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5화 (855/956)

추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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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어떻게 알고요?”

단유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시은이란 이름이야 예전에 한참 예영의 카페에 출근하듯이 다닐 때 듣던 노래로 알긴 했지만, 그녀를 본 것은 지난번 그녀가 회사에 인사를 왔을 때가 처음이었다. 그마저도 멀리서 뒷모습만 봤으니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와 단유가 대면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 그녀가 단유를 알 턱이 없다.

“왜 몰라요? 우리 회사 이사님을.”

대훈의 대답에 단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사라고 소개했어요?”

“돈 많고 잘 생긴 무직의 남성이라고 소개할 순 없잖아요.”

“당사자도 없는 곳에서 말이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실은 시은이가 단유 씨를 이미 알고 있더란 말이죠.”

“네?”

그건 더 놀라운 사실이었다. 대훈의 소개를 받기 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

“여보세요? 아, 언니. 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죠. 언니는요? 그래요? 바쁘시진 않으세요? 아, 괜히 바쁘신데 전화했다고 흉볼까봐서요.”

남자들이 들으면 훅 빠질 것만 같은 교태 넘치는 웃음 소리가 잠시 흘러나왔다.

“아뇨, 제가 바쁠 일이 뭐 있나요. 곧 새 앨범이 나오긴 하겠지만, 아직은 괜찮아요. 아, 들켰네. 당연히 자랑하려고 전화했죠. 고마워요, 언니.”

뒷좌석에 앉아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로 통화를 이어나가는 시은의 입가엔 시종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화제는 다양했다. 최근 들어온 회사에 대한 인상부터 해서, 새로나올 음원에 대한 기대감, 요즘 가요계의 분위기, 최근의 근황 따위가 두서없이 오고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세차게 때리며 상대를 부르는 시은.

“언니! 있잖아, 그 사람. 나 그 사람 봤다. 아, 가까이서는 못 보고, 멀리서. 상황이 좀 그래가지고 직접 만나지는 못 했는데, 그래도 멀리서 봤어.”

히죽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은. 검게 선팅된 차창 너머로 나란히 가던 버스가 보였다. 연예인들이나 탄다는 밴의 검은 창문 너머로 누가 있을까 궁금해하는 시선들을 마주보며 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저도 많이 아쉬워요. 회사 옮기면서 이것저것 개인적으로 신경쓸 일도 많다보니 한번 찾아가 인사 나눠야지, 생각만 하다가도 금방 잊게 되더라고. 그래도 오늘은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요. 만나서 언니 이야기 한 번 물어볼까? 하지 마? 에이, 그렇게 나오니까 괜히 하고 싶은데?”

낄낄거리며 웃는 시은. 마침 버스 뒷좌석에 앉아 줄곧 이쪽을 바라보는 교복입은 여자 아이가 보였다. 창에 얼굴을 붙이듯 들이대고 궁금해하는 모습이 마치 지금 통화하고 있는 언니의 그것과 같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신기하더라니까요. 처음에는 그냥 이름이 똑같길래 설마 했거든. 그런데 그런 이름 가진 사람 많지 않잖아요? 없진 않겠지만. 그래서 혹시나 했었는데, 정말인거지. 응, 응. 대표님 책상에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보고, 설마 했는데 그렇더라니까. 언니한테 맨날 말로만 듣던 모습이랑 판박이더라고. 아, 뮤직비디오?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사람이 크면 조금씩 변하잖아요. 물론 손을 대거나 해서 변하는 거 말고. 에이, 디스는 무슨. 언니도 눈만 살짝···. 쏘리, 쏘리. 에이, 또 역정은.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 있다고. 아무튼 말이야, 언니. 이제 회사 다 왔거든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걱정 마요. 언니 이야기, 아주 조금만 할 거니까. 기억하는지 안 하는지 물어봐야지. 응? 혹시 모르죠.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르잖아? 아이고, 알았어, 알았어. 장난이에요, 장난.”

그렇게 마지막까지 짖궂게 상대를 놀리던 시은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언니?”

“응.”

“오늘 미팅 때 회사 임원들도 다 나오는 건가?”

“나야 모르지.”

“언니가 아는 게 뭐야?”

“네 다음 스케줄? 어, 비온다.”

그렇지 않아도 오전부터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네. 야외 스케줄이 없어서.”

