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9화 (859/956)

추억(6)

-------------- 859/952 --------------

단유가 매니저의 차에 오르니, 매니저가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단유가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단유가 함께 보민에게로 가보자고 권했을 때는 예의상 ‘제 차로 가시죠’라고 말했었다. 단유에게 운전을 시키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뿐이지만, 주차장에 내려와 보니 단유가 무슨 차를 타고 다녔던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차가 없나?’

딱히 그가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도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주차장을 들락거리며 마주쳤던 여러 차 중에 단유의 차일 거라고 추측되는 차는 없었다. 주차장 한구석에 있는 외국 브랜드의 중형 세단은 대표님의 차량이었고, 그 옆에는 기획실장이 타고 다니는 역시 같은 브랜드의 중형차, 라는 걸 알지만 그 외에는 딱히 단유가 ‘타고 다닐 만’한 차는 보이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운전면허가 없어 차를 사지 않은 것일지도.’

그렇다면 매일 아침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이야기일까? 비록 자신의 회사가 큰 회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사‘씩’이나 하는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게 어째 어색하게 느껴진다.

‘옷은 비싸 보이는데.’

어떤 브랜드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보기에 비싸 보이는 양복과 코트를 걸친 채 버스나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언밸런스 그 자체다. 게다가 얼굴도 좀 잘 생긴 사람인가? 어쩌면 아침 저녁으로 그가 탄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드라마를 꿈꾸는 여자들이 단유의 얼굴을 훔쳐보기 바쁠 것 같다는 생각까지 이른다.

“왜 그러십니까?”

힐끗거리는 시선을 느낀 단유가 묻자 매니저는 딴청을 부리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댔다. 곧 시동을 켜고 네비게이션을 조작했다.

“주소가···.”

아까 받은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팀장님이 ‘기다려’라고 했지만, 옆에는 무려 이사님이 계시니 괜찮지 않겠냐는 속 편한 생각을 하며 악셀을 밟았다.

****

레슨이 끝난 후,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몇몇은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연습실을 나가고, 몇몇은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주무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몇몇 중 아름이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연습생들 사이의 분위기가 쉬는 시간임에도 어수선하다는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쉬는 시간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단 한 사람이 빠진 것일 뿐인데도 아이들은 그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빠진 사람이 보민이라서라기 보다는, 같은 동기생 중 한 명이 빠졌다는 사실 자체에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탈의실로 향하는 슬기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혹시 연락이 없었는지 궁금해하는 모습과 여전히 연락이 없다는 사실에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슬기.

사실 지금 상황에서 이 분위기를 개선할 방안은 딱히 없었다. 굳이 분위기를 쇄신해야 하나, 라는 질문과 그 역할을 굳이 내가 해야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오고 가는데, 그 번잡함이 아름은 불편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듣는 이야기가 ‘너가 여기 애들 중에 가장 맏인데, 왜 가만히 있냐’는 말이었다. 사실 다른 아이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가끔 실장님이나 신인개발팀 팀장님이 아름을 따로 불러 그런 이야기를 하며 책임을 들먹거렸는데, 아름은 그 사실을 다른 아이들에게 한 적은 없었다. 굳이 그걸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서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는 것처럼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름이 그렇게 주변을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고, 다른 누군가와 비견되어 자신이 초라하다 느꼈던 시기가 있어 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실장이 자신을 불러 ‘맏언니의 역할론’을 들먹거렸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회사의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그 뒤로는 다른 동생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트레이너가 들어와 ‘반 분위기 왜 이래’라고 한 마디 했을 때, 굳이 시선이 자기에게로 향하지 않았지만, 아름은 자신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슬기 언니,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닐 거야.”

“그래서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게 좋지 않은 거야.”

“저희는 어차피 늦게까지 하고 싶어도 못하잖아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 몰라?”

“언니, 또.”

“뭐? 뭐? 그리고 진지하게 말하면, 일찍 일찍 다니는 게 좋아.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그래서 언니는 누구보다 빨리 집에 가시는 거고요?”

