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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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좀 더 격한 새벽 운동으로 땀을 뺐더니 어제 마신 술기운이 조금 날아가는 기분이다. 어제 일을 생각하니 단유는 픽,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이다, 단유야!”
저녁 7시에 갑자기 불려 나왔음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온 도경은 단유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다며 단유를 안았다.
“언니, 아줌마 같애.”
“아줌마 맞지, 뭘.”
주책맞다며 구박하는 시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경은 단유를 보며 그동안 잘 지냈냐며, 오랜만에 보니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며 수다를 늘어놓았다. 예전 젊었을 적에도 통통한 편이었던 그녀는 부쩍 살이 불었는데 ‘나 아직 그대로지?’라며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성격이 단유는 반갑기도 했다.
그렇게 불려 나온 도경과의 만남은 곧 술자리로 이어졌다. 대훈과 시은, 단유와 도경이 함께 한 술자리는 도경의 주도로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보기와 다르게 시은은 술이 강한 편이었다. 언뜻 보면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대훈이야 워낙에 많은 술자리에서 단련이 된 탓인지 술을 마시는지 물을 마시는지 모를 정도였고, 도경은 그냥 말술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술을 마시자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술자리를 장악하다시피 이끌었다.
“그때 있잖아?”
도경이 도연과 공익 웹드라마를 촬영할 당시의 비하인드 썰을 풀어내기 시작했을 때, 단유는 잠시 그녀와 만난 걸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만 뺀다면 단유로서도 그녀와의 술자리가 꽤 즐거웠다. 도경은 술자리에서 대화를 주도할 줄 알았고, 함께 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잘 아는 여자였다. 특히 이런 자리에서 친목 도모형 대화가 익숙하지 않은 단유까지도 소외시키지 않는 특유의 넉살과 친화력 덕분에 더 즐거운 술자리였다.
그 때문에 평소 술을 즐기지 않음에도 조금 무리하게 술을 마셔야 했던 부작용은 있었지만.
“하아.”
하얀 입김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몰아내며 앞으로 뻗어 나가다 이내 사라져버린다. 비 온 뒤라 더욱 맑은 하늘과 공기는 상쾌하고 시원하다는 느낌. 기온은 어제보다 부쩍 떨어져 언제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그런데 어제 내가 왜 허락을 했을까?’
언제나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려던 단유였음에도 술자리의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인지 결국 뮤직비디오 촬영에 협조하기로 약속을 해버렸다. 분명 이것도 나중에는 흑역사가 될 터인데 말이다.
“흑역사는 무슨.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 되는 거야. 나도 가끔 옛날에 내가 작업했던 영상들 보면서 추억에 젖는다고. 그때 보면 내가 왜 저렇게 센스없게 메이크업을 했을까 싶다가도, 저 때가 있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면 그게 다 추억이 되더란 말이야. 자, 건배? ···크. 게다가 현장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잖아? 기억나? 어디 그게 전부 좋은 일들만 있었어? 아니잖아? 근데 당시에야 기분 더럽고 화가 나는 일들이었어도 지나고 나면 그냥 다 추억이 되는 거야. 그런 기억들을 되돌아보며 즐기는 즐거움도 있어야 인생인 거고.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너도 이번에 추억을 쌓는 셈 치고 해 봐. 내가 도와줄게. 내 도움은 필요 없다고? 에이, 또 낯가린다. 그럴 필요 없어. 나 요즘 되게 잘 나가는 사람인 거 알지? 몰라? 그럼 이번 기회에 알면 되겠네.”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경에게야 십여년 만의 만남이지만, 단유에겐 수십 년 전의 기억이 현실에서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고, 그래서 조금 더 자신을 내려놓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아무래도 그 시절, 단유가 지금보다 어리고 미숙했던 그 때의 기억을 공유하기에 단유도 괜히 호기를 부리고 싶었달까.
‘술의 영향도 아예 없진 않겠지.’
대학 때 이후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던 적은 또 없었으니까.
어쨌든 결정이 난 사안이고, 지금에 와서 자신이 뱉었던 말을 물릴 생각은 없었다. 도경의 말처럼, 이 또한 추억이 되고 기억의 한 조각이 될지 모르니까.