“오늘 비온다는 이야기 없었는데.”

“일기 예보가 다 그렇지. 언제는 다 맞나?”

뜬금없이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차창에 들러붙는 소리가 좋다. 비를 맞는 건 싫지만, 비가 내리는 걸 보는 건 좋아하는 시은이었다.

“가끔 이렇게 예고없이 찾아오는 비가 운치 있지.”

“네가 운전을 해 봐라, 그런 이야기가 나오나.”

핸들을 잡고 있던 매니저의 대꾸에 시은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고생하네, 우리 언니. 늘 고마워.”

“이럴 때만.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장난은 무슨. 내가 맨날 장난만 치나?”

“사람들이 알아야 돼. 시은이란 가수의 본모습이 어떤지.”

“알면 어쩔 건데?”

“알면 더 좋아하겠지.”

“역시 우리 언니. 이래서 언니가 너무 좋아.”

“내가 원래 성격 좋다는 소리 많이 들어. 잠깐만.”

이야기 하던 와중에 이미 주차장에 도착해 기어를 후진으로 넣고 주차를 시도하던 매니저는 단 한 번에 완벽한 주차를 해냈다.

“올라가자.”

시은은 히죽 웃으며 클러치 백을 한 손에 쥐고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

“언니, 밖에 비 많이 와요.”

“나 우산 안 가져 왔는데.”

“소나기 아닐까? 금방 그칠지도 몰라.”

“몰라, 난. 갈 때도 비 오면 그냥 맞아야지. 차라리 맞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요?”

“이 땀이 안 보이니?”

“우리 언니, 되게 열심히 한다. 헤헤.”

“내가 너 나이 정도만 됐어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거야.”

“쉿.”

“아, 실수.”

나이 이야기는 연습실 내에서 하지 말자는 규칙을 떠올린 지윤은 자신의 머리를 콩 때리며 슬쩍 아름을 찾았다. 다행히 아름은 조금 전 레슨 때 배웠던 안무를 거울을 보며 연습 중이었다.

“못 들었겠지?”

“조심해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시화의 볼을 잡아 옆으로 늘어뜨리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뽀뽀를 시도하다 시화가 감히 지윤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린다.

“너, 너무 날 막 대하는 거 아니니?”

“언니는 다 좋은데 너무 엉겨 붙는 게 흠이에요, 흠.”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늘 하루 종일 찰싹 들러붙어 볼까?”

“언니! 제발!”

억지로 시화를 껴안으려는 지윤의 손에서 황급히 탈출한 시화가 기듯이 달아난 곳은 만만한 경빈의 뒤. 왜 나한테 오냐며 손을 내젓지만 ‘두 놈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어!’ 라며 지윤이 달려들자 둘 다 꺅꺅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기 바쁘다. 어느새 넓은 연습실이 술래잡기의 장이 돼버린 듯 보이지만, 그런 무리의 분위기와 다르게 혼자서 묵묵히 레슨 때 배운 것을 복기하는 아름, 그리고 또 연습실 구석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또 다른 무리.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쉬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구석에서 쉬고 있던 또 다른 한 무리는 채린과 시율. 유독 채린이 시율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다른 아이들이 사귀냐고 놀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해진 연습실 풍경 속의 하나였다. 특히나 요즘 채린은 갑작스럽게 생긴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과외로 보내는 중이었다. 때문에 17살 한창인 나이에도 체력이 부족함을 느끼는지 자주 피곤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다만 이렇게 시율에게 다가와 볼을 부풀리며 힘들다는 티를 낼 뿐이었다.

“힘들어?”

채린에게 어깨를 빌려준 시율이 나지막히 묻자 채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시율은 그런 채린을 가엾다며 머리를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채린은 시율의 얼굴에 드문드문 드러나는 복잡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윤시율, 19살. 가수 지망이긴 하지만, 오디션에서는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고 다부지게 말했던 아이였다. 때문에 통합반 커리큘럼이 발표되었을 때 가장 많이 좋아했던 아이였고, 지난 시간 A, B반 통틀어 가장 열심히 레슨에 임한 연습생, 으로 트레이너들에게 손꼽히기도 했다. 그런 시율에게 지난 월평의 결과는 상당히 아쉬웠다. ‘아쉽다’라는 말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오죽하면 그간 껌처럼 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만큼 붙어 지내던 채린을 몰래 질투할 정도였을까. 그러나 시율은 자신보다 어린 채린을 드러나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부러운 건 채린이 차지한 1위라는 결과였을 뿐, 채린이 싫어진 건 아니니까. 다만 이렇게 채린이 불어난 스케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 마저도 부럽다며 속으로 질투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앞으로도 크게 어긋날 일은 없어보였다.