“그럼! 당연하지.”

“아무튼 슬기언니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쵸?”

“없을 거야. 그리고 니들 그거 알아?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 계속 불길한 소리하면 그게 진짜가 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아예 그런 말 입 밖에 꺼내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그냥 지금은 애가 어제 너무 무리해서 힘들었나보다, 생각하고 내일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타나겠지, 라고 생각해. 그래야 정말로 아무 일 없이 나타나는 거야.”

“무슨 미신 같애.”

“미신이라니? 이건 우주의 진리야.”

“무슨 우주의 진리 씩이나.”

“이것들이. 그러니까 니들이 아직 어리다는 거야. 계속 말로 잘 된다, 잘 된다 하면 정말로 잘 되는 법이야.”

“그거랑 어린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실제로 나는 많은 경험을 했거든. 니들 시크릿 알아?”

“비밀이요?”

“영어 단어 말고, 책 말이야, 책.”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어. 니들은 어려서 아직 그런 책 못 읽어봤잖아? 그래서 니들은 어리다는 거야. 아무튼 외국의 유명한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인데, 그 책에서 그래. 말이 씨가 된다고.”

“에이, 설마요?”

“정말이야? 의심스러우면 직접 사서 보든가?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따라 했더니 정말로 된다는 걸 증명했어.”

“어디서 증명해요?”

“아무튼 했어. 그러니까 믿어. 믿는 사람은 복 받을 거고, 못 믿는 사람은 저주받을 거야.”

“우와, 언니 막말 쩐다.”

“내 말엔 힘이 있어. 그러니까 내가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야. 지금부터 내 말 안 믿는 사람은 내가 최선을 다해서 저주해주마. 못 믿겠는 사람 손?”

“대박이야, 언니.”

아름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는 지윤이 나이에 안 맞게, 철딱서니 없는 모습도 종종 보여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지윤을 보면, 그녀의 주위로 아이들이 모여서 웃음을 짓고 있다. 이번에도 지윤은 고등학생인 채린이나 시화가 듣기에도 어이없을 엉뚱한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이들을 주목하게 만들고 처져있던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지 않은가.

도리어 지금, 아름이 했어야 할 일을 지윤이 하고 있는 셈이다. 아름으로서는 지윤을 새롭게 보는 계기일 뿐 아니라, 리더라는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과연 자신이 리더로서의 자질이 있는가’라는 반성이었다. 반드시 리더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과연 리더라는 역할을 맡아야 할 때, 자신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만들었다.

‘나, 아직 많이 부족한 거야.’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자신을 또 발견하는 아름이었고, 또 한 번 주먹을 쥐어보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던 아름은 여전히 다른 아이들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느라 그만큼의 거리감이 점점 굳어지고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만다.

****

“여긴가요?”

“일단 주소는, 네, 여기네요. 여기 빌라 201호라고 되어 있네요.”

생각보다 회사에서 꽤 먼거리이기도 했고, 오면서 자연스럽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지하철역에서도 꽤 멀어서, 만약 지하철을 이용해 회사를 오고 갔다면 늦은 시간 꽤 긴 거리를 도보로 이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불길한 생각은 한 번 떠오르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일까? 매니저는 주차를 시키고 차에서 내리면서도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단유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담담한 얼굴이라, ‘걱정이 전혀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빌라가 잔뜩 모여 있는 동네였는데, 동일한 시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빌라촌인지 모두 비슷비슷해보였다. 심지어는 빌라 외벽의 마감재까지 비슷한 모양 비슷한 색깔을 차용해 쌍둥이 건물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소를 정확히 알고 오지 않았다면 헷갈릴 수도 있겠네요.”

매니저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행 주택법상 건축주나 토지주가 3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을 지을 경우 사업계획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진입도로는 6m 이상, 주민 복지시설 등 기반시설도 갖춰야 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환경영향평가와 건축심의 등 행정절차도 까다롭죠. 반면 빌라는 주택법이 아닌 건축법에 의한 건축허가만 받으면 되니까, 기반시설 부담도 없고 진입도로도 여기처럼 4m 이상이면 되니까, 건축주들이 이런 땅에다 30세대 이하의 건물, 즉 이런 빌라를 짓는다고 하죠.”

