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8화 (858/956)

추억(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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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 안 보이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연습생들까지 모두 모인 연습실, 오후 레슨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보민이 오늘 안 왔어요.”

“보민이가? 왜?”

트레이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력이 가장 좋은 아이, 라고는 말 못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는 눈빛이 마음에 드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부재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

침묵하는 연습생들을 둘러보며 재차 물었다.

“위에 얘기는 했어?”

“실장님한테 이야기했어요.”

슬기가 나서서 답했다. 매니저에게까지 보고된 사항이라면 더 이상 트레이너가 간섭할 문제는 아닌 듯 했다. 어쨌든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녀의 목표는 눈앞의 아이들이 일정 수준까지 실력이 올라오도록 돕는 일.

“그래? 알았어. 그럼 일단 레슨 하자.”

그런데 플레이어를 조작하고 곧바로 레슨에 들어갈 준비가 끝났음에도 아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동료 한 명이 이유도 모른채 빠졌으니 심란한 마음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지금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분위기 왜 이래? 한 명 빠졌다고 분위기가 처져? 레슨 안 할래?”

“아니요.”

대답과 달리, 분위기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트레이너는 본격적인 레슨에 들어가기 앞서 고강도 스트레칭으로 앓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아이들을 굴렸다.

“보민이가 안 나왔다고? 왜?”

신인개발팀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고를 듣고 찾아온 부장의 물음에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직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연락이 안 돼?”

“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연습생들 사이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런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부장의 눈썹 한쪽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추측이야 확신이야?”

“···확신입니다.”

아무리 여러 가지 일들로 바쁘다 해도 연습생들을 관리하는 주업무를 등한시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매니저가 보건대 자신이 관리하는 B반의 아이들은 크게 불거질만한 문제를 안고 있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끼리만 뭉쳐놓으면 가끔 파벌이나 사소한 신경전이 벌어져 싸우는 경우도 있다지만, 적어도 B반은 괜찮았다.

“그래서 조치는?”

부장의 물음에 매니저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대답했다.

“그래서 한 번 찾아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어딜? 집에?”

“네.”

아래층까지 내려갔다가 결국 로비를 나서지 못하고 머뭇대다 일단 위에 보고를 한 뒤 허락 후에 가자는 생각으로 올라왔다. 그가 머뭇거린 이유는 부장에게서 갔다오라는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이유와 동일할 것이다.

혼자서도 생각했던 일이지만, 연습생의 무단 결근은 흔하지 않으면서도 흔한 케이스다. 다음날이면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 죄송합니다 한마디 하고 한 시간여의 일장 훈계가 이어지면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흐지부지될 일이기도 하다.

“일단 기다려봐.”

그리고 괜히 매니저가 집에 찾아가서 무슨 일이 있니 없니 하는 것도 우습다. 다 큰 성인이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고 직장 상사가 집에 찾아가는 경우는 없기도 하거니와 괜히 요란만 떨다가 시간만 낭비하는 수도 있으니까. 더구나 상대는 연습생. 냉정하게 말해서 그녀가 레슨을 받고 싶지 않다고, 혹은 계약을 포기하고 싶다고 해도 회사로서는 ‘어? 그래? 알았어.’라고 대답을 주고 나머지는 법적으로 처리해버리면 그만인 문제였다. 딱히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매니저가 집에 찾아가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건 단순한 충동이 아니었다. 평소 보민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각오로 회사를 다니는 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근면했던 아이였기에 이리 쉽게 꿈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고, 때문에 그녀의 가벼운 변덕만이 이유는 아닐거란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도 100% 확신할 수 없는 믿음이긴 했다. 그래서 매니저는, 차라리 보민이 여느 아이들처럼 현실이 힘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잠시 방황하는 것이기를 바랐다.

부장에게 보고를 마친 후, 바로 사무실로 가는 대신 카페테리아로 향한 매니저는 잠시 숨을 돌리며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그녀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단지 지금이 회사 초기이고, 그녀가 회사의 1기 연습생이기 때문이며, 평소 보았던 그녀가 성실한 이미지의 연습생이었기 때문, 이라고 스스로의 이유를 찾았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을 테니, 내일이면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리라. 내일 그녀를 보게 되면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강한 어조로 윽박지르듯 혼을 내서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다짐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살살 달래듯 말해서 그녀가 쉽게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해줘야 할까?

“무슨 일 있어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단유가 덤덤한 얼굴로 디스펜서를 조작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지난 시간을 되돌려봐도 이 바닥에 있으면서 저 정도의 외모에, 저 정도의 아우라를 지닌 연예인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는게 매니저의 본심. 사내에서 여러 차례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었으니 익숙해질만도 한데, 이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무심코 보면 남자인 자신도 무심코 놀랄 정도의 외모였다.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매니저는 단유의 물음에 답했다.

“아, 그냥 좀 생각할게 있어서요.”

“그런가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듯 해 보여서요. 뭐 드시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단유의 물음에 매니저는 자기 앞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잠깐 쉬려고 온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매니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숨을 천천히 내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네?”

단유는 탄산이 없는 오렌지 쥬스를 컵에 담아 한 모금을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불안할 때는 호흡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거든요.”

“제가 불안해 보였습니까?”

“지금도 눈동자의 흔들림이 심하시네요. 아마도 저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계속 매니저님을 괴롭히는 문제를 생각하시느라 그러신 듯 합니다. 그리고 호흡도 평소와 달리 거칠고요. 앉아 계실 때 보니까 엄지 손가락 끝을 계속 뜯던데, 의식하지 않은 행동처럼 보였어요. 평소에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 겁니다.”

“관찰력이 좋으시군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음료수를 한 잔 더 뽑은 단유는 그것을 매니저에게 건네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구강내 건조도 불안감을 느낄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하더군요.”

