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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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 가죽 재킷과 흰색 롱플레어 디자인의 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시은의 걸음은 꽤 당당해보였다. 화려한 스타일,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내뿜는 아우라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저게 ‘스타’라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푸른 빛이 살짝 도는 느낌의 눈이라 단유는 순간 갸웃거렸지만 이내 렌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죠?”
“네, 처음입니다···만?”
뭔가 미묘한 인사말이라 단유는 말끝을 흐리며 되물었다.
“아, 사실 그쪽에 대해 많이 들었거든요.”
단유는 자연히 대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훈은 눈썹을 위로 추켜세우며 ‘나 아니야’라고 말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말고 다른 분한테 많이 들었어요.”
싱긋 웃으며 단유의 주목을 다시 자신에게로 끄는 시은.
“누구요?”
과연 누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도경 언니요. 기억하시려나?”
이름을 듣는 순간, 단유는 ‘아’하고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
“다시.”
아무런 감흥없이 내뱉는 저 단어가 한 시간여 동안 몇 번이나 나왔는지 셀 기력도 없다. 정말 무릎이 후들거리고 허벅지에 경련이 온다 싶을 정도였지만 트레이너는 가차 없었다.
“못 하겠으면 저기 가서 쉬어. 빠져도 돼. 하라고 강요 안 해. 하지만 빠진 만큼 채울 자신 없으면 영원히 이 클래스에서 빠져야 할 거야.”
팔짱을 끼고 연습생들을 바라보는 트레이너의 말에 누구도 쉬겠다며 뒤로 빠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냥 잠깐 쉴게요, 한 마디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름의 곁에서 지윤이 작게 물었다.
“괜찮아요, 언니?”
아름은 살짝 고개를 돌려 지윤을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답할 기운도 없는 모양이라, 지윤은 더 묻지 않았다.
“다시.”
또 한번 트레이너의 주문이 들어왔다. 점심 시간, 붐비는 패스트푸드 점 아르바이트 생처럼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손이 올라가고 무릎을 굽히고 어깨를 돌리며 앉았다 일어섰다, 안무를 이어나가는 연습생들. 달고 뜨거운 입김이 연신 쏟아져 나오지만 투덜거릴 틈도 없다.
이러다 한 사람 쓰러지겠다, 싶을 정도의 고강도 레슨이 이어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 하나 쓰러지는 사람이 없다. 당연히도 트레이너는 단순히 안무를 가르치고 빨리 습득할 수 있게끔 감독하는 일만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힘들다, 죽겠다 해도 연습생 한명 한명을 자세히 관찰하고 정말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한계로 몰아붙이되, 한계를 넘어서지 않게 조율하기 때문이었다.
“10분간 휴식.”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전쟁터에 폭탄 맞은 이들처럼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는 아이들. 그대로 드러눕는 아이들도 있고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처음보단 낫네요.”
그나마 비교적 덜 힘겨워하는 시화가 허벅지를 주무르며 말했다.
“응.”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마구 붙었는데도 뗄 생각도 하지 못하는 시율이 시화의 말에 동의했다.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확실히 첫 시간보단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정말 토나올 정도로 뛰고 굴렀는데, 지금은 쉬는 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으니까. 비교적 안무에 익숙한 자신들만 아니라, 이런 레슨을 받은 적 없던 언니들도 조금씩 적응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때문에 트레이너도 ‘다시’ 반복시켜 숙달시키는 레슨 외에 특별히 코멘트를 하지 않는 것이리라.
기본기는 다른 레슨 시간에 계속 배우되, 지금은 다음 월평 때 선보일 안무를 배우고 있었다. 동시에 이 안무는 시은의 신곡 뮤직비디오에도 삽입될 예정이라 하니, 누구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시화나 시율 같은 아이들에겐 동기 부여가 되었다.
시율은 시화를 보며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다 반대쪽으로 고갤 돌렸다. 역시나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되어버린 채린. 원래도 하얀데, 지금은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괜찮아?”
채린이 시율을 보며 눈꼬리를 아래를 내려보인다.
‘힘들겠지.’
이 레슨이 끝나면 채린은 그녀만의 스케줄 때문에 쉴 틈없이 이동해야 했다.
처음엔 단순한 광고 촬영인 줄로만 알았는데, 채린과 미팅한 감독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채린에게 좀 더 비중있는 역할을 제의했다고 한다. 채린이야 그 제의를 승낙하거나 거절할 권한은 없었고, 그녀를 대리한 매니저가 제의를 수락했다.