“꽤 자세하게 아시네요?”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본 적 있다는 말로 4미터니 건축법이니 하는 걸 기억하는 게 납득이 되는가? 매니저는 단유가 말로만 그러는 것이고, 실제로는 꽤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거라고 추측했다. 어쩌면 차보다 부동산에 더 관심이 많은 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게 알짜배기지.’

차는 그냥 소모품이지만, 부동산은 투자가 아닌가? 역시 돈을 벌려면 부동산을 해야지,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던 매니저였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여기저기 파여 있는 곳에는 깊진 않아도 밟으면 무릎까지 물이 튈 정도의 작은 물웅덩이가 보였다. 마침 차에서 내린 바로 앞이 그랬기에 단유는 긴 다리를 뻗어 물웅덩이를 피했지만, 매니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거길 밟았다.

“아···.”

뒤에 된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애써 참아내는 모습이었다. 매니저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주변을 살피니, 이제 막 점심 시간이 지났을 무렵인데도 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이 사는 동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분양이 다 끝나지 않은 곳도 있나 보네요.”

단유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할인 분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집값이 싸다는 거겠죠.”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20살 연습생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었을지도 모르죠.”

단유는 보민이 충남 천안시에서 올라왔다는 것을 오디션 당시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들어가 보죠.”

주변 골목을 두리번거리던 매니저가 먼저 빌라 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입구에서 발목이 잡혔다.

“비밀 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군요.”

공동현관문의 키패드 앞에서 난감한 얼굴이 된 매니저를 뒤로하고 단유는 주변을 살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매니저는 익히 알고 있던 보민의 주소지인 201호를 누르고 통신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신호가 가는지 안 가는지도 불확실한 정적이 길게 이어지고 키패드 옆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답신도 오지 않았다.

매니저는 고개를 뒤로 빼고 단유를 불렀다.

“아무래도 여기 빌라 주인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요.”

빌라 주인을 찾아 비밀번호를 알아내거나, 주인이 직접 와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가까운 부동산 사무소를 찾으면 될 겁니다.”

보통 이런 빌라의 경우 가까운 부동산 중개 사무소를 찾으면 된다. 분양을 위해 손님들을 데리고 와서 방을 보여줘야 하기에 이런 공동현관의 비밀 번호 정도는 알고 있을 테고, 모르더라도 빌라 주인과 직통으로 전화할 수 있을 테니 쉽게 허락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단유가 다시 매니저에게 돌아오더니 말했다.

“3924 한 번 눌러 보실래요?”

“3924요?”

“샵(#)버튼을 먼저 누르셔야 하네요.”

그 정도는 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뜬금없이 3924라는 번호를 누르라니?

혹시 하며 키패드를 조작했더니, 거짓말처럼 불이 들어오고 잠금 장치로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어? 어떻게 아신 겁니까?”

혹시 이전에 여길 온 적이 있냐는 물음을 삼키며 의심스럽게 단유를 보던 찰나, 단유는 바로 옆에 있는 계량기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여기 적혀 있었어요.”

“비밀번호가요?”

“배달원이나 택배 기사들처럼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런 곳에다 비밀번호를 적어 놓는다고 하더군요.”

“아니, 비밀번호를 그런데 적어놓는다고요?”

“빌라 뿐 아니라,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도 이런 식으로 적어놓는 곳이 많다길래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 되네요.”

단유는 열린 문을 잡고 열다가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가도 되나요? 저희?”

비밀번호를 알려준 당사자가 그걸 자신에게 물으면 어쩌잔 말인가? 동시에 매니저는 자기가 사는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도 이런 식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일단 보민이 문제부터.’

다시 우선 순위를 재조정하고 매니저는 단유가 열고 있는 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