단유의 말이 있은 후에야 매니저도 자신의 입이 바짝 말라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매니저는 거부하지 않고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몸을 틀어 음료수를 들이켰는데, 그런 뒤에야 자신의 행동이 이상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고, 술자리도 아닌데 무심코 이러고 있으니 과연 습관이 무섭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매니저는 컵을 내려놓았다.

“잘 마실게요.”

“네.”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대답을 하고 돌아섰다. 그때, 매니저는 문득 그가 연습생들에 대해 꽤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게다가 지금처럼 관찰력도 좋으니, 어쩌면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알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저기, 이사님.”

“네?”

“혹시 B반의 최보민, 이라고 아십니까?”

단유는 주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보민 양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 실은 오늘 보민이가 오지 않아서요.”

“그래요?”

“네. 그래서 혹시···.”

말을 던지고 나서야 매니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에 대해 인지했다. 아무리 경황이 없기로서니 누구한테 무슨 질문을 던지는가 말이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별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매니저는 격렬하게 손과 고개를 저어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려 했다. 그런데 단유에게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보민 양이라면 어제 봤는데.”

“네?”

전혀 예상 못 한 이야기라 매니저의 핏줄 서린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런 매니저의 반응에도 단유는 메뉴판을 설명하는 서버처럼 차분하게 어젯밤의 목격담을 털어놓았다.

****

어제 저녁, 모처럼 만난 도경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즐거웠던 식사와 2차로 이어진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식당을 나왔을 때였다.

“이대로 가면 아쉽지. 3차 고고?”

이미 충분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했다고 생각한 단유가 그 제안에 대해 정중히 사양의 뜻을 전하려 하기도 전에 시은과 대훈의 콜이 나왔다.

“단유 씨도 같이 가야지.”

선뜻 대답을 하지 않는 단유를 보며 대훈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당연하죠. 주인공인데.”

언제부터 이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었는지 의문이었지만, 시은까지 단유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하고, 게다가 도경이 예의 넉넉한 웃음으로 단유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기니 도저히 그 팔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그럼 잠깐 전화 좀 하고요.”

“전화? 누구? 혹시···.”

은근한 눈빛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는 도경과 흥미진진한 표정이 된 시은의 기대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전화해줘야 돼요.”

“그런 거 일일이 보고하고 그래? 그런 성격이었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실제로 걱정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의외네요. 보기와 다른데요?”

왜 그게 의외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을 풀기보단 우선 하은에게 전화를 먼저 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서 잠시 일행과 거리를 두고 핸드폰을 들었다.

하은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예상한 대로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니 늦어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시은’이 함께 자리한다는 이야기에 자기도 팬이라고 말해달라는 시답잖은 부탁을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다시 일행에게 돌아가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길을 걷고 있는 보민을 발견했다. 보라색 가디건을 걸친 채 걸어가는 방향을 보건대 아마도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가는 것, 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핸드폰을 슬쩍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하니 지금쯤 막차가 운행하고 있을 시간이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말이다.

또 짧은 순간이었지만 느릿한 걸음과 가방을 매지 않은 다른 쪽 어깨를 연신 주무르는 모습에 많이 지쳐 보인다는 느낌도 받았다. 듣기로 요즘 다음 월평을 위해 특별한 레슨을 받고 있다던데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잠시 가졌다.

어둡지는 않지만, 늦은 시간 밤 거리를 홀로 걷는 보민을 보니 꽤 용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치안 좋은 나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뉴스에서는 흉흉한 사건 사고 소식이 나오는 세상이니 20살 여자아이가 혼자 길을 걷기엔 무섭지 않을까?

하지만 단유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보민의 행적은 곧 건물에 가려져 더 이상 단유의 시야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그쯤에서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불과 5분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녀에 대한 걱정을 더 잇지 못하게 했다.

****

“아니, 어린 애가 밤길을 혼자 걷는데 그걸 그냥 지켜만 봤단 말입니까!”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었더라도 굳이 다가가 데려다주겠다거나 하면서 동행을 자처하면 그게 더 수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껏 5개월 남짓 반복되었을 출퇴근 길이었을 텐데 걱정된다며 보민에게 접근하는 건 지나친 오지랖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매니저는 그저 단유가 목격했다는 정보 그 자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어쨌든 결론은, 보민이 무사히 회사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 정도다.

“그렇군요.”

아쉽지만 그 정도로는 오늘의 결근을 설명하기 힘들다. 힘들어 보였다고는 하지만 그게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지 못하기도 하고.

“고민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고요?”

“매니저님처럼요?”

“···네.”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냥, 평범해 보였습니다. 단지 조금 지쳐 보였을 뿐이었어요.”

“멀어서 잘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글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단유가 보민을 발견했을 당시 둘 사이의 거리 정도는 단유가 한 사람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거리였다. ‘보는 법’을 터득한 이후, 그런 건 전혀 문제 아니었으니까.

“하, 이걸 어쩌지.”

매니저가 답답해하며 한마디 했다.

“사실은 정말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매니저는 만에 하나, 벌어질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을 상정하고 말했다.

“혹시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그 아이에게도 문제겠지만, 회사로서도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으니까요.”

매니저의 가정에 단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문제에 이런저런 사정을 끼워 넣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군가의 희생이 누군가의 사정으로 폄하되어서는 안 됩니다.”

“네?”

“매니저님께서 회사의 입장 따위를 고려하시는 듯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약 보민 양한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면, 그건 그걸로 이미 큰 문제인 것이지, 거기에 회사의 사정이니 혹은 매니저님 개인의 입장이 섞여 고려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 저기, 그러니까, 그런 뜻은 아니고요.”

단유는 들고 있던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민 양한테 가시려고 했다면 함께 가시죠. 저도 함께 가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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