그리고 좀 더 은밀한 속내를 밝히자면, 차라리 흑역사가 많아진다고 해도 이런 기억과 추억들이 많아지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지금의 그에겐 보다 끔찍하고 잔인하고 추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더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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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왔어?”
“언니 일찍 왔네요? 근데, 언니. 오늘 아침에 어땠어요?”
“아, 말도 마. 아침에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나서 일어나지 못하겠더라.”
“그죠? 저도 그랬어요. 전 갑자기 등이 아파 가지고, 아픈데도 무서운 거예요. 막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무슨 척추 이런 데 고장나서 수술 받아야 하고, 못 걷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막 그런 거 있죠.”
“에이, 그건 좀 오바다.”
“아, 진짜요. 진짜 그런 생각 했다니까요? 그래가지고 방에서 막 엄마 불렀잖아요. 아침부터 엄마 부르니까, 우리 엄마가 놀래가지고 뛰어들어와서는 무슨 일 있냐고,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엄마한테 그랬죠. 등 좀 주물러 달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등을 보여주는데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붉은 손자국이 인상적이다. 아름은 웃음을 터뜨리며 지윤의 등에 남은 손자국 위로 자신의 손자국을 더했다.
“너희 엄마가 얼마나 놀랬으면 그랬겠어?”
“진짜로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너도 참 4차원이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헤헤. 근데 언니랑 내가 제일 먼저 온 건가봐요. 아까 오면서 연습실 안에 보니까 아무도 없던데.”
“그런 거 같은데?”
“이거, 이거. 애들 못 쓰겠네. 어디 언니들보다 먼저 딱 와가지고 먼저 연습실 청소하고 있다가 언니들 오면 딱 마중 나와 가지고 어서 오십쇼, 하고 인사를 해야지. 어디 언니들이 기다리게 만들어?”
“또, 또.”
“농담이에요, 농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연습복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머리를 뒤로 묶으며 연습실로 향했다.
“오늘 되게 춥네요, 그쵸?”
“오늘부터 계속 추워질 거라더라.”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하던 건데, 전 겨울엔 저기 남쪽의 부산이나 그런 쪽으로 가서 살고 싶어요. 서울은 너무 추운 거 같아요.”
“우리나라가 무슨 미국 정도로 크면 모를까, 이 좁은 땅덩어리에 춥고 덥고가 어딨어? 다 똑같이 춥거나, 똑같이 덥지.”
“안 그렇대요. 제 친구 중에 부산에서 전학 왔던 친구가 있었거든요? 걔가 그러는데, 겨울에 부산에는 이렇게 안 춥대요. 거긴 눈도 안 내린다잖아요?”
“추우면 옷 두껍게 입으면 되지.”
“얼굴은 어떡해요.”
“그런 것까지 걱정되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
“그러게요. 아, 겨울에 오키나와에 가면 되게 좋다던데. 따뜻해서.”
“거기도 추울 땐 추워.”
“가봤어요?”
“전에.”
“정말요? 언제요?”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회사가 자랑하는 최첨단 온도 조절 장치가 작동하는 것인지, 덥지는 않지만 춥지도 않은, 정말 적당한 정도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냥 여기서 사는 게 제일 마음 편하겠네요.”
“잘 됐네. 겨울 내내 여기서 살아야 하는데.”
“회사 들어오길 잘했네요.”
“이런 거로 긍정적일 수 있는 니가 참 부럽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청소나 먼저 하자.”
“아, 진짜. 이 어린 것들이 빠져 가지고.”
“여기서는 그런 말 하지 말자니까.”
“네, 네. 그럼 제가 청소기 할까요?”
“······.”
“언니가 청소기, 전 걸레. 오케이?”
그때 반쯤 열린 연습실 문으로 복도를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내 문을 벌컥 열고 얼굴을 들이미는 슬기.
“어,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일찍 일찍 안 다닐래?”
지윤이 짐직 화가 난 척 허리에 손을 얹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슬기는 그저 헤헤 웃으며 ‘옷 갈아입고 올게요’라고 대꾸한 후 사라졌다.
잠시 후, 청소가 마쳤을 땐 학교에 가 있는 애들을 제외한 연습생들이 모두 출근을 마치고 모여 있었다.