사실 잘 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엑스트라 수준으로 주연 모델의 뒤편에서 살짝 얼굴만 내비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주연 모델과 나란히 서서 특정 안무를 소화하는 역을 맡게 되었으니. 그래도 여전히 포커스는 주연 모델에게 가겠지만, 주연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게 어딘가. 시율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채린은 자신이 보기에도 연예인 같은 외모이니, 어쩌면 광고 한 번으로 단번에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을 되새겨도,
‘부럽다.’
이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어린 동생한테 질투나 느끼는 자신이 부끄럽게도 느껴지지만, 이 바닥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아름이 말했던 것처럼, 나이로 우열을 나누는 세계가 아니니 그걸로 위세를 부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걸로 자괴감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더 채린에게 정을 쏟는 시율. 자기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은 뗄 생각도 없으면서 채린의 머리를 쓸어넘겨준다.
“자, 다들 쉬었으면 다시 하자.”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트레이너의 독촉에 연습생들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섰다.
****
“도경 언니가 그쪽 이야기 많이 하던데, 기억하시려나?”
“당연히 기억합니다.”
“그래요? 언니는 자기 기억 못할지도 모른다던데.”
“그럴리가요.”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저런 연예계 사정을 이야기하며 결국 공부나 열심히 하는게 최선이라던 스타일리스트. 그 후에는 도연이라는 걸그룹 멤버의 도우미 역할로 따라와 반갑게 인사하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아직도 활동 중이신지는 몰랐네요.”
“요즘 그 언니 잘 나가요. 가게도 손님이 미어터질 정도로 잘 나가고.”
“가게요?”
“아, 모르시나? 그 언니 청담동에 자기 가게 있어요. 나름 연예인 메이크업을 주로 하는 가게라고 소문도 나고. 물론 전 딱 한 번 밖에 안 가봤지만, 꽤 유명하대요.”
“그래요?”
“둘 만 이야기하지 말고 좀 알려주지? 누군데?”
단유는 간단하게 도경과 얽혔던 이야기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 그럼 그 뮤직비디오 찍을 때, 단유 씨를 메이크업 해준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네? 이야, 대단한 사람이었구만.”
“대단하다고요?”
“적어도 우리 회사에서 그 뮤직비디오 안 본 사람은 없으니까. 무려 그때 그 비주얼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거잖아.”
“그 영상을 찍은 건 뮤비 감독이었죠.”
“지금 스타일리스트 무시하는 발언 한겁니까?”
대훈이 짖궂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만약 이 자리에 시은이 없었다면 예의 재미없는 농담이 주르르 나올 법한데 잘 참고 있는 듯 하더니, 결국 저렇게 한 마디 끼어든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래서 잘 지내시나 보군요.”
단유는 대훈을 한 번 쏘아보고 다시 시은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네.”
“여전히 제 이야기도 여기저기 하시는 거 같고.”
중학교 때 찍었던 공익용 웹 드라마 촬영 당시 만났던 도연. 그녀에게 단유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살붙여서 알렸던 이가 도경이었다. 때문에 도연이 단유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했지만···.
새삼 당시의 기억들이 소록소록 솓아났다. 그러고보니 당시 단유는 웹 드라마 때문에 도연의 기획사에서 마련해준 연기 수업도 들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구나.’
단유의 머릿속에서 주르륵 흘러가는 과거의 기억들 속에서 현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분이 원래 말하는 걸 되게 좋아하기도 하지만, 특히 단유 씨에 대한 인상이 꽤 강했었나봐요. 가끔 언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단유 씨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뮤직비디오를 일부러 찾아볼 정도였죠.”
“···보셨어요?”
“봤죠. 봤으니까 이렇게 직접 만날 날을 되게 고대했던 거고요.”
“오, 그럼 우리 시은 씨도 김 이사 팬인거네?”
“팬이라면, 팬이죠.”
“이런, 우리 김 이사. 또 팬이 늘었어. 언제 한 번 팬 사인회 해야 하는 거 아냐?”
“대표님.”
“뭘 빼고 그래요. 당장 팬 사인회 한다고 하면 일단 우리 회사 직원들은 서로 와서 줄 설 텐데. 혹시 알아요? 회사 바깥에도 알게 모르게 단유 씨의 오랜 팬들이 숨어 있을지.”
단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중에 언니랑 같이 한 번 만나요.”
“그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요, 일단 전 지금 그쪽, 그러니까 연예계 쪽이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렇게 연예 기획사에서 일하시면서 관련이 없으시다고요?”
“그것도 말하면···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이쯤에서 단유는 대훈을 바라보았는데, 대훈은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다시 시은에게로 시선을 돌린 단유는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어쨌든, 제 말은···, 제가 시은 씨 뮤직비디오에 나갈 일은 없을 거란 이야깁니다.”
“뮤직비디오요?”
이번엔 시은이 대훈을 바라보았다.
