ···다르잖아? 그때 자기가 연습한 만큼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봐. 있어? 없지? 그런데 그때 했던 실수 또 반복할래? 한 번의 실수야 봐주지만, 두 번의 실수는 그때부터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해. 그리고 우리끼리야 실수도 웃고 넘어가 주지, 나중에 데뷔하고 나서 방송 무대에서 실수하면, 그때 사람들이 웃고 넘어가 줄 거 같애? 완벽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게 여기서 살아남는 법이야. 만약 그런 거 싫다, 그냥 되는 대로, 형편대로 살고 싶다,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진지하게 진로를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채린은 자신 때문에 모두가 욕먹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죄책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곁에 있던 시율이 채린의 그 모습을 알아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달래주기도 어려웠다.
“연예인이 뭐니?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지? 그런데 연예인이 맨날 사랑만 받는다고 생각해? 아냐. 사랑 만큼이나 욕도 많이 먹는다고. 무대 위에서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대중들이 귀엽다 생각할 거 같애? 아냐. 대중은 굉장히 냉정해. 칭찬을 할 때는 정말 분에 넘친다 느낄 정도로 칭찬하지만, 반대일 때는 세상 누구보다 냉정하고 무서운 게 대중이야. 어지간한 멘탈로는 버티지도 못해. 그런데, 지금 네들 봐봐. 지금 니들이 있는 이곳이, 니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게 죽을 정도로 힘들어?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을 정도로 벅차? 그러면 정말 다시 생각해. 나처럼, 다른 선생님들처럼 너희들한테 꼬박꼬박 피드백 주고 실수 봐주고 그럴 사람들, 너희가 앞으로 마주칠 대중들 중에는 없다고 봐야 해. 그런데 그들 앞에서 지금 같은 모습 보이면? 끝이야, 끝.”
비록 트레이너의 입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 보민의 결근이라는 문제로 인해 흔들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름은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건 자신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멘탈을 잡아주진 못할망정, 나이 어린 동생과 드잡이질을 할 뻔 했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한심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슬기에게 잘못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은 분명 정당한 요구를 했고, 슬기는 이기적인 처세로 자신의 정당성을 깔아뭉개려 했다. 단 한 번도 아이들 앞에서 나이나 기타의 이유로 위세를 부리려 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암묵적으로 지켜야 할 서로에 대한 존중을 아름은 슬기로부터 받지 못했고,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무시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자신의 분노는 합당한 처사였다.
그렇지만 그 분노를 풀어내는 과정이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어른이니까, 어린 애들처럼 서로 눈을 부라리며 말싸움을 하거나 주먹다짐을 할 게 아니라면, 상대가 치기를 부리더라도 어울리지 않고 포용하며 다스려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오죽하면 내가 이런 말까지 하겠니?”
생각을 이어가던 와중에도 트레이너의 설교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름은 눈동자만 몰래 들어 트레이너를 살폈다가 얼른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돌렸는데, 우연히도 마침 그때 건너 건너에 있던 슬기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자신을 흘겨보고 있었는지 몰라도, 여전히 ‘공손하지 못한’ 눈빛으로 아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나 했는데, 와락, 아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혼잡한 병원 로비를 지나 접수대로 향하니 연속된 업무의 반복에 무덤덤해진 듯한 표정의 접수원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늘 새벽에 응급실에 온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데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앞에 놓인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준비 자세에 매니저가 곧 ‘최보민이요’라고 말했다.
“303호요.”
간단명료한 대답에 매니저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303호랍니다.”
단유에게 일러준 후, 곧바로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엘리베이터 타고 가면 되겠네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매니저는 연신 맨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환자복을 입고 한 손에는 링거대를 움켜쥔 사내가 단유와 매니저를 힐끔 바라본다.
“큰 병은 아니겠죠?”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묻는 것이리라.
“아닐 겁니다.”
확신은 못 하지만, 일반병동 6인실에 입원했다면 일단 중증환자는 아닐 거란 기대를 해도 되지 않겠느냐, 고 했더니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매니저의 팔을 붙잡고 살짝 뒤로 잡아당겼다. 왜 그러냐는 표정이 되어 바라보는데, 단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게 좋겠다고 대답해주었다. 과연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중에 두 사람은 젊고 건강한, 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마침 바로 옆에 계단이 있으니, 두 사람은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올랐다.
“엘리베이터 타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가 계단을 오른다는 생각을 못했네요.”
“그보다는 실장님이 여유가 없으셔서 그런 거 같습니다.”
“여유요?”
지금 상황에 여유를 찾다니. 그건 매니저에게 사치나 다름없었다. 전전긍긍. 아침부터 지금까지 시종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바로 매니저였다.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매니저님이 지금처럼 조급해하시고 여유가 없으면, 아마 보민 양도 많이 당황할 겁니다.”
“걔가 왜 당황해요.”
“지금 저희, 보민 양 겁주러 가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지금 매니저님 얼굴 보면 아마 겁부터 먹을 겁니다.”
단유는 마침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가리켰다. 매니저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거울을 보니, 서늘한 바깥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삐질 흘리며 핏줄 선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출근할 때만 해도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도 너저분하게 헝클어진 상태. 얼른 손빗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정리했다.
눈동자를 살짝 옆으로 돌려 자신의 어깨 뒤에서 가만히 기다려주는 단유를 확인한 매니저는 가만히 입을 열고 물었다.
“이사님은 괜찮으십니까?”
내가 이런데 당신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느냐, 는 속내가 담긴 질문이었다.
“아뇨.”
예의상 하는 대답?
“꽤 머리가 복잡하네요.”
왜?
“왜요?”
“······.”
‘아, 실수.’
속으로만 생각해야 할 걸 입 밖으로 내어 물었다. 매니저는 얼른 몸을 돌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역시 회사에서 연습생들에게 으레 해줬어야 할 것들을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해줘야 할 것이라면 뭐 말입니까?”
“연습복 따위나 챙겨줄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연습생들이 안심하고 전력을 다해 노력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줬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구나, 하는 책임감 같은 걸 느끼기 때문입니다.”
대형 기획사 못지 않게 훌륭한 연습실을 보유하고 있음을 자랑으로 삼고 외부에 자랑도 하고 다니는 마당에 이보다 더 어떻게?
그러나 단유는 대답 대신 손바닥을 살짝 들어 위로 들어 올려보였다.
“가시죠.”
“아, 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겨 3층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