단 한 사람. 보민을 제외하면.
“보민이 연락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지서의 물음에 슬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연락해 봤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왜 안 오지? 혹시 어제 너무 무리해서 못 일어나는 거 아냐?”
지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슬기를 보며 물었다.
“어제 너희 제일 늦게까지 있었지?”
슬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근데 어제 갈 때까지 별로 그런 말 없었는데.”
“나도 어제는 아픈 줄도 몰랐어.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데 죽을 거 같았지.”
지윤의 말에 지서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이 된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아프다고 해도 연락을 못 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
슬기는 언니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가지러 가보겠다며 연습실을 나갔다.
“혹시 다른 일 있는 거 아닐까요?”
지윤이 슬며시 아름을 보며 말했다.
“다른 무슨 일?”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걔 여태 이렇게 늦은 적이 없잖아요.”
늦지만 않았을 뿐 아니라, B반에서 가장 연습량이 많고 의욕이 넘치는 연습생으로 인정받는 아이였다. 농담처럼 다리 하나가 부러져도 연습실에 가장 먼저 올 사람이 보민이라고 할 정도였기에 지금의 상황은 다른 연습생들에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장님한테 보고해야 하나?”
아름은 벽에 걸린 시계를 잠시 보고는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더 기다려보고 이야기하자.”
그러나 결국 출근시간이 10시가 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여전히 슬기의 전화에 무응답이었다.
대표로 아름이 위층으로 올라가 매니저를 찾아가 보고해야만 하는 상황. 아름은 보민에 대한 걱정으로 구겨진 얼굴로 실장과 대면했다.
“아직 안 왔다고?”
“네. 전화도 안 되고요.”
“알았다. 우선 넌 내려가 있고 내가 따로 연락해 볼게.”
“네.”
아름이 내려간 후, 매니저는 머리를 긁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또 다른 직원이 물었다.
“한 명이 안 왔어요?”
“그렇다네.”
“탈주는 아니겠죠?”
“탈주 같은 소리하네. 됐고, 보민이 연락처 좀 찾아와 봐.”
“연락처 없어요?”
“걔 핸드폰 말고, 집 주소 말이야.”
혹시 전화가 닿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그렇게 지시를 내려놓고 매니저는 핸드폰을 들었다.
수차례 시도에도 신호만 가다가 끊어질 뿐,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직원이 건넨 주소가 적힌 종이를 접어 품에 넣은 후, 매니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슬기야, 잠시만.”
어수선하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무리 속에서 슬기를 불러낸 후, 다른 연습생들에겐 잡담 그만하고 일단 연습부터 하고 있으라고 시켰다.
이후, 슬기와 함께 연습실 복도에 마주 선 매니저.
“어제도 제일 마지막까지 남았다며?”
“네.”
“특별한 말은 없었고?”
“특별한 건···. 그냥 나중에 데뷔하면 우리가 노력했던 것들이 추억이 되겠지, 라며 그냥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만 했을 뿐이에요.”
“다른 불만 사항은 없었어?”
“어제 레슨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별로 불만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보민이는 그런 레슨을 받는 게 좋다고 했는걸요.”
“그래?”
슬기와의 대화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매니저는 그녀를 다시 연습실 안으로 돌려보낸 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연습생이 무단으로 결근하는 사유는 꽤 중한 일이었다. 연습생, 이라 불러도 일단은 회사와 계약한 사원. 즉, 사원이 회사에 무단결근을 한 상태니 어느 회사라도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회사원과 달리 연습생들의 무단 결근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하지도 못한다. 가끔 회사와의 마찰로, 혹은 같은 연습생과의 불화로, 또 매우 흔한 빈도로 변덕을 부리고 결근하는 사유가 있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이들이 아니라, 젊음과 시간을 바쳐 이후에 받을 성과를 기대하는 연습생들인지라 당장의 어려움에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이제 겨우 20살이다보니 제 딴에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어른인 매니저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미성숙하고 흔들리기 쉬운 나이의 아이들이었다.
때문에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곤혹스러운 건 그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인 매니저뿐이었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 연락을 해보지만,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렇게 사무실 직원들에게 통보한 후, 매니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