“아, 그 일전에 말씀 드렸던 이야기요. 회사의 아티스트들이 모두 나와서 씬을 꾸미는 컨셉.”
“아, 그거요. 그게 왜요?”
단유는 대훈을 노려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거 제가 들은 거랑 다른 상황인 거 같은데요?”
지금 상황만 보면 시은은 단유가 출현해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 아닌가?
“아니, 그래서 말했잖아요. 강요가 아니라 부탁이라고.”
“아까는 제가 출현하는 걸 시은씨가 반대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아, 그건 맞아요.”
“네?”
시은은 방긋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데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가 어깨 즈음에서 출렁거렸다.
“그 컨셉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었고, 거기에 회사 연습생들이나 소속 아티스트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어요. 어차피 이번에 뽑힌 노래 컨셉 자체가 새 출발에 대한 이야기고, 마침 회사도 이렇게 옮긴 마당인데 그런 컨셉으로 일반인이 나온다고 해도 아주 무의미한 씬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출연자로 누가 나와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했던 거죠.”
“그럼 절 콕 찍어서 이야기한 건 아니란 거네요.”
“그렇기는 하죠.”
“그럼 됐네요. 나오면 좋지만, 안 나와도 상관없다는 거잖아요? 그럼 전 출연을 고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전 단유 씨가 나오면 좋겠네요.”
“네? 왜요?”
시은이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데, 정말 아까부터 뭔가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고 여겼지만, 특히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는 ‘이게 연예인의 미소’라는 이름표가 붙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게 되잖아요.”
시은은 얼굴 주위를 손으로 돌리는 제스처를 보였고, 옳다구나, 대훈은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딱 좋잖아요. 게다가 유경험자이기도 하고.”
“그러네요, 유경험자.”
두 사람의 반짝이는 눈빛을 받으며 단유는 지금 이게 무슨 시트콤 같은 상황인가 싶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시은은 잔뜩 진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덧붙였다.
“즐겁게 해요, 우리.”
“즐겁게요?”
“이번에 나올 노래 모토가, 우리 모두 즐겁게, 니까.”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시은과 그녀를 훔쳐보며 따라웃는 대훈의 징그러운 미소에 단유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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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맞나?”
거울을 보며 연습하던 지서 곁에서 슬기가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연습실에 지서와 슬기 둘만 남아 있었다. 원래는 이 멤버에 아름까지 셋이 가장 오래 연습실에 남아 있었는데, 오늘 아름은 몸이 좋지 않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시율과 경빈, 채린, 시화는 아직 재학중인 학생들이라 내일을 위해 먼저 집에 들여보냈고 지윤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듯 ‘체력이 딸려’서 일찍 돌아가는 편이었다.
배우 지망이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레슨을 받던 보민은 집이 멀다는 이유로 이들 중 가장 늦게까지 연습하다 돌아가고, 그래서 남은 두 사람이었다.
“슬기야.”
“네?”
“우리 이번에 다 같이 뮤비 찍으면 좋겠다. 그치?”
“네.”
그리고 잠시 말없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 어둑한 연습실에 고요한 정적이 맴돌았다.
“아직도 밖에 비오나?”
“아마도요?”
아까 동갑 친구 보민이 집에 간다고 할 때 잠시 쉴 겸 따라 나갔더니 오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추륵추륵 내리는 빗줄기가 창문 바깥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 비가 와서 그런가, 괜히 울적하네.”
“전 비오면 늘 기분이 다운돼요.”
“내일은 맑았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내일 뿐 아니라 내일 모레, 그 다음 날에도 계속 맑았으면 좋겠다는 심심한 상상을 하다가 지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중에 말야.”
“네.”
“만약에 나중에 우리가 데뷔하면, 그때 지금 이 모습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냥 아련한 추억 정도가 아닐까요?”
“마치 학창 시절처럼?”
“언니나 저나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지났거든요?”
“그래도 그런 거 있잖아? 영화 같은데서 보면 막 학창 시절 추억 같은 거 나오면 괜히 울컥해지고 그런 거.”
“뭔지 알겠어요.”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청춘을 다 바쳐, 꿈을 위해 달린 소녀들 같은 영화 말이죠?”
“그게 무슨 영환데?”
“나중에 제가 찍을 영화요.”
“너도 꿈이 참 야무지다.”
“뭐 어때요, 꿈인데.”
“진짜 나중에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 했다고 토크쇼 같은 데서 말하면 재밌겠다.”
“언니도 벌써 데뷔하셨네요. 토크쇼 소재 걱정하는 걸 보니.”
“아, 예능이든 뭐든 나오면 참 좋겠다.”
“그러게요.”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실소는 금방 폭소가 되어 아무도 없는 연습실을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나갔다. 한참동안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