같은 시간, 지윤과 경빈, 시화가 연습실을 뱅뱅 돌며 지치지 않는 체력을 과시하고 있을 때, 연습실에서 나와 복도에서 비오는 창밖을 보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또 다른 무리도 있었다. 바로 동갑내기인 슬기와 보민이었다.

“저 차, 시은 언니 차 아냐?”

창에 코를 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슬기의 외침에 창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보민이 고개를 슬쩍 돌려보았다.

“네가 시은 언니 차를 어떻게 알아?”

보민이 되묻자, 슬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몇 번 봤으니까 알지.”

“그래?”

“나 사실 차에 되게 관심이 많거든.”

여자애들 중에 차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이는 많지 않은 편이라 보민이 살짝 놀라는 투로 슬기를 바라보았다.

“특히 밴.”

“밴?”

“나중에 데뷔하고 나면 타고 다닐 차를 상상하느라고.”

“김칫국도 적당히 드셔. 데뷔는 무슨.”

“왜? 내가 데뷔 못할 거 같애?”

“그게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런 데뷔 이야기 할 때냐 이거지.”

“왜? 연습실 안에서만 안하면 되지. 여긴 밖이잖아?”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진짜 데뷔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냐는 거지. 네 친구도 되게 오래 연습생이었다며.”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슬기가 목소리를 죽이며 작게 속삭였다.

“데뷔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뭔줄 알아?”

“뭔데?”

“바로 이거야, 이거.”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보이는 제스처를 보고 보민이 대답했다.

“돈?”

“내 친구 회사는 되게 영세해서 데뷔시키는 게 어려웠던 거야.”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돈 많은 대형 기획사에서도 장수 연습생 있잖아?”

“거긴 사람이 많잖아? 선택되지 못한 연습생은 계속 연습만 해야 되니까 저절로 장수 연습생이 되는 거지. 그런데 여기는 연습생이 많지 않잖아? 게다가 배우 지망, 가수 지망 이렇게 나뉘기도 하니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우리 회사는 돈도 많고, 연습생은 우리 뿐이고 하니까 금방 금방 데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거지.”

“우리 회사가 돈이 많은지 적은 지 어떻게 알아?”

“네가 다른 회사 가봤으면 그런 질문 못한다? 나도 많이 돌아다녀본 건 아니지만, 전에 친구 회사 갔을 때 보니까, 여기랑은 비교도 안 돼. 여기를 기준으로 하면 거긴 동네 구멍 가게 수준이야. 말도 안 되게 허접하다니까? 반대로 말하면, 여긴 진짜 초호화 호텔 수준이고. 딱 건물만 봐도 견적 나오잖아?”

문득 이게 과연 스무살 여자 둘이서 할 이야긴가 싶은 생각이 보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끔 느끼지만, 슬기는 자신과 동갑인데도 가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 자신보다 한참 나이 많은 언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혹시 나이 속인 거?’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무튼 보민은 맨살이 드러난 팔을 긁적대며 대답했다.

“나는 잘 모르겠어.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 실력이 데뷔할 수준이 되냐는 거 아닐까?”

“실력이야, 계속 연습하면 되는 거고. 난 정말 열심히 할 거야. 열심히 해서 반드시 시은 언니가 탄 밴처럼 좋은 차 타고 싶어.”

“근데 밴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거 아냐? 만약에 회사에서 저런 차 안 내주면 어쩌려고?”

“다른 회사로 간다고 협박해야지.”

“······.”

보민은 고개를 흔들다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트레이너와 눈이 마주쳤다.

“너희 뭐해?”

보민은 얼른 창틀에서 엉덩이를 떼며 대답했다.

“쉬고 있었는데요.”

“들어가자.”

“네.”

슬기와 보민은 트레이너보다 앞서 연습실로 달려갔다.

“선생님 오셨어요.”

새로운 레슨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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